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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에 대한 기록 ...용봉문화설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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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10건 조회 1,505회 작성일 04-08-0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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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나라의 소개는;

은나라를 건국한 탕왕湯王의 시조인 [설]이 순임금(제순유우)과 하나라의 우禹 임금때 벼슬을 하고 상商이라는 곳의 제후로 봉해진 가계 내력과 도읍의 이름을 따라 상商나라 라고도 하며, 고대 은나라를 포함하여 현재의 중국 땅에 있던 옛 중원 일부의 역사는 삼황(태호복희. 염제신농.황제헌원), 오제(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 제순유우), 하夏·은殷·주周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일설에는 은나라 이전의 삼황오제와 하나라를 전설적인 왕조로 취급하여 신화 정도로만 보는 견해도 있으나 동이족의 뿌리를 찾아보면 이들의 역사는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주나라까지의 중원 왕조의 흐름을 서술식으로 체계화 하면 다음과 같다(중원의 왕조는 하나라 이전까지는 세습 왕조가 아니라 덕있는 사람이 대통을 이어 받았다).

①배달국倍達國의 5대 환웅 태우의太虞儀(즉위 BC 3512)는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다의발多儀發은 대통을 이어 6대 환웅이 되고 그중 막내인 태호복희는 중원으로 진출, 현 하남성의 진陳에 도읍하여 문명을 개척하였다.

②배달국 8대 환웅 안부련安夫連(즉위 BC 3240)의 신하로서 소전少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강수姜水(섬서성 기산현岐山縣)에서 군軍을 감독하던 직책에 있었다. 소전은 웅씨熊氏족의 지류로서 배달국에서 대대로 우가牛加의 직책으로 주곡主穀을 관장하던 고시씨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이 소전의 아들이 염제신농이며 중원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③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黃帝軒轅(BC 2692~2592)이 나왔다. 황제헌원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치우천왕蚩尤天王 이라고도 함)과의 수차례에 걸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뿌리를 캐보면 결국 같은 동족간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④삼황三皇이후의 오제五帝는 그 근원이 모두 삼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 소호금천 : BC 2598 ~ BC 2514
▲ 전욱고양 : BC 2513 ~ BC 2436 ; 황제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 : BC 2435 ~ BC 2365 ; 황제훤원의 증손자
▲ 제요도당 : BC 2357 ~ BC 2258 ; 요임금이라고도 함. 요임금 25년에 단군 왕검 조선 건국.
▲ 제순유우 : BC 2255 ~ BC 2208 ; 순임금이라고도 함.

⑤순임금의 뒤를 이어 순임금때 치수에 공이 큰 우禹가 제위를 이어 받아 하夏나라를 세웠다. 이때부터 하나라(BC 2183 ~ BC 1752)는 왕조를 세습하기 시작하여 17대에 걸쳐 약 400여년 존속하였다.

⑥하나라의 마지막 왕은 폭군으로 이름 높은 걸桀인데, 걸왕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인물이 성탕成湯이라는 제후였다. 성탕의 조상은 [설]이며 [설]은 황제헌원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의 아들이다. [설]은 순임금과 하나라 우임금때 상商이라는 곳의 제후로 봉해졌고 그의 후손인 성탕成湯이 걸왕을 내몰고 단군조선 13대 흘달屹達의 조력을 받아 걸왕을 축출하고 은殷(商)나라를 건국하였다. 은나라는 BC 1600년경에 창건하여 BC 1050년까지 약 600여년간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實證 한단고기]가 인용한 <단군세기>나 <규원사화>에 의하면 13대 단군 갑오 16년(BC 1767년)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하나라 정벌 기록이 있어 건국연대 및 멸망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⑦오제五帝중 제곡고신의 여러 부인들중 강원姜嫄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부인의 아들이 후직后稷이며, 후직의 후손들이 중원의 서쪽으로 진출하여 융적戎狄(견이를 일컫는 말이며 서쪽에 살았다고 하여 서이西夷라고도 함)과 섞여 살았다고 한다. 후직의 후손중에 은나라 말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있었으며 고공단보의 손자가 서백 창이고, 서백 창의 아들이 단군조선의 조력으로 은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이다.

▒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중원에 왕조를 세웠던 삼황오제나 하.은.주 모두 근본은 동이족이며 환국桓國을 계승한 환웅시대의 배달국이 그 뿌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나라 무왕 이후 중원의 동이족이 어떻게 잔존하여 분포되어 왔는지, 지나족(차이나China 즉, 화족華族)과 동이족東夷族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며 인체상의 어떤 요소로 판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본인도 깊은 지식이 없어 고대사와 종족분포에 전문적인 역량이 높은 분들의 참여를 바라고 있다. 더구나 역사 이래 동이족들중 상당수가 저 넓은 대륙에서 오랜 기간동안 여러 경로를 거쳐서 지속적으로 혼혈이 되어 왔고 문화적으로 흡수되어 왔다면 무슨 근거로 민족을 구별해 낼 수 있겠는가. 쓸데 없는 고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요즈음 북한을 탈출하는 조선족 여인들 중에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중국인과 결혼하거나 몸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착잡할 뿐이다.



은나라 말 사치와 향락에 빠진 폭군 주왕紂王은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한 때는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뜨거운 숯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둥근 구리기둥을 걸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을 받은 신하들은 미끄러운 구리기둥을 걸어가다가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주왕과 달기는 이를 보면서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은나라 왕실에는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 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공자는 이 세 사람을 '은殷 3인仁'이라 하였다).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도록 권고하였다. 그런 뒤 비간比干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고 '내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이 종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이를 알고는 기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렇듯 포악했던 주왕도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 비간比干

문헌과 표현방법에 따라 비간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자 또는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라고 되어있다. 왕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주왕의 숙부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간]은 29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태정제의 맏아들은 30대 을제(乙帝)가 되었다.

아마도 [林氏先祖寶鑑]에서 비간을 '마지막 왕자'라고 표현한 것은 을제(乙帝)를 이어 받은 마지막 주왕紂王이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나라를 망치고 무수한 충신들을 참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왕통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은나라 '마지막 왕자 비간'이 순국하자 비간의 부인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長林山 석실에 피신하여 그 후에 아들을 낳으니 처음 이름을 泉이라고 지었는데 泉의 나이 3세때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가 건국되자, 주의 무왕武王이 그 혈통을 찾아 장림산의 '림'을 따서 林氏를 사성賜姓하였고 굳굳하게 성장할 것을 뜻하여 '견堅'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비간의 능陵은 현재 중국의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에 있으며 그 후손들이 춘추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고 한다. 비간의 후손에 대한 상세 내용은 아래 [비간의 후손] 내용을 참조하시라.

▒ 기자箕子

기자箕子는 비간比干의 친 동생이다.기자에 관한 내용은 이일봉님의 [實證 한단고기]을 인용해보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에 은나라의 폭군 주왕에 의해 투옥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실로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후대에 왜곡.날조된 기사가 분명하다.

<단군세기>는 당시 기자가 나라를 잃은 왕족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남성 서화西華라는 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제 갓 태어난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막강한 조선의 왕으로 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결국 기자조선설은 후대에 조선이 쇠락하면서 중원의 세력이 커지자 당시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독자적으로 은나라를 물리칠 능력도 없어서 여러 동이東夷들의 도움으로 거사를 성사시켰던 무왕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단 말인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은 <서경>과 <사기>이다. 주지하다시피 <서경>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자(BC 552~479)가 말년에 편찬했다는 문헌이고, <사기>는 한나라 때 사마천司馬遷(BC 145~86)이 저술한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이다. 이 두 문헌은 아무런 근거나 출처도 밝히지 않고 기자와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자와 사마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기보다는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서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자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단군조선이 건재하고 있었고,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때에는 단군조선의 삼한 가운데 진한이 북부여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중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번한(번조선 : 이 무렵에는 한나라에서 도망해온 위만이 차지하고 있었음)도 엄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문헌에 기록된 내용은 후대에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공자와 사마천이 직접 기록했다면 의도적인 곡필임이 분명하다.

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 <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이 된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나라나 주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며 기자조선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기자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면 당연히 중원에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사기>를 주해한 중국의 학자들도 집해集解.정의正義.색은索隱에서 한결같이 기자의 무덤이 황하 남쪽의 하남성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梁國蒙縣 有箕子塚 양국의 몽현은 현 하남성 상구商丘시 일대를 말하는 것을, 상구는 옛 은나라를 일명 상商이라고 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그곳에 기자의 무덤이 있으며, 그곳에서 서남쪽에는 <단군세기>에서 기자가 말년에 살았다고 한 서화西華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은 기자와 마찬가지로 은나라의 왕족이었던 미자微子가 다스리던 송宋나라 지역이다. 기자가 이곳 서화에서 두문불출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고 중국의 학자들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이곳은 기자가 살았다 하여 지명이 기성箕城으로 바뀌기도 했다. 중국의 문헌인 <수경주水經注>는 기성箕城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안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

城內有成湯塚 其西有箕子塚

양국 몽현에 기자의 무덤뿐만 아니라 은나라를 세운 탕왕의 무덤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자가 옛 은나라 땅인 송나라에서 은거하다가 탕왕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는 말이 된다.』

▒ 미자微子

미자微子는 폭군 주왕紂王의 이복형제이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해서 옛 은나라 백성들의 동요와 반란을 막고 은나라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경은 무왕의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무경이 죽자 미자微子가 제후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이를 송宋나라라 하였다. 송나라는 옛 은나라 땅에 있었다.



▒ 기자箕子의 후손과 폭군 주왕紂王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아래 자료는 왕족중 장자였던 비간比干의 후손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인데, 이 기록은 특정 성씨를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왕조 멸망시의 왕족의 신분으로 주왕紂王의 폭정을 바로 잡기 위하여 간언하다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후대를 추적해봄으로서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발굴에 일익이 되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비간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대손]으로 아래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황제헌원과 비간, 황제헌원과 동이족의 연계성을 수립하기 위해 부득이 林氏先祖寶鑑중의 일부를 수록하였으니 양지하시고 이 자료를 보시는분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족보라는 것은 만드신 분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통해, 심지어는 해외출장 조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집념과 노력의 결실임을 생각할 때 충분히 역사연구의 한 근거가 될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다만, 본 林氏先祖寶鑑상에는 헌원황제가 동이족이었음을 주장하거나 그러하리라고 예상한 언급이 전혀 없어 섭섭하던터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역사 연구가이신 이일봉님의 저서 [實證 한단고기]를 발견하고 읽어본즉 은나라에 대한 언급이 상상외로 많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위에 서술한 [은왕조가 동이족이었다는 고증 및 사례]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 다음은 수풀림林 한국종친대종회에서 발간한 임씨선조보감林氏先祖寶鑑에 수록되어 있는 '林氏의 源流를 찾아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땅의 임씨林氏는 득성得姓 이후 3천 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고대 중국땅에서 2천년을, 그리고 한국에서 천 백여년 동안 조상님들의 맥이 이어져 왔다고 하겠다. 중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은殷나라 마지막 왕자王子이신 비간(比干 : 3090년전)공을 꼽을 것이다. 이분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세 후손이시며 그당시 은나라 3인(비간比干, 기자箕子, 미자微子)중 한분이시다. 중국 정부에서 옛날부터 이분을 추앙하기 위하여 비간능比干陵을 위시하여 삼인사三仁祠등 여러 곳에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득성임씨得姓林氏는 비간공의 아드님이신 임견林堅공이신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임견공이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견고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다. 그리고 이분의 아버님이신 비간공을 태시조太始祖라 칭한다. 득성시조 임견공으로부터 우리나라 임씨를 살펴보자. 득성조로부터 중국땅에서 2천년을 이어왔고, 그간에 많은 선조님들이 중국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중 몇 분을 소개하면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큰손 역할을 하신 득성조 23세인 임방林放공이 계시고 득성조 64세인 진안군왕晋安君王 임록林祿공이 계시다. 이어 득성조 80세인 임온林蘊공이 계신데 이분의 9형제가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사九牧詞라 칭하였고, 이분의 고손高孫인 임팔급 林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중 변방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중국의 팽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중략- 』

▒ 아래는 임씨한국종친회 각 본관 대표들이 선조 제향참례를 위해 중국에 직접 방문하여 중국, 대만 등 세계의 종친회원들을 만났을 때의 기행문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 지난 1995년에 중국의 제향참례 및 조상순례를 인도하여 춘추春秋로 2회 다녀올 수 있었다. 춘계제향春季祭享은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의 태시조 비간릉比干陵에서 행사 하였는데 대규모의 태시조 릉과 많은 사당, 제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비간공을 비롯하여 이분의 비碑 와 적자 득성원조 임견공과 손자 두분의 상像을 배향하여 모셔 놓았고 오래된 수많은 비석과 넓은 광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각 국의 종친 대표들이 각 나라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질서있게 입장하여 제향참배를 하게 되니 3천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이 얼이 새로웠다. 특히 중국 정부기관에서 우리 일행을 특별히 보살피기를 호텔에서부터 호위가 삼엄하였고 차편으로 갈 때는 앞뒤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연도沿道에는 교통결찰이 거수경례를, 행사장에는 당비서.시장.서장 등 관리들이 환영하였으며 악대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또한 위휘시 목야牧野에 장림산長林山이 있는데 이곳은 임견공 출생지로서 석굴에는 출생한 견堅공을 안고 있는 어머니 진씨陳氏의 상이 있고, 큰 글씨로[林堅出生地]란 안내석이 있었으며, 큰 비碑에는 황제黃帝(황제헌원)로부터 내려온 내력과 득성得姓하게된 내용이 담겨져 있어 옛일을 한 눈에 회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다음으로 하남성 안양에 있는 은허지殷墟趾를 찾았는데 은나라 왕궁으로서 비간공 이전에 계셨던 조상님들의 왕궁인 것이며 고색이 짙은 상형문자와 갑골문자로 치장해 놓았는데 보존이 잘되어 있었고 조상님들이 나라를 통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태시조 비간공으로부터 현존하고 있는 상고대 조상님들과 팔급八及공이 사시던 집까지 찾았으니 팔급공의 계대 연결은 적중한 것이다. 우리 임씨는 황제헌원으로부터 32대 은나라 마지막 왕자인 비간比干공을 태시조太始祖로, 이분의 아들인 임견공(BC 1121)을 원시조로, 동도東渡하신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여 뿌리가 확실하게 어어진 것이다.(…) 팔급공과 그 일행이 신라국 아산만에 정착하면서 토성을 쌓고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팽성彭城이란 팔급공의 고향 지명을 불러 팽성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중국 당나라 성주의 고관 후손이요, 한림학사 병부시랑이란 막중한 벼슬이었던 팔급공이 토성에 사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최근 1988년 수원대학에 의해 팽성에 있는 농성濃城에 대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던 바 팽성임씨彭城林氏(본관 평택임씨를 말함) 시조 팔급공이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고, 현재 평택시에서 이 농성의 복원사업을 마쳤다. 또한 이 곳 지명을 팔급공의 고향故鄕 지명인 팽성彭城으로 지어 불러온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현재 평택시 팽성읍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팔급공은 이곳에서도 외침을 막는데 분투하였고, 이에 신라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셨으니(…) 우리 한국에 있는 임씨는 기원전 1121년에 득성하여 중국에서 2000년을, 그리고 대개가 1100여년 전에 동도하신 임팔급공의 후손들이다. 관향을 달리하고 있으나 우리 林氏는 한 할아버지(비간)의 자손임이 분명하다...』

▒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1999년 현재 세계에 퍼진 임씨종친의 인구수가 약 7천만명인데 중국대륙에 6천만명정도가 살고 있으며 중국외의 전 세계 곳곳에 1천만명이 살고 있고 그 1천만명 중에서 우리나라에 약 1백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林氏先祖寶鑑의 내용대로라면 전 세계의 수풀林을 쓰는 사람들은 시조가 한분이며 그분은 고대 은나라 말 三仁중 한 사람인 비간比干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 다음은 저 유명한 기자箕子의 조선朝鮮 망명설과 관련, 비교 연구의 여지가 있을듯하여 임윤화林允華 대법사의 축간사祝刊辭를 인용해 본다.

『…우리 林氏 조상의 원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林氏 太始祖 비간공은 순국하시고, 그 동생 기자箕子는 해동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 태조대왕이 되시고, 미자微子왕자는 국외로 추방되었던 것입니다. 비간공의 부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 석실에 피난하여 아들을 낳으니 子 천泉 이었던 것입니다. 3세시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이 長林山의 林을따서 임씨로 사성賜姓하고 원래의 이름인 천泉을 견堅으로 하여 임견공이 수풀림의 득성시조가 되셨습니다…』

기자의 조선 망명설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으며, 기자는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는 [實證 한단고기]를 쓴 이일봉님과 [古記로 본 古代韓國史]의 한순근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출차 : 이것 저것 참조 해서 조사한 자료지만 싸이트는 대충
http://www.eundynasty.com/%C0%BA%BF%D5%C1%B6%B4%C2%B5%BF%C0%CC%C1%B7.htm 참조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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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진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상당히 수고한 모습이 보이네요. 옛것을 알아야 힘이 생기죠. 우리조상의 뿌리를 먼훗날 과학적인 도구로 제대로 밝힐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욱 좋은 자료 올려주세요. 고맙습니다.

김경태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황제헌원이 치우천왕과 전쟁을 치룬 점 때문에 많은 분들이 황제헌원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 잘못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위 내용에서 나와있듯 황제헌원도 같은 동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대리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이소노가미님..
그런 엄청난  말을..
사과하셔요...이런 조은 글을 읽게 해주시는 분께 이런 무례한 말을 하시다니..

임경운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제가 수풀임을 쓰는데 여기까지는 몰랐어여....솔직히 수풀임을 쓰는사람들도 이런것까지 아는사람은 많지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김현진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우리나라 임씨도 중국의 임씨와 같은 조상일까요? 우리나라의 성은 중국에서 하사받거나 하지 않았나요?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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