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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케네디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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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장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0건 조회 1,475회 작성일 02-05-2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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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2년 6월17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민주당 본부사무실이었던 워터게이트 빌딩에 비밀공작반이 침투,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워터게이트 사건은 급기야 74년 미국헌정사상 처 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사임의 궁지로 몰아 세웠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던 닉슨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 는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주의 전통 은 수호되고 정치풍토가 개혁돼 미국을 더욱 강건하게 만들었다.

25주년을 맞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교훈과 현대 정치사적 의미, 의문점 등을 정리해 본다.

2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남겨져 있지 않은 단순한 과거의 정치적 비리로 여겨지고 있다.

AP통신이 최근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재발되어서는 안될 정치적 사건」으로 간주하면서도 이란-컨트라사건과 폴라 존스 성희롱제소사건 등 이후 폭로된 정계의 다른 각 종 비리로 인해 무감각함을 드러냈다.

전국의 성인 1천13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조사에서 68%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지난 25년동안 정계에서 발생한 각종 스캔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고 대답했다.

또 62%의 응답자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이 후 정부를 불신토록 하는데 큰 작용을 하지는 않았다고 답했으며, 단 31%만이 이 사건으로 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정부불신의 계기로 여긴 사람들은 대부분 35∼64세 연령층에 속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35세 이하의 조사대 상자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이름정도만 희미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35세 이하의 조사대상자들중 일부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존재에 대해 영화 「포 리스트 검프」를 보고 알게 되었다고 흥미로운 답변을 했다.

그러나 조사대상의 59%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닉슨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한데 대해 「당연한 것」이라고 응답, 정치 적 비리에 대한 책임 추궁만큼은 철저히 해야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문제점은 선거자금법 이었다.」많은 사람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위선과 불법에 가득찬 닉슨대통령의 개인문제로 국한시키고 있지만 이 역사적 사건의 발생 배경에는 허술한 선거자금법이 작용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난 72년 워터게이트빌딩의 민주당 당사를 침입, 도청까지 했던 비밀공작반에게 지급된 돈은 모두 정치헌금에서 나왔던 것이다. 당시 허술했던 관련법을 악용, 닉슨은 헌금받은 정치자금중 일부를 아내의 귀걸이를 사거나 별장을 수리하는데 마음대로 전용했다.

닉슨의 재임기간 중에는 현재 선거법 특히 하드머니 관련 선거법과는 달리, 개인의 헌금 상한 액이 별도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외국기업도 마음대로 법에 따라 정치 헌금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의회는 처음으로 정치헌금 상한제도를 도입했으며 연방선거 위원회(FEC)란 감시기관을 설립, 선거자금의 출입을 엄격히 감독하는 현재와 같은 틀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선거자 금법 개정은 추후 정치권등의 타협으로 인해 합법을 가장한 「소프트 머니」라는 기형 적인 정치자금 조성방법을 통해 퇴보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지난 95∼96년 대선기간의 경우 민주, 공화 각 당은 무려 1억2천만달러에 달하는 문제의 소프트 머니를 조성했었다. 민주당도 외국기업등 불법적인 선거자금으로 확인한 3백만달러는 모두 이 기간동안 소프트 머니를 통해 조성됐다.

정치분석가들이 지적하는 문제점은 바로 정치자금에 관한 한 아직도 불법적인 행태가 계속되고 있지만 오히려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은 국민들의 감시기능은 현재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데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당시 커먼 커즈에서 법률 고문이었던 프레드 우세이머는 『70년대에는 시민들이 정치적 분노와 요구가 있었지만 현재는 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면서 『현재는 이 때문에 오히려 더 위기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회상하는 데이빗 오베이 연방하원의원은 『74년은 역사적 승리였으며 완벽한 정치시스팀이 탄생할 줄 알았다』며 『이제 필요한 것은 당시처럼 정치적 비리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를 찾는 열정이다』고 회상했다.

지난 76년 연방대법원이 정치적 자유를 이유로 들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마련된 선거자금법의 제한조건을 일부 완화하면서 비롯되었으며 FEC는 곧바로 소프트 머니를 합법적인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소프트 머니는 연방선거에 직접 사용할 수는 없지만 대신 대통령 등 특정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광고등에는 지출할 수 있는 정치자금을 말한다 .

일례로 약 2천만달러를 소프트 머니의 형식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한 민주당의 불법선거 자금을 비롯, 현재 양당이 겪고 있는 선거자금 스캔들은 바로 닉슨 재임당시와 유사하다. 오히려 약 2천만달러를 현재로 말하는 소프트 머니로 조성했던 닉슨대통령에 비해 클린턴 대통령의 경우 지난 대선기간 중 1억달러가 훨씬 넘는 돈을 소프트 머니에 의해서 정치자금으로 조달했다.
25년전 민주당 선거대책본부가 있던 워터게이트 빌딩에 공화당의 비밀특공대 5명이 도청을 위해 잠입했다가 체포됐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날부터 끈질긴 추적 보도를 계속, 닉슨이 재선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여기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이 신문사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

당시 신참기자였던 우드워드는 이후 신문사에서 간판스타로 성장, 「클린턴 행정부의 내부」,「선택」과 같은 베스트 셀러까지 저술하였지만 번스타인은 퇴보의 길을 걸었다 .번스타인은 ABC방송으로 옮겼으나 점차 명성이 떨어지기 시작, 최근에는 본국 대우자동차의 광고에 출연하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닉슨은 국제 정치전략 전문가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하는 등 나름대로 의욕적인 활동을 계속했으며 지난 94 년 4월 사망했다.

또 워터게이트의 비밀을 제보했을 것으로 관심을 모았던 당시 대통령 보좌관 존 딘 은 그후 사건의 뒷이야기를 묶은 「블라인드 앰비션」이란 베스트 셀러를 출간했으며 현재 LA서 투자금융가로 활동중이다. 그는 상원청문회에서 『닉슨대통령은 도청을 하기 위해 비밀 행동대원들이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잠입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측근 보좌관들과 함께 은폐를 기도했다』고 진술, 파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또 당시 하원법사위원회 소속으로 같은 공화당이면서 닉슨에게 사건관련 테입을 제출하라고 요구, 소신파로 각인되었던 윌리엄 코언 당시 하원의원은 현재 국방부장관으로 일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도 당시 예일대 법대를 갓 졸업한 뒤 하원법사위원회의 법률보좌관으로 있으면서 닉슨의 소환장 작성과 발부업 무에 일조하기도 했다.

한편 지난 93년 사망한 곤잘레스를 제외하고 워터게이트 빌딩에 침입했던 비밀행동 대원 4명은 모두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1년정도의 실형을 살았던 이들 5명은 모두 쿠바계로서 최근 『아무런 후회가 없다』고 밝히고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별검사 이야기

글 : 차병직(변호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 워터게이트 사건과 특별검사
1972년, 미국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의 닉슨은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민주당 선거본부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했다. 공화당 측의 소행으로 추정되었다. 이것이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사건이 점점 꼬이기 시작하자 닉슨은 클라이딘스트를 경질하고 리처드슨을 새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리처드슨은 현안인 워터게이트 사건 처리를 위해 하버드 법대 교수로 있던 콕스를 특별검사로 지명했다. 수사에 나선 콕스는 대통령에게 백악관에 보관중인 비밀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콕스가 테이프 입수 시도를 포기하지 않자, 닉슨은 73년 법무장관에게 콕스를 특별검사직에서 해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리처드슨은 콕스를 해임하는 대신 스스로 사임을 하고 말았다. 갑자기 장관이 공석이 되자 뜨거운 감자를 전해 받은 법무차관 러켈샤우스도 이어서 사표를 내버렸다. 결국 그 다음 서열의 보크가 콕스를 해임하고 자보르스키 마저 닉슨의 기대를 저버리고 테이프 제출을 요구했고, 닉슨은 며칠 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국에는 콕스나 자보르스키 이전에도 특별검사 또는 독립검사라고 불리우는 제도가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런데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특별검사가 유명해지고 제도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그리하여 특별검사 임명에 관한 자세한 규정을 78년에야 새로이 두게 되었다.

▶ '정의의 대리인' 검사
검사의 첫번째 임무는 범죄행위에 대한 수사다. 수사는 우리가 범죄행위로 규정하여 법률로 금지해 놓은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을 받는 사람에 대한 확인 작업이다. 검사는 그러한 수사권을 독잠하고 있다. 검사뿐만 아니라 경찰도 수사를 한다. 그러나 검사는 경찰에 대하여 광범위한 지휘감독권과 여러가지 요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찰이 수사를 한 내용도 마지막 결정권은 검사가 행사한다.

수사가 끝나면 결정을 해야 한다. 결정이란 기소와 불기소 중 하나의 선택을 말한다. 범죄혐의가 인정되고 처벌할 필요가 있으면 법원에 기소를 하고, 혐의가 인정되지 않거나 인정되어도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불기소를 한다. 우리 주변에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가 있다 하더라도, 검사가 기소를 하지 않으면 판사는 형벌을 부과하여 처벌할 수 없다.

이렇게 기소할 수 있는 권한도 검사에게만 있는데, 이를 기소독점주의라 한다. 게다가 기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도 검사에게 달려 있어, 흔히 기소편의주의라 부른다. 기소가 된 사건의 재판이 시작되면 검사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반대편에서 유죄를 증명해야 한다. 그 반대편이란 '악인'이 아닌‘정의의 대리인’이란 이름의 자리를 의미한다. 재판의 결과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형벌의 집행도 검사가 담당한다. 벌금을 징수하거나 교도소에 구금하거나 사형 집행까지도.

▶ 정당한 검찰권의 행사
이토록 우리나라 검사의 권한은 막강하다. 수사권을 중심으로 모든 권한이 검사에게 집중되어 있다. 수사와 공소유지와 형벌집행 등 검사의 역할이 범죄를 척결할 뿐만 아니라 장래에 발생할 지도 모르는 범죄를 예방하기도 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 막강한 권한은 민주적인 형평에 맞게 행사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억울한 피해자들이 많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국민들이 검사에게 바라는 것은 정당한 검찰권의 행사다. 국민들 사이의 다툼에 대해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조사를 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정치적인 사건의 경우에는 거짓과 숨김의 의혹이 남겨지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근년의 우리 정치사에서 의혹으로 얼룩져 있는 사건들에는 검찰권 행사의 공정성 논란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검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검찰조직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법률상 독립된 관청이다. 1500명 전후의 검사들은 상명하복의 관계에 놓여 있다. 검사는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음과 동시에, 사건 등 업무처리를 할 때 결재를 받는다. 피라밋과 같은 검찰조직의 정점에는 검찰총장이 있다.

한편 법무장관은 검찰청법에 따라 검찰총장과 검사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법무부장관은 국무위원의 하나로 대통령이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 이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정권을 잡은 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검찰권 행사를 좌우할 수 있게 되고, 그에 흔들리는 검찰은‘정권의 시녀’란 모욕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따라서, 공정한 검찰권의 행사가 의심스러운 사건의 경우에도 수사를 검찰에 맡기는 것은 바람직스럽지가 않다. 말하자면 대통령을 비롯해 검찰권 행사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구체적 사건에 관련되었을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사건도 검사가 수사를 하게되면,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사건을 자기가 처리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 '특별한 사건' 숨김없이 공정하게
최근 우리사회에서 떠들썩했던 두 사건을 예로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고급옷 로비 사건’은 당시 검찰총장이었다가 법무부장관이 된 사람이 가족이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파업유도사건’은 어떠한가. 대검공안부장이나 그 지휘감독자인 검찰총장, 나아가 법무부장관이나 대통령까지 관련됐을 수 있다.

그런‘특별한 사건’들은 누가 맡는 것이 좋을까? 기존 검찰조직의 검사가 해야 할까, 아니면 명먕과 신뢰를 얻고 있는 변호사나 법학교수가 적당할까? 그런데 여기서 누가 더 ‘좋을까’ 라는 것은, ‘누가 더 수사를 잘 할까’라는 것보다는 ‘누가 더 숨김없이 공정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별검사가 임명되더라도, 특별검사가 만능 해결사가 되어 줄 것이라는 지나친 기대는 모처럼 어렵게 도입한 제도를 왜곡시킬 수도 있다.

케네디
" To sin by silence when we should protest makes cowards out of men " <음모설의 진상>

그날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건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존 F. 케네디 美 대통령의 목과 머리를 관통한 것은 우편주문으로 입수한 싸구려 소총에서 날아온 두 발의 총탄.

개막 3년이 채 되지 않은 케네디 시대는 돌연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암살범은 성난 떠돌이 리 하비 오스월드였고, 공범은 없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지금도 그 발표 내용을 믿지 않고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너무 큰 격차가 있어 보인다는 것. 그의 死後(사후) 37년. 케네디의 위상은 신화적인 경지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 암살 사건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美 정부의 신뢰 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 같다. 뒤이어 베트남전이 격화됐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으며 전능한 달러貨(화)가 하락했다. 댈라스의 그날이 없었다면 萬事(만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비극에는 오스월드 보다 더 큰 배후가 있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소련이나 마피아 또는 CIA 같은 ......

그래서 음모설이 무성하다. 황당무계한 상상.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와 진실의 단편들이 뒤 얽혀 만들어낸 것들이다. 지금 와서 보면 공식 수사 결과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오스월드가 단독범이고 국민이 보복을 요구할 만한 음모도 없
다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너무 서둘렀다. 서둔 것은 이해할 만하나 그 때문에 처음부터 수사가 빗나갔다. 또 몇 개 핵심 기관은 난처한 사실은 숨겼고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은 숨기려 허둥대기도 했다.

뉴스위크. 워싱턴 포스트. CBS 등 3개 언론기관은 합동으로 특별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그 동안 은폐됐던 사건의 중요한 내용을 밝혀냈다. 오스월드가 암살범이라는 기본적인 결론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고, 더 폭넓은 음모가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는 암살사건의 허술한 구석과 음산한 추리를 할 구멍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때문에 37년이 지난 지금에도 미국 민은 불안과 불만에 차 있는 것이다.
(NEWSWEEK 1993.12.1)

오스월드
The Mind of the Assassin

암살범 오스월드는 불운한 불평분자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에서 리 하비 오스월드가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하지 않았으며, 미 CIA와 군부가 짜놓은 함정에 빠져 암살범 누명을 쓴 것처럼 묘사돼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오스월드가 암살범이라는 증거가 더 확실해진 것 같다. 제럴드 포스너의 신저 '사건 종결'(Case Closed)에 인용된 탄도 실험 결과와 사건 당시 에이브러햄 자프루더가 찍은 가정용 영화를 재검토해 보면 발사된 총탄은 단지 세 발뿐이며, 모두 사건 현장 부근의 텍사스 교과서 창고에서 발견됐고, 오스월드에겐 세 발을 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는 믿을 만한 논거를 볼 수 있다. 또 오스월드가 24년의 세월을 비참하게 살아 왔다는 점을 볼 때 그에겐 역사적 범죄를 저지를 만한 심리적 동기가 충분했다는 점도 명확한 것 같다.

오스월드는 냉전의 와중에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소련체제에도 환멸을 느끼고 귀국한 고질적인 불평분자였다. 지식인으로 자처했지만 한 직장에 오래 있지를 못했고, 암살 사건 전에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었다. 9세때 이복형제를 식칼로 공격한 적이 있고, 아내를 구타했으며, 우편으로 주문한 소총으로 우익 과격파인 에드윈 워커 소장을 살해하려 했으며, 7개월 뒤 바로 그 소총으로 케네디를 저격했다. 63년 9월엔 장전된 권총을 갖고 맥시코 시티의 소련 대사관을 찾아간 적도 있다고 당시 그와 대화한 적이 있는 KGB 요원 올레크 네치포렌코의 신저 '살인 면허증'(Passport to Assassination)은 밝히고 있다. 오스월드의 소외감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1939년 부친 사망 2개월 후 뉴올리언스에서 출생했다.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그의 모친은 오스월드 및 형제들을 한동안 고아원에 맡긴 적도 있고, 열 살이 될 때까지 그를 데리고 13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13세때 등교를 하지 않은 그를 관찰한 적이 있는 뉴욕의 한 정신과의사는 오스월드가 '폭발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으며, 전능함과 권력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오스월드는 늘 어딘가에 소속되괴 싶어했다. 16세때엔 미국 사회당에 편지를 보낸 그 당시 '청년동맹'가입을 희망했다. 그 몇 주 후엔 해병대에 입대했다. 해병대에선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읽었다. 1등 사수 자격을 얻었지만 일본의 한 공군기지에 근무도중 오발로 자기 자신을 쏜 적도 있다. 59년 11월 그는 모친의 지병 악화를 이유로 조기 제대했다. 그러나 며칠 후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간 다음 모스크바로 떠났다. 소련 관리들은 미 해병대에서 배운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하는 20세의 거만한 오스월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몰랐다(처음엔 그를 미국 첩자로 생각했다). 전직 KGB 간부인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티니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뉴스위크에 이렇게 밝혔다. "당시 그에겐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접선책이 한 명도 없었고, 또 우리가 몰랐던 정보도 없었다"

Oswald's Rifle

소련 당국이 시민권을 주지 않자 오스월드는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기도 했다. 결국 소련 당국이 시민권을 주지 않자 오스월드는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기도 했다. 결국 소련 당국은 그를 민스크의 라디오 공장에 일자리를 말련해 주고 적은 액수의 급여를 현찰로 주었다. 그러나 소련체제가 마르크스주의를 왜곡. 타락시켰다고 본 것이다. 그는 수작 수류탄 두 개를 만들었는데, 소련인들에게 자신의 출국을 허용하도록 협박하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출국 요청을 전해들은 세미차스티니는 "잘됐다. 그를 보내줘라"고 말했다. 한편 오스월드는 한 소련군 대령의 질녀인 마리나 니콜라예브나와 결혼했다. 62년 6월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텍사스에 돌아온 오스월드는 직장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하면서 마리나와 자주 다투곤 했다. 당시 오스월드의 정치적 충성심은 '더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자인 피델 카스트로에게로 쏠렸다. 그는 뉴올리언스로 이사해 '쿠바를 위한 페어 플레이 위원회'(FPCC) 지부를 설치했지만, 지부 요원은 그 혼자뿐이었던 것 같다. 그후 그는 反(반) 카스트로 인사들과 라디오 토론회를 가졌는데, 한 사회자가 그의 소련 망명을 들먹이자 오스월드는 큰 수모를 당했다. 자신이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힌 것을 확인한 오스월드는 어떻게든 미국을 떠나려 했으며 심지어는 비행기를 납치해 쿠바로 가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대신 그는 버스를 타고 멕시코 시티로 갔다. 그러나 그곳 쿠바 대사관 측이 쿠바 입국에는 소련 비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격분했다.

당시 그와 대화를 나눴던 KGB 요원들에 따르면 그는 권총을 꺼내 보이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등 정서불안 증세를 보여 그들은 그를 진정시켜 돌려보냈다고 한다.

63년 10월 댈라스로 돌아온 오스월드는 멕시코에서 만난 관리들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내 마리나는 그후 그가 '카스트로 아저씨'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둘째 아이 출산이 임박하자 오스월드는 다시 직장을 구했다. 그때 얻은 일자리가 바로 그 교과서 창고의 재고 담당직이었다.

Texas school Book Depository

11월 21일 오스월드는 근처 어빙에 있는 마리나를 찾아가 댈라스에 와서 함께 살자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고,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의 저축 총액인 1백70달러와 그의 결혼반지가 옷장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원미상의 30세 가량된 백인 남성, 야윈 몸매에 신장은 1m78cm, 체중은 74kg' 케네디 암살 직후 경찰 라디오로 급 송신된 범인의 인상착의는 J.D. 티피트 순경이 오후 1시 15분에 본 한 남자와 일치했다. 티피트가 오스월드를 정지시키자 오스월드는 그에게 권총을 쏘고는 어는 영화관으로 도망쳤다. 오스월드는 체포됐을 때 그 권총을 지니고 있었다. 후에 경찰은 교과서 창고에 남겨진 소총에서 그의 지문을 발견했다. 그러나 구소 후 오스월드는 티피트순경에게 총을 쏜 것과 대통령을 저견한 것도 부인했다. 또 소총 소지 사실과 멕시코에 다녀온 사실도 부인했다.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을 확신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암살 동기에 대해선 정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케네디 쿠바 정책과는 별도로 케네디를 존경했다고 말한다. 오스월드는 카스트로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괴로웠던 결혼생활 속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프리실과 존슨 맥밀런의 77년도 전신 '마리나와 리'에 따르면 마리나는 침대 위에서도 오스월드를 조롱하며 민스크에 있는 자신의 옛 애인과 닮은 케네디 대통령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곤 했다. 그러나 케네디 암살 음모설 신봉자들은 결코 질투심과 같은 평범한 동기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2주전 전 CIA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1천5백여 쪽의 관련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난 오스월드의 고통받은 심리상태를 고려할 때 아무리 사소한 자극도 그를 격분시켜 살인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오스월드를 쏜 루비 '영웅이 되고 싶었다'

잭 루비는 왜 리 하비 오스월드를 쏘았는가. 댈라스의 스트립쇼 클럽 주인으로 성질이 불같았던 그는 단순한 영웅심리에서 일을 저질렀으리라는 설도 있다. 또는 케네디 암살 음모에 다른 사람들이 연루된 것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갱단이나 CIA, 혹은 다른 암흑가 세력이 루비를 고용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37년이 지난 지금도 케네디 암살 음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정부 수사관들이 루비에 대한 중요한 의문점을 미결상태로 덮어두었기 때문이다. J.에드거 후버 당시 FBI 국장의 고위 보좌관 한 명은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1주일만에 완전히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경고조의 메모를 썼다.

후버는 메모 끝에 '현재 우리는 기본적인 진상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갈겨썼다. 날짜는 63년 11월 26일. 루비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가 케네디의 죽음을 복수하려 했던 불운한 얼간이에 불과했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난폭한 알콜중독자의 아들인 그는 시카고에서 살던 어린 시절 불같은 성미 때문에 '스파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그곳에서 알카포네의 수금 담당 패거리와 어울려 다녔다. 암표를 팔고 경마 정보를 사전에 흘려 돈을 벌었으며 노조를 조직하는 데도 가담했다. 댈라스에서 나이트 클럽을 여럿 소유하고 있을 때도 재봉틀 부품, 관절염 약 등의 부정 물품 취급을 통해 부수입을 올렸다. 그는 수시로 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돈을 내지 않거나 스트립 댄서에게 지분거리는 단골손님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였으며 거물 행사하기를 좋아했다. 댈라스에서 뭔가 시끌시끌한 일이 터지면 잭 루비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루비가 단순한 건달 이상있음을 시사하는 점도 많다. 게다가 그의 배경 조사는 거의 고의적이라 생각될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FBI 요원들은 그의 주변 인물 수백 명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으나 암흑가 친구들과 그의 쿠바 여행에 관한 분명한 단서들은 거의 추적하지 않았다.
워런 위원회에서 루비를 전담했던 레온 휴버트와 버트 그리핀 변호사는 그가 댈라스 갱단과 경찰 사이의 뇌물 중개인이었다는 소문을 파헤쳐보려 했다. 두 변호사는 현금만 취급하는 그의 사업 스타일과 쿠바인들과의 연줄, 그의 성생활도 조사하려 했다. 그들은 CIA에 루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달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CIA는 묵묵부답이었다. 64년 9월 워런 보고서가 발표되기 11일 전에 가서야 '관련 서류를 찾아보았으나 잭 루비나 그의 활동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가장 베일에 싸여 있는 의문의 하나는 59년 루비의 쿠바 방문과 관련된 것이다. 그가 워런 위원회에 쿠바에 단 한번 놀러갔었다고 말한 것은 분명한 위증이었다. 후에 '암살사건에 관한 하원 특위'는 루비가 59년 여름 아바나를 세 번이상 방문했으며 그 사이에 댈라스의 대여금고도 이용했다고 결론지었다. 같은 해 오스월드가 소련으로 망명했을 때 FBI는 루비를 제보자로 삼기 위해 그와 아홉 번이나 접촉했다. 그러나 후버는 그 정보를 워런 위원회에 넘겨주지 않았다. CIA는 루비가 쿠바에서 그곳에 수감돼 있던 산토스 트라피칸테(후에 플로리다의 갱단 두목이 됐다)를 면회했을지 모른다는 보고도 공개하지 않았다. 루비가 총기류나 지프를 쿠바에 판매하고, 대신 죄수나 자금(도박을 통해)을 빼돌리고 있다는 미확인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루비가 무모하게 돈벌이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루비는 케네디 암살 이전의 몇 달 간 암흑가의 친구들에게 수없이 전화를 했다. 그러난 전화통화 목적은 그가 말한 그대로였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나이트클럽에 출연하는 스트립 걸을 대표하는 노조로 하여금 아마추어 댄서를 고용하는 경쟁 클럽들을 단속하도록 하는데 갱단 친구의 도움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루비는 사건이 발생한 주말에 이곳 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사악한 음모에 가담한 청부 살인자로 보기는 힘든 행동이다. 심지어 사건당일 밤 오스월드가 짤막한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헨리 웨이드 댈라스 지방 검사가 오스월드는'자유 쿠바 위원회'소속이라고 말하자 탁자 위에 올라서 '그게 아냐'라고 외치기도 했다. 나중에 그는 그것을 라디오에서 들었다고 설명했다. 루비는 그날 밤 건물 복도에서 불과 1m도 안되는 거리에서 오스월드와 마주쳤다. 그가 오스월드를 제거하기 위해 고용됐다면 왜 그때 쏘지 않고 오스월드가 입을 놀리도록 이틀이나 시간을 주었는가.

그날 밤 늦게 루비는 샌드위치를 싸들고 철야 라디오 방송국을 찾아가 오스월드를 지척에서 봤다고 자랑했다. 댈라스 타임스 헤럴드지 윤전부의 야간 근무자들에게도 그 사실을 떠벌렸다. 그날 댈라스 모닝 뉴스紙(지)에 게제된 유대인의 서명이 실린 케네디 반대 광고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기도 했다.케네디 암살사건이 자기 같은 유대인의 소행으로 둘려질까 우려해서였다. 사건 이틀 후인 일요일 아침 루비는 애견 셰바를 차에 놔둔 채 댈라스 경찰서로 태연히 걸어들어가 오스월드의 복부를 쐈다. 사전에 그일을 계획하고 잡혀 들어갈 것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의 친구의 말)

사건 다음날 루비는 댈라스 카운티 교도소로 이송한 강력계의 제임스 리빌 형사가 최근 뉴스위크에 밝힌 바에 따르면 왜 그런짓을 저질렀느냐는 리빌의 질문에 루비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내가 일을 그르친 것 같다』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가장 솔직한 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재판을 받고 신경쇠약에 걸리는 통에 그의 정확한 동기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변호사 멜빌 벨리는 루비가 신경성 간질병을 앓고 있으며 잠깐 의식을 상실한 동안 오스왈드를 쏜 것이라는 기괴한 변론을 폈다.『 오스왈드는 댈러스 카운티 교도소로 이송되기 위해 댈라스 경찰서를 나오다가 잭 루비가 쏜 총알에 복부를 맞았다. 이 장면은 전국 TV에 생중계됐다.』

배심원단은 세시간도 채 못 돼 그에게 계획적 살인죄로 전기의자 형을 평결했다. 그 평결은 후에 기각되고 새로운 재판 일정이 잡혔다. 그러나 그때 루비는 과대망상 증세를 나타냈다. 64년 워런 위원회의 조사를 받던 그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도록 워싱턴에 데려가 달라고 애걸했다. 미국의 극우 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가 자기를 암살하려 한다는 공포에 떨기도 했다. 나중에는 미국 전역의 유대인들이 자기가 한 짓 때문에 학살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댈라스 카운티 지하 감방으로부터 그들의 비명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한 정신과 의사는 그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 병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을 것이다. 루비는 67년 1월 감방에 서 癌으로 숨을 거두었다. 많은 「악령」에 시달리면서. MELINDA BECK AND ANNE UNDERWOOD ( News week 기자)-1993/12/1


'음모'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정부 공식 발표 안 믿어, 마피아-쿠바 주모 등 각종 설은 논리에 결함

①「비밀공작」설

내용
CIA(또는 일부 과격한 요원?)는 케네디가 「빨갱이」에 굴복해 CIA를 해체하려 한다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CIA는 바로 암살 전문가들. 그래서 소련에 망명한 적이 있는 오스월드를 고용해 범행을 맡긴 것이라는 설. 오스월드는「위장」에 사용됐을 뿐 실제로는 다른 장소에 배치된 저격의 명수에게 케네디를 저격하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결함
오스월드는 전문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며「위장용」으로 이용한다 해도 조금도 빈틈없이 준비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게다가 진범의 입은 옷은 어떻게 틀어막았을까? 역시 제거했을까?

②마피아 주모설

내용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 카스트로 암살계획, 마릴린 먼로와의 정사 스캔들 무마 등에 범죄조직의 힘을 빌렸으면서도 오히려 조직범죄 단속을 강화하자 마피아가 그를 배반자로 간주했다는 설. 오스월드에겐 마피아에 숙부가 있었고 루비에게도 마피아에 친구가 많았다. 이들과 같은「조무래개」를 이용하는 편이 조직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아 유리하다고 생각한 마피아 우두머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함
대통령 암살이라는 위험한 일을 과연 '조무래기'가 맡으려 했을까. 어떤 방법으로 루비에게 오스월드를 살해하도록 설득했는지도 불분명. 루비가 입을 열어 꼬리가 잡힐 위험도 있었을 것이다

③ 쿠바 음모설 I

내용
CIA가 후원한 61년 4월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로 케네디에게 배반당했다고 느낀 反(반)카스트로派(파) 망명 쿠바인의 계획으로 보는 설. 오스월드는 親(친)카스트로派(파)인 셈인데 웬일인지 反카스트로派가 된 갱 친구를 만나러 쿠바에 간 적이 있다.

결함
망명 쿠바인들이 공산주의에 물든 백인 오스월드를 신용했을까. 오스월드를 이용하는 복잡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미는 것이 그들만으로 가능했는지도 의문.

④쿠바 음모설 Ⅱ

내용
카스트로는 미국이 자신의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복을 위해 케네디 암살을 지령했다는 說(설). 암살은 음모였다고 믿은 존슨 前 대통령이 열심히 지지한 說이다. 오스월드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 親카스트로派였으며 암살 2개월 전에 맥시코 시티의 쿠바 대사관을 방문했다.

결함
암살지령을 내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고 카스트로 본인이 말한 적이 있다. 설령 상대가 신원이 탄로나기 쉬운 오스월드가 아니라 해도 암살지령을 내리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⑤ 소련 음모설

내용
오스월드는 멕시코 시티에서 소련 대사관을 방문, 암살. 파괴 활동 요원으로 보이는 KGB 에이전트와 접촉했다. 59년에 소련으로 망명한 오스월드는 그후 암살공작원이 되어 미국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귀국한 것은 오스월드로 위장한 다른 암살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결함
암살공작원과 대사관에서 접촉하는 것은 KGB의 수법에 배치된다. 게다가 對(대) 蘇(소)강경파인 젊은 대통령을 별로 이로울게 없는 늙은이로 교체하기 위해 핵전쟁 위험까지 무릅쓰려 했을까

⑥ 쿠데타설

내용
올리버 스톤 감독이 영화 'JFK'에서 제시한 이론(그보다는 픽션). 미국 기성체제의 악한들 (베트남 철수를 저지하려 한 군부나 무기상들)이 손을 잡고 케네디 암살을 기도했다는 것. 확실히 역사는 그들의 소망대로 진행된 듯하지만....

결함
암살집행부대, 檢視(검시)팀, 워런 위원회...
진상 은폐 협력자들이 이 정도 많았다면 왜 일부러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퍼레이드에서 암살할 필요가 있었을까.

⑦ 실수설 Ⅰ

내용
매릴랜드에 거주하는 彈道學(탄도학)전문가 하워드 도나휴의 說.
후속 차에 타고 있던 경호원이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 그 총알이 대통령에게 명중했다는 것. 오스월드의 발포음을 듣고 경호원이 총을 꺼내들었을 때 오발했다고 보고 있다. 현장은 발사음이 뒤섞이기 쉽기 때문에 총을 쏜 당사자도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결함
문제의 차에 타고 있던 당사자 이외의 9명 중 발사음을 들었다고 증언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발했다고 간주되는 당사자는 당연히 도나휴의 질문에 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⑧ 실수설 Ⅱ

내용

오스월드의 처 마리나는 남편이 사실은 동승한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를 저격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증언. 해병대에서 불명예 제대 처분당한 오스월드는 無事故(무사고). 만기 제대자에 수여되는 명예제대증을 신청했다가 기각되어 당시 해군장군이었던 코널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가 루비와 함께 코널리 암살을 모의하는 것을 엿들었다는 댈라스의 변호사도 있다.

결함
표적을 벗어난 것치고는 오스월드(또는 다른 누군가)의 총탄은 너무나 정확히 케네디에게 명중했다. 사격이 서툴렀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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