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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자리잡은 잊혀진 국가 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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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2,982회 작성일 04-10-0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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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 우리는 으레 고조선에서 시작한다. '고조선정통론(古朝鮮正統論)'에 서는 것이다. 고래(古來)로 전통적인 인식이 그러하고 또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서도 타당하고 정당하다. 1976년에 시라무렌하(西刺木倫河) 유역인 임서현 대정촌(林西縣大井村)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고대 동광은, 방사선탄소연대측정에 의해 2700년 내지 2900년 전의 유적으로서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특징인 요서·요동 지방의 청동기 문화의 기반이다. 하가점상층문화에서는 북방이나 중국의 청동기문화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비파형청동검(琵琶形靑銅劍)과 다뉴식조문동경(多紐式粗文銅鏡)이 출토된다. 문화의 개성을 표시하는 이러한 양식은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이나 다뉴식세문경(多紐式細文鏡)으로 발전하여 완성을 보게 되는데, 이 점에서 하가점상층문화는 우리 문화의 조형(祖形)으로 여기며 그 자체가 곧 고조선 초기청동기문화로 생각한다. 고고의 유물면에서도 우리 문화의 시원(始原)이 고조선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한반도가 전성기 고조선의 중심 영역에선 벗어나 있어, 관심을 고조선의 판도(版圖)와 그 중심 세력의 이동에 두면 그 당시 한반도의 사정을 소홀히 취급할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커진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 '조선전'에 의하면 위만조선이 있었던 때에 한반도에는 진국(辰國)이 존재하여 한(漢)과 서로 소통하려 하였다고 한다 (자료3). 고조선의 중심인 난하·대릉하 유역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한반도로 동진(東進)·남하한 세력이 우리 역사 전개의 주축을 이룬다면 한반도에서 일찍부터 진국을 건설하여 발전한 세력은 저절로 부수적·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거니와, 우리 나라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이는 분명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조선과 진국을 좀더 등위(等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발전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부 반론도 없지 않았지만 이러한 인식의 연원이 매우 깊어 대개의 경우 고조선이라 할 때는 위의 세 조선을 일컬으며, 이들은 계기적으로 성립·발전하였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지니 단군이 왕위를 물려주고 장당경(藏唐京)으로 옮아갔다거나 '국가의 출현과 단군신화'의 (자료1), 기자가 와서 조선 백성을 교화하였다는 (자료1) 이야기가 성립하게 된 것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뒤를 이었다는 데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다. 대릉하 유역인 요녕성 객좌현 북동(遼寧省喀左縣北洞)의 한 고분에서 '기(箕)' 자가 새겨진 기후방정(箕侯方鼎)을 비롯한 은말주초(殷末周初) 양식의 청동예기(靑銅禮器)가 발견되었는데 이와 비슷한 양식의 청동기가 나오는 고분 서너기가 서로 10Km의 거리 내에 함께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바로 기씨족이 세운 기자조선의 중심지가 아니었나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를 증거로 하여, 이른바 기자조선은 요하(遼河) 서쪽의 대릉하 유역에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성립한 위만조선도 이곳을 주무대(主舞臺)로 발전하였으므로 본래의 단군조선과는 별개로 파악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세 조선이 계기적(繼起的)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 전통사회의 법을 중국 은(殷) 나라의 기자와 결부시킨 것은 단지 관념의 산물일 수도 있다.

고조선의 영토는 대략 중국 북동부의 난하 유역이었다가 요하 서쪽의 대릉하 유역, 요동, 한반도로 점차 이동하였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이 중 한 부분만을 고조선의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이 모든 지역이 늘 고조선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고조선의 영역과 관련하여, 그 중심지를 한반도로부터 멀리 보면 볼수록 민족적인 긍지를 더 고양할 수 있게 되는 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고조선의 문화와 그 번영에 자긍심을 갖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가설(假說)은 구분되어야 하며, 추론된 정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여기서는, 고조선의 영토에 관한 인식이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해 왔으며, 고조선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민족적 시각이던 때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는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보았으나, 정도전(鄭道傳) 등 조선을 개국한 주축 세력은 새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 정한 후 옛 조선의 영토 회복을 명분으로 요동정벌을 계획했으며, 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 대부분은 다시 평양중심설을 주장하였고, 일제강점기의 민족사학자들은 고조선이 요동 지역을 무대로 발전하였다고 믿었다. 이 가운데 평양설을 주장한 때를 보면, 대개 중국 쪽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문화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후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실학자들이 평양중심설을 주장한 것은, 만주족이 세운 청(淸)이 우리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짓밟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같은 책을 펴내 그들과 우리가 본디 같은 문화적 뿌리에서 기원했음을 주장하자, 이에 대응하여 저들과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기 발전해 온 별개의 민족임을 부각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려 한 의도도 있는 것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해명하기 위한 노력은 뒷전에 미루어 두고서 어떤 특정한 견해를 민족적 처지와 결부시켜 파악하고 그것만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앞절에서 단군신화에 반영된 시대상을 청동기∼초기 철기 단계의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단계는 무적(武的) 능력이 탁월한 영웅 군장(君長)이 등장하여 친족공동체에서 부가장적 족장권을 성립시키고 이들이 형제적 질서 속에서 서열을 이루면서 통합되어 정치세력화함으로써 왕을 정점으로 한 초기 국가 형태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철기문화 단계로 접어들면서 이들 친족공동체의 족장 세력은 읍락을 거점으로 하는 수장(首長) 세력으로 그 성격의 변화를 보게 되었다. 친족공동체의 혈연성(血緣性)보다는 지역적인 정치권의 통치력을 더 중시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통치력을 편제하는 측면에서 왕권(王權)도 강화되어 나아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 말엽에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燕)과 정치적 행태를 같이 할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준왕(準王) 대에는 망명한 위만을 박사로 삼고 홀을 주며 100리의 땅을 봉하여 번병(藩屛)으로 삼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독자적으로 중국적 봉건 질서의 구현까지 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료2). 족장층의 성격 변화는, 그들이 국왕 권력 밑에서 지역 명칭을 가진 상(相)이라든가 장군(將軍)과 같은 명호를 지니고 국가 관직체제 속에 편입되기에 이르러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자료4).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은 왕족(王族)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의 재편성 및 그 확립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를테면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집권한다거나 조선상 역계경(朝鮮相 歷谿卿)이 2천여 호를 이끌고 진국(辰國)으로 옮겨가는 일도 가능하였다 (자료6). 한제국(漢帝國)과의 전투를 1년 동안 이끌 수 있었던 위만 조선의 국력은 저같이 정비된 국가 권력 체계에서 나온 것이었고, 결국 내부의 분열로 멸망하게 된 것은 이같은 지배체제 확립의 한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료4).

위만조선은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하여 동북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고 한(漢) 세력에 대항하였다. 진국·진번·임둔 등 고조선의 주변에 있던 정치 세력들이 한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아 그 성장을 견제하는 한편 한의 경제적·정치적 동방 진출을 저지하였다. 이는 한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압력이었다. 더구나 위만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고 한에서 빠져 나가는 유망민을 적극 유치하며, 중계 무역을 통한 부(富)의 축적을 기반으로 군사력을 증강하여 주변의 진번·임둔까지 복속시키고 직접 지배하기에 이르자 한은 내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조선과 패권을 다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자료3). 훗날 수(隋)·당(唐)과 같은 중국의 통일왕조가 북방 새외민족(塞外民族)과 연결된 고구려와 그 존망을 걸고 승부를 겨룰 수밖에 없었던 한중관계(韓中關係)는 이미 조선과 한과의 관계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진국(辰國)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존재가 부정되거나 잊혀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진국의 존재를 맨 처음으로 기록한 {사기} 자체가 혼선을 일으킨 데에 있다 (자료3). 백납본(百衲本)의 '진국(辰國)'이 교감본(校勘本)에는 '중국(衆國)'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국의 존재에 의문이 일고, 그 시기에 한반도 전체를 통할하는 나라가 있을 것인가 반문되었으며, {삼국지} '동이전'이 전하는 3세기의 한반도 상황이 70여 국의 분립상이라는 점은 '辰國' 보다는 '衆國'이 사실에 부합함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진국은 오기(誤記)로 말미암아 성립한 관념에 의해 조작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기(漢紀)'에는 '辰國'이라고만 써서 오히려 '衆國'을 오기로 보았고, {삼국지}와 {후한서}를 비롯한 {사기} 이후의 사서들이 한결같이 진국을 진한(辰韓) 혹은 삼한(三韓)의 전신(前身)으로 파악하는 등 한반도의 정세·역사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진국을 기억한 사실로 볼 때 (자료7) (자료8), 단지 관념에 의한 허구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3세기의 남한 지역에 70여 국이 분립해 있었어도 마한·진한·변한으로 대별(大別)된 사실에서 그러한 소국의 차원을 넘는 정치적 유대와 결집, 또 이에 토대를 두고 성립한 정치권력의 정립(鼎立)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2세기 말부터 삼국이 정립하는 시기까지는 대개 원시공동체의 해체기 혹은 국가형성기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한제국(漢帝國)과 겨뤘던 고조선의 당당한 역사를 무(無)로 돌린 채 우리의 고대사를 원시시대(原始時代)부터 다시 쓰고 있는 셈이다. 이는 우리가 고조선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갖지 못한 데다가 진국과 삼한을 부인하거나 외면한 데서 초래된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고조선정통론에 서서 고조선 유민의 한반도 유입을 중시한다면 그들의 역사 경험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고조선이 중국의 한족(漢族)과 패권을 다툴 때에 한반도 남부 지역이 세계 정세와 그렇게 무관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 상정(想定)이다. 이러한 평범한 생각에서 출발한, 좀 더 상식 위에 선, 새로운 시각에서의 문제 제기와 연구가 절실하다.

자료1)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퇴하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낙랑(樂浪)·조선 백성의 범금(犯禁=法) 8조를 만들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시키며, 도둑질을 한 자는 남자일 경우에는 몰입(沒入)하여 그 집 남자종(奴)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여자종(婢)을 만든다. 스스로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50만을 내게 한다. 그러나 비록 (노비를) 면하여 평민(平民)이 되더라도 사람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여자는 배필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였다.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문단속을 하지 않으며 부인들은 정숙하고 음란하지 않았다.
({漢書}, 地理志 第8下2)

자료2)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 나라가 쇠퇴하자 연(燕)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려 함을 보고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나라의 왕실을 받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그 대부(大夫)인 예(禮)가 간하여 중지되었다. 이에 예를 사신으로 보내어 연을 설득하니 연이 계획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 뒤 자손들이 교만하고 사나와졌으므로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방(西方)을 공격하여 2천 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반한(滿潘汗)주5)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약해지고 말았다. 진(秦)이 천하를 아우름에 미쳐서는 몽염(蒙恬)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 때 조선왕 비(否)가 섰는데 진이 자기 나라를 습격할까 두려워 하여 책략으로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비가 돌아가고 그의 아들 준(準)이 왕이 된 지 20여 년에 진항(陳項)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제(齊)·조(趙)의 백성들이 고통을 괴로워 하다가 차츰 도망하여 준에게로 갔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와서 살게 했다. 한(漢)이 노관(盧)으로 연왕(燕王)을 삼게 되자 조선과 연은 추수(水)로 경계를 이루었다. 관()이 반란을 일으키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인 위만(衛滿)도 망명하여 호복(胡服) 차림으로 동쪽으로 추수를 건너 준왕에게 가서 항복하고 서쪽 국경 지방에서 살게 해 줄 것을 청하면서 중국에서 망명하는 사람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藩屛)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홀(圭)을 주며 100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위만은 거짓을 꾸며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나라 병사가 열 길로 쳐들어 오고 있으니 들어가 숙위(宿衛)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좌우의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魏略};{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 所引)

자료3)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을) 때는 마침 효혜(孝惠)·고후(高后)주10)의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었을 무렵이었다.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위만으로 외신(外臣)을 삼아 요새 밖의 만이(蠻夷)를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君長)들 가운데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막지 말도록 하자고 아뢰니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게 되자 그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땅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右渠)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유인한 것이 자못 많았다. 또 일찍이 들어와 천자를 뵙지도 않으면서 진번 곁의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했다.

원봉(元封) 2년에 한(漢)에서는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보내어 달래고 타일렀으나 우거는 끝내 조서(詔書)를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가다가 국경 위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도착하자 부하를 시켜 자기를 배웅나온 조선비왕(朝鮮裨王) 장(長)을 죽인 다음 재빨리 강을 건너 요새로 달아났다.

돌아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여 자기가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하자 천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더 캐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수로 여겨 군사를 내어 습격하여 죽였다. (이에) 천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공격하였다.

({史記} 115, 朝鮮列傳)

자료4)

좌장군(左將軍)이 양군(兩軍)을 합하고는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참(參), 장군 왕겹(王) 등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는 누선(樓船)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지금은 누선이 체포되고 좌장군 혼자 장수들을 합쳐 전투가 더욱 급하니 더불어 싸울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왕은 항복하려 들지 않고 있다." 하고는 음, 겹, 노인 모두 도망하여 한(漢)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 이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右渠)를 죽이고 항복해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이(成已)가 거듭 항전해 왔다. 좌장군(左將軍)은 우거의 아들 장강(長降)과 상(相) 노인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달래어 성이를 죽이게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삼았다.

({史記} 115, 朝鮮列傳)

자료5)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 왔는데 이 관리가 (조선의) 백성들이 문단속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게 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 졌다. 지금은 범금(犯禁)도 많아져서 60여 조목이나 된다.주25)
({漢書}, 地理志 第八下二)

자료6)

처음에 우거가 아직 항복하지 아니 하였을 때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諫)하였으나 쓰여지지 않자 동쪽 진국(辰國)으로 갔는데 이때 따라 나가 산 자가 2천여 호였으며 (이들은) 조선(朝鮮) 공번(貢蕃)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魏略} ; {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 所引)

자료7)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하니, 사방 한 변이 가히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 진왕(辰王)이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 신지(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안사축지분(臣雲遣支報安邪支), 신이아불예구사진지렴(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

자료8)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 (삼한의) 땅을 합하면 사방 한 변이 4천여리로,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으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함께 그 종족을 추대하여 진왕(辰王)으로 삼는데,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 (삼한) 여러 나라 왕의 선조는 모두 이 마한 사람이다.
({後漢書}, 東夷列傳, 韓)



결국 요약하지면 고조선에게 가려져서 진국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진국에 대한기록이 있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국이 중국으로 나와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한기(漢紀)'에는 '辰國'이라고만 써서 오히려 '衆國'을 오기로 보았고, {삼국지}와 {후한서}를 비롯한 {사기} 이후의 사서들이 한결같이 진국을 진한(辰韓) 혹은 삼한(三韓)의 전신(前身)으로 파악헤서 자료마다 내용이 다르다는것이죠..
그리고 진국은 고조선의 준왕이 세웠다는 설과 그 이전에 있었다는 설로 나누어지고 유물같은 것이 발견되지 못해서 잊혀지게 된것이죠... 고조선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고... 진국 역시 한반도에 있던 고대국가인 만큼 중요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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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출처 대만싸이트인데 사마천의 사기등을 올려놓은 싸이트입니다
대만의 故宮【寒泉】古典文獻全文檢索資料庫
이곳에 가면 환국 ,쥬신(배달국)에 관한 내용 고조선에 관한 내용 등 우리나라 관련자료 많아요..
중국사기에서 조차 이렇게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자료들이 많은데 우리나라는 왜이리 부족한지..

 http://uniweb.unitel.co.kr:8083/class/history/lesson/2/2-03-1.html  이곳에서도 참조햇습니다.

이광형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여기 가입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우리민족의 뿌리에 대해 좀더 연구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드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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