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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의 서 제2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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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냥보는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0건 조회 903회 작성일 04-08-2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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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장 □

죽음에 대한 티벳의 과학적인 견해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과학 차원에 속한 질문이다. 서구 과

학은 심장의 박동이 멎고 뇌파 측정기의 그래프가 직선으로 나타나

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유물론자들은 뇌가 활동하고 있는

동안 '나'라고 하는 개체적인 의식이 존재하며, 뇌의 활동이 멈추면

의식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으면 의식이 소멸된다는 견해

는 과학적인 탐구의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는 가정일

뿐이다. 실제로는 한동안 뇌파가 정지된 상태로 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뇌파가 정지된 상태로 있는 동안

에도 이런저런 체험을 했노라고 증언한다.

현대적인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죽음을 생명의 활동이 완전

히 소멸된 영원한 무와 망각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죽음

을 잠, 어둠, 무의식 등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행복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앞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괴로움에 지친 사람은 고통을 의식하지 못하는

영원한 마취 상태로서의 죽음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이 확실

히 그러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탐구해 보아야 한다. 사실 내면[마음]

의 과학은 무에 대한 분석에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무는 말 그대로

무일 뿐이다. '무'라는 관념은 무가 아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

도 아닌 것이 무인데, 관념은 나름대로 의미의 범위를 갖고 있기 때

문이다. 무는 범위가 없다. 또한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따라서 무 속

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 안에 무엇을 넣을 수도 없다. 무는 무이기

때문에 없애 버릴 수 없으며, 어떤 힘이나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

다. 무는 그 무엇도 아니며, 어떤 상태나 영역도 아니다. 무는 두려워

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절대적인 무일 뿐이다.

무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반대편에 있는, 만물의 궁

극적인 종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를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관

념을 갖고 있다. 무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인간

의 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깊게 환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

를 명백히 보여 준다. 무가 '있다[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이것', '저것', '그것' 또는 '이러한 상

태', '저러한 상태', '그러한 상태'라고 대명사를 써서 지칭하는 것도

잘못이다. 무는 무이기 때문에 상상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를 일종

의 종착역 즉 인생이 도달하는 마지막 상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뇌파 그래프가 직선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무라고 상상

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모든 감각 활동이 정지한 일종의 마비 상태

를 무라고 보는 것이나, 의식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영역으로 보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앞 뒤가 안 맞는다. 무는 겉도 없고 속도 없기 때문

에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과 같은 어떤 상태를 무라고 상상하는 것은 스스로 위

안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의 상태가 깊은 잠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깊이 잠들면 감각, 생각, 걱정, 그리고 의식

마져 사라진다. 우리는 어떤 근원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듯한 편안함

을 느끼며 잠에 '빠진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까지는 의식이 있지만,

다시 꿈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가지고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의

식이 없다. 꿈은 기억할 수도 있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의식은 말 그대로 '무'의식이기 때문에 체험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의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는 동안

의식이 없는[무의식] 상태에서 편히 쉬었다는 느낌은 무의식의 체험

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잠들기 직전과 깨어나는 순간의 느낌에서 오

는 것이다.

잠은 휴식, 평화, 고요, 원기 회복 등과 관련되어 있다. 정신적 혹

은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지속적으로 잠이 부족하면 육체의 건강을 잃는다. 잠을 자는

것과 뇌파가 뛰지 않는 것은 비슷한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에도

두뇌의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깨어 있을 때보다 꿈을 꿀 때 오히려

두뇌가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육체적.물질적

관점에서 보면 잠과 죽음은 완전히 다르다. 죽음을 무의 세계로 들어

가는 入場으로 여기는 것은 죽음의 실상에서 눈을 돌리고자 하는 자

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잠과 비슷한 그 어떤 상태로 여기는 것은 물질적인 관점에

서 비롯된 추측에 불과하다. 이런 견해는 마치 세상과 결별해야만 자

유가 있다고 보고 그런 상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소승 불교, 힌

두교 신비주의, 도교, 그리고 서구 唯一神敎의 이원론적인 해탈관 내

지는 구원론과 흡사하다. 그들은 걱정과 괴로움과 문제 투성이로 뒤

얽힌 세상을 떠나, 평화와 안식으로 충만한 잠과 비슷한 축복의 상태

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인 이상인 니르바나는

고통과 슬픔의 세계와 완전히 결별한 영원한 축복의 상태, 즉 무의식

적인 잠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유물론자들이 영적인 구원이나 종교적인 해탈을 비웃

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들은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지 않고도, 배우

거나 수행하지 않아도, 또 깨달음이 없어도 매일 밤 저절로 그런 상

태에 들어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고생을 하느냐고 조롱

한다. 세상 걱정을 모두 여읜 깊은 잠과 같은 상태가 해탈이라면, 유

물론자들은 수많은 밤을 지나면서 이미 해탈하는 방법에 숙달되어

있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는 잠과 같은 무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그들의 견해는

사실에 부합되는 것인가? 그렇게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가? 무의 세

계를 경험한 다음 그 세계는 이렇더라고 보고한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 세계를 본 사람이 없고, 그 세계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자신이

죽은 사람의 주관적인 의식을 가지고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도

없다. 육체적으로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 그 상태를 탐색하거나 규명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근

거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티끌 하나라도 무로 돌아가는 것을 관찰한

바가 없다. 그들은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고 형태만 바뀐다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들먹인다. 그렇다면 의식도 에너지일진대 어째서 의식

에너지만이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된다는 말인가? 유물론자들이 일종

의 에너지 연속체인 의식이 무로 돌아간다고 그렇게도 강력하게 믿

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입증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막

연한 소원을 등에 없고, 머리로 짜낸 허황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는 그들의 견해는,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털

끝만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되뇌이는 과정을 거치면

서 강화된 공허한 교리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만물의 실상을 알고 싶어하는 종교적인 충동이 있다.

그래서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고 하면 당연히 무는 어떤 상태일까 하

는 의심이 생긴다. 유물론자들은 인간 본연의 이런 종교적 충동을 만

족시키기 위해 증거도 없고 경험도 해 보지 못한 것을 아는 체한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무가 예상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으나, 쓴 약을 꿀꺽 삼키듯이 이것 저것 따지기 전에 그냥 받

아들여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라고 주장하는 무모한 사람들이다.

유물론적 과학자들이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증

거들을 교리적으로 거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죽음 이

후에도 의식이 활동한다는 것이 자기들의 믿음에 의문을 불러일으키

기 때문에 그런 증거들에서 눈을 돌린다. 어떠한 의문도 허용하지 않

는 종교적인 교조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증거도 없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빈약한 논리의 믿음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한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존재하며, 의식과 감각이 살아 있는 삶이 계

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증거는 많다. 첫째, 만물은 변화를 통

해 형태는 바뀌지만 그 존재의 지속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죽

음 이후에도 의식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이어질 것

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둘째, 죽었다 살아 난 사

람들이 전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가 많다.

의학적으로 분명히 죽었다 살아 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어린 아이가 전생에 있었던 일과 자기가 처해 있던 환경을

기억하는 것처럼, 죽음의 세계에서 경험한 일을 기억한다. 신뢰할 만

한 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비교해 본 결과 믿을 만하

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죽음 이후의 체험에 대한 다양한 증언을 수집

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한 사람도 있고, 문화적인 성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형태에 대한 안내서를 펴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중요한 사실은, 문명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일지

라도 죽음 이후에 직면하게 될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관

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아

니다. 단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깨어 있는 상태의 혼란과 고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안한 상태일 수는 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

통이다. 사실 고통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할 그 무엇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죽음이 무이기 때문에 죽

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시체로 변하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아

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람들

은 앞으로 닥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앞으로 닥

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궁

리한다. 오늘 밤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해서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

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 낮 동안에 최선을 다해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한다. 준비를 잘하면 잘하면 잘한 만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잠에 빠진다고 해도, 자고 나면 저

절로 내일이 오는 것처럼 의식의 다음 상황이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동안 그 새로운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준비를 잘하면 잘한 만큼 죽음 이후의 상태가 편안해지리라.

아무리 극단적인 유물론자일지라도 다음과 같은 파스칼의 유명한

'도박의 원리'에는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

아간다면, 살면서 준비하고 쌓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도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악한 행

위만 일삼으며 준비를 게을리 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오래도록 후회

하게 될 것이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

은, 그의 믿음대로 죽음 이후에 무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새로운 상황

이 전개되든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존

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철저히 준비한 사람은,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전개되면 준비한 만큼 큰 행복을 누릴 것이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멸되어 버린다면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존재조차도 없을 터이

니 말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어

떻게 될까? 그렇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준비를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둘 것이고, 영원성을 부정하고 세상 일과 감각적

인 즐거움을 추구한 사람은 생명을 낭비한 것을 깊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생이라는 판돈을 어느 쪽에 거는 것이 현명

한 일일까?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대적인 삶의 상황을 대하는 태

도가 신중하든지 아니면 모험적이든지,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삶

을 꾸려 나갈 수 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상호 연관성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나쁜 쪽이거나 좋은 쪽이거나 발전할 가능성 역시 무한

하다. 자신이 무한한 상대적인 연속성에 얽혀 있는 존재임을 이해하

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른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대적인 상호 연관의 세계에 살고 있음

을 확실히 이해하는 사람은 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

어진 선택권을 자신을 포함한 주변 상황을 개선하는 데 쓰고자 할

것이다.

합리적인 증거도 없고, 그럴듯한 추론에 불과한 종교적인 성격의

믿음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

한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왜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가? 죽은 다음에 평안한 마비 상태가 올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죽음

을 모든 상황과 체험에서 단절된 영원한 고립이라고 보는가? 상대적

인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모든 상대성을 초월한 그런 절대적인

소멸 상태를 상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전능한 존재가 있어서 어떤 행동을 한 사람이든지 모두 구원해 준다

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러면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준비한 사람이라

고 해도 괜히 쓸데없는 고생을 했다고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무슨 불평이나 후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는 그런 전능한 존재는 없고, 우리가 준비한 만큼

우리를 도와주는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

지 않은 사람은 오래도록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건전한 믿음이라고 해서 비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올바른 신앙은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맹목적이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신앙은

과학적인 탐구의 뒷받침을 받아 그 힘이 강화되어야 하고, 문자의 얽

매임에서 풀려나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건전하고 유용한

신앙이라면 죽음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서

는 안된다. 과학적인 탐구자들은 자기 보다 앞선 선배들이 시도한 행

위와 그들이 남긴 방대한 문헌에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죽

음에 관한 한 아마 인도-티벳의 전통 속에 남겨진 문헌이 가장 방대

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상호 연관 속에서 무한한

우주 속에 퍼져 있다. 유물론적 진화론은 이런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목적 없이 일어나는 자연 도태설과 돌연변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냈

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진화가 시작되는 어떤 한정된 출발점과 상

황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출발점과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한 언급

이 없다. 그들은 물질 세계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전개되며,

때에 따라서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견해라

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

의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때에 따라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지 않

겠는가?

'까르마[業]의 법칙'으로 알려진 불교의 정신.생물학적인 진화론은

다윈주의자들의 견해와 상당히 비슷하다. 까르마 이론은 모든 존재가

그물에 꿴 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의 형태를 계속 바꾸

어 나간다고 말한다. 까르마 이론은 인간은 과거에 원숭이였으며, 모

든 동물을 단세포 생물이었다는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

는다. 까르마 이론이 다윈주의자들의 견해와 다른 점은, 까르마 이론

은 모든 존재는 윤회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삶을 취하는

돌연변이를 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

윤회 과정에서는 미묘한 차원의 의식이 생명의 다음 형태를 결정

하는 역할을 한다. 정신 수준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같은 種 안에서

발전하거나 돌연변이 할 수도 있고, 다른 種으로 뛰어 넘을 수도 있

다. 까르마적인 진화 과정에서는 지금 보다 고등한 생명체로 태어날

수도 있고 열등한 생명체로 태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일정한

법칙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 따라 진화가

계속된다는 것을 일단 의식한 존재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의 선택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의 물줄기를 돌려놓을 수 있다. 물론 까르

마 이론과 진화론적 설명 사이에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까르마 이론이 어떤 존재가 어떻게 그런 형태의 존재가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진화론적 설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까

르마'를 '진화' 또는 '진화적 행위'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까르마란 변화와 발전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쓰는

진화라는 말과 그 의미가 비슷하다. 그러므로 굳이 '까르마'라는 인도

말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번역자들 중에는 '까르마'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독특한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적당한 번역어가 없다

는 생각에서 '까르마'라고 그대로 音譯해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동

양 사상에 깊이 심취한 서구인들 중에는 '까르마'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운명 같은 것으로 여기고, 번역하지 않고 고지식하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까르마는 비인격적이고 자연적으로 전개

되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뜻할 뿐, 운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다. 까르마는 삶과 죽음 또는 중간계를 포함하여 모든 순간

에 원인의 힘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총체적인 틀[原形]이다. 이 틀은

연속되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쌓은 이전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전 행

위에서 비롯된 까르마라는 복합체는 현재의 몸과 마음과 행위의 원

인으로 작용한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행위와 말과 마음이 미래의

삶의 형태와 질을 결정하는 새로운 추진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이 되는 복합체인 까르마를 '진화의 추진력'(evolutionary

momentum)이라고 불러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티벳에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가르침이 있다. "그대의 전생이 어떠

했는지 알고 싶으면 그대의 현재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 그

대의 내생이 어떠할지 알고 싶으면 그대의 지금 마음을 살펴 보라,"

이 말 속에는 우리의 현재 상태는 과거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길고

긴 진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우리의 미래 상태는 지금 생

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

어 있다.

진화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좋은 쪽으로 돌리기에는 죽음에서 새로

운 탄생으로 전이해 가는 중간계 기간이 최적의 기회다. 그 기간 동

안 진화의 추진력은 일시적으로 유동적이 된다. 그러므로 중간계라는

결정적인 고비를 넘기면서 수직으로 상승할 수도 있고 하강할 수도

있다. 티벳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티

벳 死者의 書>를 운명의 방향을 좋은 쪽으로 돌려놓는 안내서로 여

기며, 보물처럼 귀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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