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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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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클베리핀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16건 조회 3,111회 작성일 10-03-18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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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usinlove.net/bbs/board.php?bo_table=z7_10&wr_id=11&cart_id=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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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이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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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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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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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교체된 석판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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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er Sorbonne literature professor Robert Faurisson: "The alleged Hitlerite gas chambers and the alleged genocide of the Jews constitute one and the same historical lie, which has made possible a gigantic financial-political swindle, the principal beneficiaries of which are the State of Israel and international Zionism, and whose principal victims are the German people and the entire Palestinian people."
-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Date

Official sources of information

Figures

31.12.1945French Investigation Panel on Nazi-War-Crimes

8.000.000

19.08.1998Chief Rabbi from Poland (Suddeutsche Zeitung)

6.000.000

20.04.1978Le Monde (French daily paper)

5.000.000

23.01.1995Die Welt (German daily paper)

5.000.000

20.04.1989Eugen Kogon, Der SS-Staat (famous book of a holocaust survivor, page 176)

4.500.000

31.12.1952Der Neue Herder (Enzyclop., Germany) 7th edition (p. 214)

4.500.000

01.10.1946IMT-Document 008-USSR (Nuremberg Military Tribunal)

4.000.000

02.05.1997USA-Today (daily paper USA)

4.000.000

24.11.1989Chief Prosecutor, Mr. Majorowsky, Wuppertal, Germany (indictment 12 Js 1037/89)

4.000.000

26.07.1990Allgem. Ju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4.000.000

08.10.1993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4.000.000

25.01.1995Wetzlarer Neue Zeitung (German daily paper)

4.000.000

01.10.1946IMT-Document 3868-PS (Nuremberg Military Tribunal)

3.000.000

01.01.1995Damals (official monthly magazine on history, sponsored by the Bonn government)

3.000.000

18.07.1990The Peninsula Times (daily paper, S.Francisco, USA)

2.000.000

25.07.1990Hamburger Abendblatt (daily paper Germany)

2.000.000

27.01.1995Die Welt (German daily paper, quoting Chancellor H. Kohl. Minimum of 2 million)

2.000.000

02.05.1997USA-Today (daily paper USA)

1.500.000

11.06.1992Allgem. Ju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1.500.000

08.10.1993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1.500.000

23.01.1995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3.05.2000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1.09.1989Le Monde (French daily paper)

1.433.000

02.02.1995BUNTE Illustrierte (German weekly magazine)

1.400.000

22.01.1995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1.200.000

27.01.1995Die Welt (German daily paper)

1.100.000

27.01.1995IfZ (Institut for Contemporary History, Munchen, a government institution)

1.000.000

03.05.2000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reputed German daily)

1.000.000

31.12.1989Pressac, Auschwitz, Technique ...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928.000

27.09.1993Die Welt (German daily paper)

800.000

22.01.1995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750.000

01.05.1994Focus (German weekly magazine)

700.000

23.01.1995Die Welt (German daily paper)

700.000

31.12.1994Pressac, Die Krematorien ... (2nd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470.000

08.01.1948Welt im Film (British news reel, nbr. 137)

300.000

06.01.1990Frankfurter Rundschau (German daily paper)

74.000

31.05.1994Hoffmann, Stalins Vernichtungskrieg (Book on Stalin's war by a renowned German historian, p.302 f.)

74.000

17.08.1994Intern. Red Cross Arolsen - Department of holocaust investigations (Ref. nbr.: 10824)

66.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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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 revisionist Dr. Frederick Toben
c. 사망원인

-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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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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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d. 독가스 사용설

-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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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한 작업실
-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던 William B. Lindsey 박사는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technically impossible") 얘기라고 증언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넥에 전시되어 있는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했다는 방법으로는 지클론-B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주요 수용소들에는 실제로 이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수용소 운영진을 포함, 수감자들의 의복과, 침구 등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DDT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클론-B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였던 대표적인 살균소독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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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루처
- Fred A. Leuchter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가스실 제작 전문가로 미주리 주(州)교도소의 가스 사형집행실을 도안하고 제작했던 보스턴 출신의 공학자이다. 1988년 2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넥 “가스실”에 대한 현장조사를 단행한 그는 법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현존하는 가스실 및 관련시설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시설들에는 적절한 봉인장치와 환기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시설들이 독가스로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되었다면 독일인을 포함, 그 시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Leuchter Report: An Engineering Report on the Alleged Execution Gas Chambers at Auschwitz, Birkenau and Majdanek,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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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라게스
- 1944년 내내 매일같이 독가스로 살해된 수만 구의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아있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그와 같은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하루당 1만에서 최고는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비상식적(preposterous)”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beyond the realm of reality)”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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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e.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국제적십자협회 보고서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전쟁의 말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수용소에서 대량 발생한 사망자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하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후 독일의 수송체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수용소들은 거의 식량을 보급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사자(餓死者)의 숫자는 급증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1945년 2월 1일 이와 같은 사실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통보해 왔습니다... 1945년 3월, 적십자협회 회장은 독일 친위대의 칼텐브루너 장군과 만나 문제를 논의했고 양자의 합의 하에 ICRC는 구호품을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ICRC 대리인을 수용소들에 상주시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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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Kaltenbrunner, 1946년 처형; 마지막 유언, "독일에게 행운을!"
수용소들에 대한 식량보급이 중단된 원인으로 독일 교통수송망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을 지목한 적십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안위를 위해 1944년 3월 15일, ‘연합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2일 ICRC는 수송체계의 붕괴로 인해 전 독일국민이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를 독일 외무성에 전달했다. 영양실조와 기아, 이에 더해 의약품이 극도로 희귀했던 전쟁말기,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해방된 수용소들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발견한 많은 시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은 인근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격, 질병, 기아로 인한 독일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발견한 시체더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적십자위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태생의 Maurice Rossel 박사는 Serge Lanzmann과의 1993년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를 예고 없이 시찰한 그는 그곳에서 가스실이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며 시체를 태우는 냄새도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heresienstadt 수용소에 그가 목격한 것은 좋은 옷을 입은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Richard E. Harwood, Did Six Million Really Die?, 1988)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 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해당년도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39-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강제수용소들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수(모든 국적과 사망원인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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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p.727)
World Almanac, 1933 - 15,316,359 (p.419)
World Almanac, 1936 - 15,753,633 (p.748)
미국유태인위원회(AJC, Bureau of the Synagogue Council), 1939 - 15,600,000
World Almanac, 1940 - 15,319,359 (p.129)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p.510)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p.748)
미국 이민귀화국 (INS), 1950 - 15,713,638 (Appendix VII, 'Statistics on Religious Affiliation'; Report to U.S. Senate Judiciary Committee,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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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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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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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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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간호원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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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revisionist Michael Hoffman과 Canada의 Ernst Zundel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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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 Foxman. ADL National Director
"The Holocaust is something different. It is a singular event. It is not simply one example of genocide but a near successful attempt on the life of God's chosen children and thus, on God Himself. It is an event that is the antithesis of Creation as recorded in the Bible; and like its direct opposite, which is relived weekly with the Sabbath and yearly with Torah, it must be remember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DL bulletin - ADL on the Frontline, January 1994)
*"The Talmudic epigraph of Stephen Spielberg's Schindler's List,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The observant knew that the traditional version, the one taught in all Orthodox yeshivot (religious schools), speaks of 'whoever saves the life of Israel.'" (Peter Novick, The Holocaust in American Life,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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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 오스카 쉰들러
"What did I think? I'll tell you. Scheisskopf (sXhead). But I was the idiot for falling in love with him. I am never going to cry; there is no sense in it. Schindler changed women like he changed suits. Once, we were well-off, but then we lost everything and he abandoned me and I have not recovered... There never was a 'Schindler's List'. It was drawn up by a man called Goldman. This man took money to put a name on that list - no money, no place on the list. I was told this by a Dr. Schwartz, in Vienna; he had paid in diamonds to save his wife... Hah! Neither of us was a hero... Oskar was always complex; he was playing both extremes, always, even at the end with Nazis against the Jews." - Emily Schindler, wife of Oskar Schindler, Drudge Report, June 1,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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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n Spielberg
"Flanked by Holocaust survivors, Los Angeles teens and many of the film's stars, including Ralph Fiennes, Ben Kingsley, Embeth Davidtz and Caroline Goodall, Spielberg said he hoped "Schindler's List" would prove to Holocaust deniers that the murder of 6 million Jews did occur and that it would help educate children to prevent history from repeating itself... "There are Holocaust deniers who are so stuck in their hatred for Jews that neither 'Schindler's List' nor the Shoah Foundation will be able to convince them that 6 million murders actually occurred, but still we must try to convince them," Spielberg said... Survivor Helen Jonas-Rosenzweig told the director, "Schindler saved us, but you gave us our second life." Spielberg said that in the decade since the release of "Schindler's List," the world has become a "very sad place again," which shows that people "don't really learn that much from history, and they need to." (Spielberg: Won't comment on 'Passion', www.CNN.com, March 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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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ack Book of Communism - LE LIVRE NOIR DU COMMUNISME
"An 800-page compendium of the crimes of Communist regimes worldwide, recorded and analyzed in ghastly detail by a team of scholars. The facts and figures, some of them well known, other newly confirmed in hitherto inaccessible archives, are irrefutable. The myth of the well intentioned founders - the good czar Lenin betrayed by his evil heirs - has been laid to rest for good. No one will any longer be able to claim ignorance or uncertainty about the criminal nature of Communism, and those who had begun to forget will be forced to remember anew." (from the dust jacket of English edition, 1997)
Moshe Leshem. former Israeli ambassador to U.N.
"This was a movement staffed in its upper echelons by Jewish Communists and yet the world is comparatively silent about the holocaust and war crimes this thoroughly kosher system inflicted and the identity of the persons who were its architects. Auschwitz is on the tip of every tongue but who has heard of Kolyma, Magadan, the Solovetsky islands and the other infernal Soviet centers of human destruction in eastern Siberia? Who has seen films and books about the millions of human beings worked, frozen and starved to death in the construction of the White Sea-Baltic Canal, over which stood a triumphant, colossal statue of the Jewish communist mass murderer Genrikh Yagoda? The Jewish-communist epoch of mass murder has disappeared into history in one of the great vanishing acts of all time. Only practiced deceivers, with all the sleight of hand of the most accomplished stage magicians, could pull off such a coup against the rest of humanity. To trick mankind into focusing nearly all expiatory sentiment, monuments and commemoration on Jewish victims and brand the Mark of Cain - the very words war crime and holocaust itself - on Germany and upon Germans alone as their proprietary trademark, must be regarded as one of the most masterful achievements of psychological warfare in the annals of illusion... Israelis and American Jews fully agree that the memory of the Holocaust is an indispensable weapon - one that must be used relentlessly against their common enemy... Jewish organizations and individuals thus labor continuously to remind the world of it. In America, the perpetuation of the Holocaust memory is now a $100-million-a-year enterprise, part of which is government-funded." (Balaam's Curse: How Israel Lost Its Way, and How It Can Find It Again, 1989)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유태인이 장악한 소련은 3천만에서 5천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폴란드, 헝가리 국민들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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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태그 방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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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다크가디안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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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를 옹호할 생각은 없으나, 애시당초 600만명이라는 수치가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유태인이 한군데에서 사는 것도 아닐테고, 그 많은 인원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설상 모은다 해도 600만명이라는 수치는 그다시 유태인 인구비로 얼마나 될까? 물론 희생당해 죽어 간자들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나? 왠지 숫자노름에 부풀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군요.

레바세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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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간만에 흥미로운 글이 올라와서 리플달아보네요</p><p>일반적인 음모론과 다르게 이거는 한쪽의 잘못만있다는 논리랑은 좀다를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게</p><p>학살한 사람수가 적고 많고간에 잘못은 오십보 백보다..이건데..결국 여기서 얻고가는거는 형량을 조금 낮추는거라고할까나 ..</p><p> </p>

우주도령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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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중 나치에 의해 유태인이 희생 된 것에 대해서 확실히 밝혀져야합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니까요.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제가 알고 있던 600만에서
위 자료에 의하면 심한것은  6만6천까지 내려간네요?    6,000,000 VS  66,000  어떤 숫자가 진실에 가까울까요?

유태인에 의해 희생당한 수가 "3~5천만명"
이런 엄청난 얘기는 상식이 부족한 저로서는 처음 접하는 것이라....

심하게 애기하면
지들이 죽인 3~5천만명을 학살한 얘기는 안하고,
6만6천명이 죽은 사건은 600만이라 100배로 뻥쳤다.

 놀라웁네요.  역시 이스라엘이야~
로마시대에 유태인40억이 학살당했다는 탈무드기록은.....  짜증이난다.

백상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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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리자들에 의해 각색 되어진 베스트 셀러......패자는 악인이 될 수밖에......은폐되어 질 수 밖에 없는 모든 야사....양면성....

참숯남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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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대학까지 16년이 넘게 받은 진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교육들이 진실이 아니고, 언론에서 보도 되는게 전부 사실은 아니고..근래 들어 기존의 상식을 뒤집어야 하는 일들이 자주생기는 건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br />종교, 역사, 문화, 사회현상, 과학상식, 심지어 스포츠까지..진실을 갈망하고 알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가 봅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신념이 무너지는 게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긍정적이라 생각합니다. 진실이 거짓보다 잔인하더라도 말입니다.</p>

로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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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처형된 사람이 나찌에 의한 유태인 보다 훨씬 많다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계산하는 식으로 하면 스탈린에 의해 직접적 간접적 희생된 사람들은 2천만 까지 된다고 하든데, 이런 사실은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심각하게 문제로 보지 않는 모양입니다.<br />하기사 문제로 지적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없다는 것 이겠지요.

아이젠버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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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어린시절 서부영화보면서 기병대, 백인은 선, 인디언은 악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 기병대와 백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침략자였고 인디언들은 그 땅의 주인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헐리웃 영화와 미국 드라마 등 매스미디어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건지.....</p><p>얼마전에도 여기에서 이런 유태인 학살관련 논쟁이 있었는데 저도 처음엔 굉장히 혼란스럽더군요. 진실은 과연...</p>

다크가디안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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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젠버그// 님을 말처럼 엄연히 미국이라는 나라는 영국의 부산물들이 인디언을 짚밟고 세운 나라입니다. 그만큼 역사가 짧은 나라도 극히 드물죠. 심지어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서 특별 관리 하고 있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강한 민족이 약한 민족을 침략해서 그곳에서 나라를 세운 것과 별반 다를게 없지요. 아직도 강대국은 식민지화된 나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계중엔 독립된 나라도 더러 있지만, 일부러 식민지를 원하는 나라도 더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제가 생각했을때 강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강한자는 그만큼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진실을 은폐하거나 조작하거나 아니면 무마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이지요. 스탈린 역시 그 만큼 인원을 죽였지만, 연합국이라는 미묘한 베일 아래 숨긴 것도 사실이지요. 그후 coldwar가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미국과 소련은 같이 손을 잡았던 우방국가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즉 나치를 없애기 위해서는 적대적이념도 필요없었다는 것이니깐요. 한간에 얘기로는 만약 나치가 세상을 점령했다면, 과학기술 만큼은 독보적인 수준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있더군요. 아마 현재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인데. 간혹 나치의 새로운 무기라든가 과학기술에 관한 문건에 나올때 놀라움을 금치 못할때가 많습니다. 나치를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결국 근본적으로 연합군이라는 '정의'도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세계는 강대국 틈속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평화 아닌 평화가 얼마나 지속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군가 세계를 바로 봐주길 원하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진정한 역사는 아마 신만이 자신의 기억속에 묻어 둘뿐이겠지만요.<br />

핵보일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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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여러 역사적 사료들을 들춰보면 미국이 악의 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div><br /></div><div>실제 2차대전의 발발원인이 히틀러의 야욕?이라고 하지만 실상 진짜 전쟁원인을 보면 전혀 사실과 다르더군요.</div><div><br /></div><div> 히틀러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전쟁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 하고 있었고...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div><div>근데 영국이나 프랑스 특히 폴란드가 전쟁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정답에 가깝더군요.</div><div><br /></div><div> 폴란드를 전쟁에 순식간에 밟혀서 웃습게 보지만 실상 당시 대단한 육군 강국으로 프랑스를 넘어서는 육군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div><div><br /></div><div>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폴란드가 2차대전 발발 얼마전 소련과의 전쟁에서 소련을 굴복시키고 영토를 획득했고 소련은 이 때문에 폴란드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죠.</div><div><br /></div><div> 소련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던 폴란드는 당시 북부지방의 단치히 지방을 탐내기 시작합니다.</div><div>단치히는 당시 자유시지만 실질적으로 독일인이 사는 독일의 영토혔고.. 1차대전 후 승전국이 독일 영토의 1/3을 갈기갈기 찣어놓았기 때문에 생긴 비극의 지방이었죠.</div><div><br /></div><div> 폴란드는 이 단치히 지방을 독일로 부터 정당하게 받아 자국령으로 하고 싶어 무리수를 두죠.</div><div>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에 뒤를 봐주겠다는 협정도 체결합니다.</div><div> 그리고 독일을 도발하죠. 지속적으로 계속 도발을 합니다. 그 와중 유태인들이 단치히 지방에 독일인들에 대해서 단치히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독일인이 유태인학살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죠.)</div><div><br /></div><div> 히틀러는 전쟁을 할 여력이 안되고 영국과 프랑스가 두려웠기 때문에 폴란드의 도발을 최대한 피하려 합니다만 폴란드가 국경지방의 지방방송을 도용해서까지 독일의 전쟁을 도발하죠.</div><div><br /></div><div> 폴란드의 속셈은 독일이 전쟁을 도발하면... 당시 군사력이 형편없다고 소문난 독일을 폴란드가 순식간에 박살내고.. 영국과 프랑스가 도와준다면 독일을 손쉽게 항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div><div> 항복조건으로 단치히를 폴란드령으로 넣고 싶어한 겁니다.</div><div><br /></div><div> 근데 생각과 완전히 다르게 진행된 거죠. 폴란드에서는 독일군이 재건된지 얼마되지 않아 전차도 없고.. 전차들도 모조리 자동차에 캔퍼스를 뒤집어쒸운 가자 전차라는 정보를 믿었었다더군요.</div><div> 막상 전쟁을 해보니 전격적이란 새로운 전략개념으로 폴란드의 기병을 위주로한 군대는 순식간에 발려버리고...</div><div> 프랑스도 독일을 우습게 보다가 순식간에 점령당해버리는.. 뜻밖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 바로 2차대전입니다.</div><div><br /></div><div><br /></div><div> 당시 히틀러의 집권과정 그리고 히틀러의 업적을 보면 그 사람이 단순히 악마로 묘사된건 순전히 미국과 영국 즉 연합국의 적국에 대한 비방전의 일환이었을 뿐이죠.</div><div> 히틀러는 전쟁광도 아니고 이성적인 하나의 지도자였을 뿐이죠.</div><div><br /></div><div> 독일민족이 우수하긴 하지만 알고보면 상당히 불쌍한 민족입니다. 독일인들이 일어설라고 하면 주변에서 밟아버리고 또 일어설려고 하면 밟아버리는 희생량과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div><div><br /></div>

다크가디안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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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왠지 어쩔 수 없이 전쟁한거 치곤 잘싸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차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해석이 되는 것이 역사적 견해인거 같군요. 예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처럼 말이지요. 폴란드가 독일을 우습게 봤다는 것은 우리 선조때부터 일본을 우습게 보아왔던 우리랑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자고 폴란드 역시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는 어떠한 설명으로 논한다 해도 변하지 않을 진리가 될거 같고요.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가 중요하다기 보단 누가 이겼냐가 중요한거 같네요. 어차피 그로인해 달리 해석이 되니...개인적으로 히틀러가 그렇게 전쟁을 벌벌떨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몇 자 적어 봅니다.

푸콘님의 댓글

다크가디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p>상당히 많은수의 유태인이 죽은것은 사실 입니다만. 400만, 600만은 과장된 이야기같은 생각이 드네요.<br />그 수치는 어떻게 계산되었냐면 전후 유태인들이 독일 연방정부에의 청구권자를 통해 집계된 수치이니<br />개중에는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다소 부풀려졌다고 생각이 듭니다.</p>

푸콘님의 댓글

다크가디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11085|1--] <p>히틀러의 집권과정이요? 확실히 그때가 세계적인 대공황이 일어났던 시대이고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제정신이 아닌 시대인건 압니다만.</p><p>파시즘에 의해 성립된 지도자가 이성적인 하나의 지도자라고 전혀 생각이 안듭니다.<br />'이성적'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로 쓰이는건 아니라고 봅니다.</p><p> </p>

수메리아님의 댓글

다크가디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11085|1--] <p> </p><p><br />핵보일러 요원님의 의견에 공감이 갑니다.<br />개인적으로 파악한 시간의 흐름입니다.<br /> </p><p>1939-01-05  히틀러-오베르잘쯔베르그(Obersalzberg)에서 베크 폴란드 외무장관을 영접하다.<br />1939-01-05  히틀러-단치히가 독일 도시임을 주지시키는 <br />1939-01-05  한편 독일-폴란드 관계의 개선을 위한 제안을 내놓았다. <br />1939-01-06  폴란드-이러한 제안들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br />1939-01-30  히틀러-독일제국의회연설 "유태인 문제가 <br />1939-01-30  해결되지 않는 이상 유럽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p><p><br />1939-03-21  독일- 폴란드에 그단스크( 폴란드어:<b>Gdansk</b> (독일어:<b>Danzig 단치히</b>) )의 할양을 요구한다.<br />1939-03-26  폴란드- 독일의 그단스크 영토 할양 요구를 거절합니다.<br />1939-03-31  영국(체임버수상)-영국•프랑스의 대 폴란드원조를 보장한다<br />1939-03-31  런던의 전쟁광 써클은 폴란드정부에 그들의 <br />1939-03-31  의지대로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자유행동권을 선사했다.<br />1939-03-31  런던의 플루토크랫(Plutocrat, 金權정치가)들이 비밀리에 <br />1939-03-31  노렸던 것은 독일과 폴란드의 무력충돌이었다<br />1939-03-31  영국(런던의 일부 일간지들)-독일군대가 폴란드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 (거짓보도)</p><p>1939-04-01  폴란드-4월부터 폴란드 국경내에 살고 있는 <br />1939-04-01  독일거류민들에 대한 테러와 가혹행위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br />1939-04-13  폴란드-단치히 국경부근에서 다수의 독일인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다.  <br />1939-04-13  폴란드-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br />1939-04-14  독일 영사관-셀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을 매일같이 베를린에 보고했다<br />1939-04-28  히틀러-영국과의 해군 협정과 폴란드와의 불가침 조약의 무효를 통고한다.<br />1939-04-28  히틀러-독일제국의회연설<br /><br /><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fuchsia; mso-bidi-font-family: 굴림" lang=EN-US><font style="BACKGROUND-COLOR: #ffffff" color=#37b7fe size=2 face=돋움>(1)단치히는 자치도시로서 독일제국에 귀속된다<br />(2)독일은 독일과 단치히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부설권을 얻으며, <br />(3)이들 시설에 대해서는 폴란드 정부가 단치히 통로에 대해 <br />(4)행사하는 것과 동등한 치외법권적 권한을 누린다.</font></span></p><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fuchsia; mso-bidi-font-family: 굴림" lang=EN-US><font color=#bbbaef size=2 face=돋움><font color=#fe9739>이에 대해 독일은;<br />(1) 단치히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경제적 권리를 인정한다.<br />(2) 폴란드가 원하는 목적과 규모의 자유항구를 단치히에 보장한다.<br />(3) 독일과 폴란드의 현재 국경을 받아들이며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br />(4) 본인의 생애를 초월할 유효기간 25년의 불가침 조약을 폴란드와 체결한다.<br />(5) 독일은 폴란드, 헝가리와 공동으로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며 <br />(5)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일방적 헤게모니를 포기한다.</font><br /></font></span><br />1939-04-29  동아일보(보도)-독일 총통 히틀러 연설<br /></p><p><p><br /> </p><p><img id=Map onclick=Cntr() border=0 name=Map alt="MAP - Click to center" src="http://www.expedia.com/pub/agent.dll?qscr=mrdt&amp;ID=3XNsF.&amp;CenP=53.950244,19.082661&amp;Lang=WLD0409&amp;Alti=1000&amp;Size=448,364&amp;Offs=0,0&amp;MapS=0&amp;Pins=|90ce52|" width=448 height=364 /></p><p>콜버어그<br /><br /><br />1939-05-08  폴란드-300명의 독일주민들이 뉴토미셸에서 강제 추방되었다<br />1939-05-08  폴란드-서부국경이 보이텐(Beuthen).오펠른(Oppeln).브레슬라우((Breslau).<br />1939-05-08  포란드-슈테틴(Stettin), 그리고 콜버어그(Kolberg)를 넘어 <br />1939-05-08  폴란드-독일영토로 확대된 것으로 표시된 지도들이 폴란드 도시들에 배포되었다  .<br />1939-05-09  폴란드-브롬베르크(Bromberg) 소재 독일극장이 강제 패쇄되다. <br />1939-05-15  폴란드-로드시에서 두 명의 독일주민이, 폴란드인들에게 살해당했다<br />1939-05-15  폴란드(카스프리즈키 국방장관)- 비밀회담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  <br />1939-05-17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독일의 상호 불가침 조약안을 거부한다<br />1939-05-21  폴란드-칼트호프에서 단치히 시민 1명이 폴란드인들에게 살해당했다<br />1939-05-22  독일-이탈리아군사 동맹이 조인된다. <br />1939-05-23  히틀러-폴란드 공격의 의지를 표명한다<br /></p><p><img src="http://www.jewishgen.org/danzig/map.jpg" /></p><p>단치히 (Danzig)《Gdan&#324;sk의 독일명》</p><p><img style="WIDTH: 584px; HEIGHT: 516px" src="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2/Extension_of_Germany_(1935-1939)-fr.svg/659px-Extension_of_Germany_(1935-1939)-fr.svg.png" width=657 height=528 /></p><p>독일 지도(1935~1939)<br /><br /><br />1939-06-01  폴란드-국경침범을 비롯하여 독일주민들에게 테러사건들이 계속 증가했다.(~06/30)<br />1939-06-15  독일대사-히틀러 총통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비방에 대한 <br />1939-06-15  독일대사-공식적인 항의서한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합니다.<br />1939-07-01  폴란드-국경침범을 비롯하여 反독일주민 테러사건들이 계속 증가했다(~07/30).<br />1939-08-04  폴란드 중앙정부-단치히에 상주하는 폴란드 세관원들과 관련된, <br />1939-08-04  폴란드 중앙정부-확인되지 않은 낭설에 근거하여 <br />1939-08-04  폴란드 중앙정부-그들의 요구에 불응할시 도시 외부로부터의 <br />1939-08-04  폴란드 중앙정부-식료품에 의존하는 단치히시(市)의 국경을 봉쇄하겠다<br />1939-08-04  폴란드 중앙정부-최후통첩을 단치히 시정부에 전달했다.<br /><font color=#bbbaef>1939-08-07  단치히 시정부-최후통첩을 거부하다.</font> <br />1939-08-09  독일정부-이와 관련하여 폴란드 정부에 우려를 표시합니다.<br />1939-08-10  폴란드 정부-8월 10일 불성실한 답변서를 독일에 보내왔다.<br />1939-08-18  단치히 시정부-단치히 방어를 위해 친위대 방위군에 <br />1939-08-18  단치히 시정부-동원령이 발동되었고 일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br />1939-08-19  영국의 돈 많은 전쟁광들은 이 모든 일로부터 손을 씻고 무죄를 주장하기위하여 <br />1939-08-20  그들이 원했던 전쟁에 대한 도덕적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br />1939-08-24  폴란드 단치히 시정부-세관 문제를 둘러싸고 폴란드 중앙정부와 협상은 <br />1939-08-24  폴란드 정부의 무리한 요구탓으로 아무런 성과없이 결렬되었다.<br /><font color=#f45f00>1939-08-04  의견:폴란드정부가 어떤 요구를  했는지는 모름<br /><font color=#37b7fe>1939-08-23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됩니다. 발트3국의 소련 편입이 밀약됩니다</font><br /></font>1939-08-24  그러자 폴란드-예비병력에 대한 확대동원령을 발동하고 국경에 대한 도발을 가중시켰다.<br />1939-08-25  폴란드군-국제영공을 비행하고 있는 독일의 각료가 탑승한 비행기에 발포합니다.<br />1939-08-25  영국-폴란드의 원조 조약이 체결됩니다<br />1939-08-25  영국-폴란드 보호동맹에 서명합니다. <br />1939-08-26  폴란드-150만명의 폴란드인들이 징집되었습니다. <br /> </p><p><br />1939-08-27  히틀러-제국의회 연설에서 양국의 평화를 보장하는 선에서 단치히, 단치히 통로, <br />1939-08-27  히틀러-제국의회 연설에서 그리고 폴란드와의 <br />1939-08-27  히틀러-관계개선이라는 3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천명합니다.<br /><font color=#26b168>1939-08-28  베를린, 로마, 런던, 파리에서는 분주한 외교적 움직임이 있었다.(~ 31일까지) <br /></font>1939-08-29  히틀러-폴란드 정부로부터 특사의 파견을 기대한다고 발표하다. <br />1939-08-29  히틀러-다시 한번 평화적 해법을 시도했습니다. <br />1939-08-29  독일-영국의 제의에 대하여 단치히의 영토 할양 요구를 반복합니다.<br />1939-08-30  폴란드-이에 대한 응답으로 8월 30일 총동원령을 선포합니다.<br />1939-08-30  스위스-중립을 선언합니다. <br />1939-08-30  히틀러-폴란드 공격명령을 내립니다( 12:40 P.M) [내일  04시 45분 A.M ]<br />1939-08-31  폴란드-8월31일 중대한 국경도발행위를 감행합니다.<br />1939-08-31  독일-폴란드와 국경충돌하다( 21번 )<br /><font color=#f45f00>1939-08-31  폴란드(국영라디오)-양국간의 문제에 대한 독일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font>.<br />1939-08-31  히틀러-폴란드 공격을 명령합니다.<br />1939-08-31  독일영사관-8월 25일부터 8월 31일까지 55건의 독일주민들에 <br />1939-08-31  독일영사관-대한 테러행위를 독일 중앙정부에 보고합니다.<br />1939-09-01  독일-폴란드와 전쟁을 시작하다( 04:45 )<br />1939-09-01  히틀러-베를린, 제국의회에서 개전연설하다.<br />1939-09-01  히틀러-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에는 힘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p><p><br /> </p><p style="LINE-HEIGHT: 12pt; MARGIN: 0cm 0cm 0pt; WORD-BREAK: keep-all; mso-line-height-rule: exactly" class=MsoNormal><font size=2><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0d0d0d; mso-bid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themecolor: text1; mso-themetint: 242"><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font> <br /> </p></p>

바람의호랑이님의 댓글

다크가디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죠!<br />패자는 말이 없는 법 입니다.<br />그 이유가 정당하는 정당치 안든.....정의는 없죠!

수메리아님의 댓글

다크가디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11112|1--] <p> </p><p><br />그렇다고 봅니다.<br />승자가  자기 유리한대로 역사 조작을 <br />해대고있는게 현실이라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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