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가 유기체로 진화할 수 있을까? > 행 성

살아있는 천체(행성, 항성, 성운)의 이야기

가이아 이론(Gaia theory)에 따르면 지구는 하나의 총체적인 유기체다. 그러나 1978년 영국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이러한 주장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 시도하기 훨씬 전부터 과학소설계에서는 생명에 대한 정의를 보다 포괄적으로 확장하는 융통성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사상가이자 소설가 올라프 스태플든(Olaf Stapledon)의 장편 ‘별의 창조자 (Star Maker; 1937년)’와 ’성운의 창조자 (Nebula Maker; 1932/1976년)’에는 인간 같은 유기체들뿐 아니라 항성들과 성운(星雲)들도 고차원의 지성을 지닌 역동적 존재들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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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성들과 성운(星雲)들이 고차원의 지성을 지닌 역동적 존재들로 그려지는 올라프 스태플든(Olaf Stapledon)의 장편 ‘성운의 창조자 Nebula Maker; 1932/1976년’.(copyight: Sphere)
다만 ‘별의 창조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주마간산으로 살피듯 지나치는 구성이라 별의 생태학에 대해 개념적인 고찰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반면 프레드 호일(Fred Hoyle)의 ‘검은 구름 (The Black Cloud; 1957년)’은 지각 있는 성운을 단지 세상에 대한 비유나 풍자의 소재로 쓰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존재가 실제로 인류와 조우했을 때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호일의 소설에서는 자의식을 지닌 성운이야말로 사실상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인물이 아니라 인물을 에워싼 세계나 환경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집필방식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미항공우주국의 우주생물학자 마이클 뉴(Michael New)는 성간 먼지밖에 없는 진공의 우주에서 지적인 피조물이 탄생 및 진화할 가능성에 대해 머리를 가로젓는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방사능으로 가득 찬 환경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환경에서 생명이 태어난다면 그것의 신진대사 메커니즘은 우리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의 ‘검은 구름 The Black Cloud; 1957년’은 지각 있는 성운을 단지 세상에 대한 비유나 풍자의 소재로 쓰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존재가 실제로 인류와 조우했을 때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훨씬 더 하드과학소설의 본질에 충실하다.(copyight: Desmond Skirrow etc.)
일본에서는 가노 이찌로(加納 一朗)의 ‘제7의 태양 セブンの太陽; 1969년’이 아예 행성 자체가 생물이어서 다른 동식물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에 인간 탐사대가 착륙하여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 바 있으며, 만화가 데스카 오사무(手塚治虫)는 자신의 대하만화에 주인공 일행이 우주여행 중에 살아있는 행성에 불시착했다가 뜻하지 않게 곤욕을 치루는 장면을 삽입했다. 미국 작품 가운데 로벗 실버벅(Robert Silverberg)의 장편 ‘대양(大洋)의 얼굴 The Face of the Waters; 1991년’은 육지가 전혀 없이 바다로만 지표가 덮인 행성이 의식을 지닌 사례를 그린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가노 이찌로(加納 一朗)의 ‘제7의 태양 セブンの太陽; 1969년’은 1970년대 우리나라의 아동용 과학소설 문고인 아이디어 회관 SF전집의 하나로 번역 출간된 바 있다. 당시에만 해도 저작권이 없던 시절이라 표지 디자인까지 무단으로 베꼈다. (source: 少年少女21世紀のSF ７)
그러나 이제까지 살아있는 천체를 등장시킨 과학소설 중에는 사고실험의 깊이나 복잡다단한 설정의 유기적인 짜임새를 고려할 때,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의 ‘파운데이션 시리즈 The Foundation; 1951~1986년’의 일부 에피소드에 비할만한 예가 드물다. ‘제7의 태양’에서는 살아있는 행성이 간지럼을 탈 정도로 지각(地殼)을 근육처럼 움직이다 보니 지표에 다른 동식물이 일체 살지 못한다. 반면 ‘파운데이션’에 등장하는 가이아 행성은 바위와 흙 그리고 강과 바다로 이뤄진 무생물의 지각(地殼)은 물론이요 그 위에서 살아가는 동식물과 하늘을 나는 곤충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공동의 기억을 공유하는 그야말로 유기적인 생태계다.

단지 당연히 살아있다고 여기는 생물들뿐 아니라 무생물도 하나의 통일된 생태계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행성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함께 상호작용 하기 때문에, 가이아인 한 명이 외부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우주는 물론이고 가이아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의사결정을 논의할 때 해당 가이아인은 모든 정보를 다른 가이아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행성의 동식물 그리고 산과 바다와도 실시간으로 공유할 뿐 아니라 이들의 의견을 같은 식으로 반영한다.

가이아인의 주장에 따르면 이 행성의 암석과 개천에도 인간과 동식물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이지만 미미하게나마 의식이 담겨있다. 아시모프의 가이아 행성은 과학소설에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에 가장 근접하는 예라 평가할 만하다. (이와 관련하여 더 자세한 논의는 후에 “살아있는 세계”항목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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