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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대문명

티벳 사자의 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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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토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0건 조회 676회 작성일 04-03-0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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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탈이란 무엇인가?

의학은 의술의 바탕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과학은 죽는 방
법의 토대가 된다. <티벳 死者의 書>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
해서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죽음의 과정을 탐색한 사람들의 이야
기를 분명히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 자리에서 해탈'이라는 말에서
'해탈'이란 무슨 뜻일까? 만물의 궁극적인 실체가 비어 있다는 뜻인
가? 아니면 자유라는 뜻인가?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
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이 약속하고 있는 '그 자리에
서 해탈'이란 일종의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기쁨'이나
'현상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음' 또는 '고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일
까? 무엇보다도, 불교는 과연 현실 도피적인 종교이며 <티벳 死者의
書>는 현실 도피를 위한 일종의 처방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불교 자체에도 해탈과 자유
에 관한 이론이 하나 둘이 아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4가지 고귀
한 진리[四聖諦] 중에서 3번째인 니로다(nirodha)의 문자적인 뜻은 '단
절'인데, 고통의 단절[滅]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도달하
는 궁극적인 실재 상태를 가리키는 니르바나[涅槃]라는 말의 문자적
인 뜻은 '(촛불이) 꺼짐' 또는 '사라짐'이다. 붓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지적인 금욕주의가 퍼져 있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영적인 분
위기였다. 금욕주의자들은 깨달음이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속박에 넌
더리를 치며, 강력한 초월적인 사마디[三昧]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절
멸시키고자 했다. 붓다가 이원적인 냄새가 풍기는 니르바나라는 개념
을 도입한 것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붓다는 니르바나가 마치 금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갈구하
는 최종적인 초월 상태인 것처럼 말했다. 그가 그런 가르침을 펼 때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한 붓다였다. 그는 인도 전
역을 돌면서 가르침을 펴는 동안에도 결코 니르바나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현실적인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궁극적인 니르바나(parinirvan
a)'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와 해탈을 일종의 현실 소멸이라고
생각하는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이원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유인하
기 위함이었다.
자기 중심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한데 -
자기라고 하는 고립된 존재가 있으며, 습관적으로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확신하고 있는 그들 속에는 망각에 대한 은밀한 갈망이 깃들어
있다. 그들에게는 망각이 혼란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한다.
그들은 그런 망각 상태에 도달하면 소란스러움도 없고, 책임지고 돌
보아야 할 가족도 없고,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괴로움도 없으
며, 따라서 진정한 기쁨을 맛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들은 위험
한 요소나 상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망각 상태에 이르면 말 그
대로 모든 괴로움이 잊혀질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 중에는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적인 절멸주의와 현실 도피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현실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강하게
현실 참여를 부르짖는 것은, 근본적으로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
내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망
각이 찾아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따라서 망각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지옥이니 뭐니
얘기하는 것은 씨가 먹히지 않는다. 반면에 자멸을 초래하는 전쟁이
나 마약 중독 또는 니코틴이나 알코올 중독을 통해 멸망을 향해 치
달리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지금 이러한 절멸주의가 온 세상을 휩
쓸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내면을 살펴보
면, 이런 절멸주의자들의 행동은 단절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 상황이 이러하므로, 니르바나를 마치 행복감
이 넘치는 지고한 망각 상태인 양 말하는 것은 상당히 기민하고 효
과 있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無)를 탐닉하고 공허한 사
마디를 추구하는 사람을 이런 방법으로 이끌어 들인 다음, 사라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무지와 오해와 에고에 대한 집착과 주관과 객관을
가르는 망상일 뿐임을 알려 주어, 그들의 삶이 영속적인 행복과 기쁨
이 넘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면 이 방법이야말로 더 없이 훌륭한
방법이지 않겠는가. 에고라는 올가미를 뒤집어쓰고 누리는 세상의 자
그마한 행복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여 누리는 행복에 비하면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의 껍질을 깨고,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얻으
면 궁극적인 희열이 보너스로 따라 온다. 이 희열이 진정한 의미의
해탈이고 자유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독립된 고정 불변의 자아
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와 사물이 무한하고 영원한 관계의 그
물로 짜여 있음을 안다. 무와 망각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고, 자신의
운명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다른 존재들과 끝없이 얽혀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행복을 서로 나
누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 시작된다. 그렇게 나누고 베풀어도 자신이
누리는 궁극적인 니르바나의 자유와 희열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과 사랑의 결합을 하는 것과 자신이 개인적으로 누리
는 기쁨이 하나라는 사실은 이원론적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
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자유와 기쁨을 자발적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위해 바치는 사람은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단절, 소멸,
종결, 그리고 자아 도취로부터의 해방은 진정한 행복과 참 사랑과 무
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는 것을 분명
히 안다면, <티벳 死者의 書>의 저자가 말하는 '해탈'의 의미를 이해
하기가 한층 수월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티벳 死者의 書>가 말하는 해탈을 죽은
다음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유물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일종의 망각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해탈이 만약 그런 종류의 망
각이라면 그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나 삶을 변형시키는 가르침
은 필요성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으리라.

요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 속하는 <지
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
르는 길>(8장을 보라)에서 뽑은 짤막한 철학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
겠다. 파드마 삼바바는 여기에서 모든 종류의 불교가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해탈, 니르바나, 진리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 점의 시간의 문을 통과하려면 -
과거는 맑고 텅 비어 자취도 없으며,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것이며,
현재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일 뿐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시간이 이러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볼 때,
투명한 보는 행위만 있을 뿐
보이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투명한 바라봄이
있는 그대로를 직접 바라보는, 밝은 지성이다.
이 지성이 바로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은 맑은 공(空)이며,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공(空)이다.
이 상태는 어떤 고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다.
따라서 완전히 멸절된 상태가 아니다.
이 상태에서는 다양한 것이 동시에 식별된다.
따라서 일종의 단일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생각이 없고,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
이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각성이며,
있는 그대로의 실체다.

이 구절은 니르바나의 궁극적인 실상을 묘사하고 있다. 니르바나는
'위대한 완성'의 영역이자 진리의 영역이다. 또 궁극적인 자유와 해탈
이며, 불성(佛性)을 향한 진화의 정점이다.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것은 <티벳 死者의 書>에 담겨 있는 모든 가르침의 목적이
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보면 니르바나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일상적인 상황일지라도, 니르바나는 모든 현재 상황
의 내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니르바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있는 그
대로의' 그대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보는 행위 자체를 주시
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속에 자아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독립된 알
맹이가 있고, 그대의 생각과 행위가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점을 180도 바꿔서, 보는 행위 자체를 보려고 해 보라. 그
러면 그대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이다.
데카르트도 이런 사실을 알았다. 그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는 생
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인식 주체는 인식의 대상
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서,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인식 주
체라는 알맹이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 행위가 일어
난다고 거칠게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받아 들였
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발언은, 끝까지 의심하기를 포기한 게으른 불교
철학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과 보는 행위 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보는 자'라는 고
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
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분별이 사라지고, 보는 행위만
투명한 상태로 남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 투명성은 무한대로 확장되
어 나간다.
인식 주체는 발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주체
가 없다면 대상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주체가
다른 대상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
지만 보는 행위 자체를 응시하는 통찰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
이 녹아 버리고, 모인식 주체는 발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주체
가 없다면 대상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주체가
다른 대상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
지만 보는 행위 자체를 응시하는 통찰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
이 녹아 버리고, 모든 것이 자유로운 상태로 투명하게 존재한다. 이
투명성이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를 직
접 바라보는 순수한 지성'이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며, 직접적이
고, 비이원적이며, 어떠한 고유한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비어-있음[空]이면서도 비어-있음[空]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고유한 성질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명료한 지적인 각성은 멸절되
지도 않고 망각되지도 않는다. 또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인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것에 의지해서 존재하거나 또는 어떤 관계를 가지
고 존재하는 그런 이원성의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
자유로운 상태를 맛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해탈을 가
능하게 하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본성인 영원 불변의 금강실체(金剛
實體)이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붓다이다. 불성(佛性)은 힘들여 만
들어 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이미 그것이
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것이 소멸되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영역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사물이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비어-있는'[空]
영역이다. 영혼 속에는 아무 것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투명한 비어-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과 기쁨을 나누는 상대
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의 폭과 깊이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진리의 몸(지혜와 자유), 우리들 내면
의 붓다의 깨달은 몸(기쁨과 희열), 그리고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나
투는 몸(자비와 사랑)은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
하여 그들 자신의 본성이 자유와 기쁨과 사랑임을 깨닫도록 돕는다.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
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존재와의 이 객관적인 동일시 속에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붓다의) 세 몸이 온전히 담겨 있다.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진리의 몸,
빛과 자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깨달은 몸,
모든 곳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나투는 몸이
그 속에 하나로 깃들어 있다.
이 셋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이것이
곧 실재의 모습이다.

이렇게 볼 때 <티벳 死者의 書>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해탈이 망각
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진리의 몸은 우리들 저 너머에 초연
하게 존재하는 몸이 아니다. 그 몸은 우리들 내면에서 무한한 지혜의
빛을 발산하며, 자신의 아름다움 속에 거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고립된 존재라고 느끼는, 에고에 중독된 처량한 존재들을 사랑과 자
비의 힘으로 끌어안고 있다.
사람들은 <티벳 死者의 書>의 저자인, 연꽃에서 태어난[化生] 파드
마 삼바바를 붓다의 세 몸이 세상에 나타난 존재였다고 믿는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시나 읊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우
리가 처해 있는 인간 현실 속으로 들어와서 자유와 해탈에 이르는
실제적인 통로를 알려 주었다. 그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
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의 다른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실체 세계로 들어가는 강력한 방법을 터득하려면
지금 그대의 각성이 바로 실체 세계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그대 마음의 본성이 아무 꾸밈없이 명료한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의 본성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깊게 생각할 마음이라는 대상도 없고,
그대의 지성이 스스로 밝게 빛나고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가?
마음 속에 이미 생각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깨닫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대는 왜 "나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
고 말하는가?
지금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그대는 왜 "나는 고요히 머물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만족할 수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명료함, 각성, 비어-있음은 그 자체로 나눌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왜 "수행이 효과가 없다"고 수행을 들먹이는가?
모든 조건과 상황이 있는 그대로 자유롭고 자발적인데,
그대는 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생각과 해탈은 동시적인데,
그대는 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대의 지성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이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을 해탈과 연결시키고 있다.
표현도 아주 단순 명료하다. 이 구절들은 중간계의 여행을 안내하는
<티벳 死者의 書>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에고에 집착하고 있는 사
람들에게 '아! 그런가'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공백을 만들어 준다. 그
리하여 에고를 벗은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 각
구절은 에고의 독단과 자기 연민 그리고 스스로 해탈에서 멀어지려
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도전하면서, 동시에 지겨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든든한 토대 위에 서도록 유도하고 있다. 현대 서구 문화 속
에 깊이 스며 있는 영적인 허무주의를 강화시키는 내용으로 오해하
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비어-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알고 '해탈'과
'망각'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이 가르침은 전혀 해로울 게 없다.
이제 지금까지 쌓은 토대를 발판으로, 티벳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
는 창조적으로 죽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제 3 장 □
티벳 사람들이 행하는 죽음 연습

1. 서론

<티벳 死者의 書>를 현실적으로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담
겨 있는 과학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이 티벳 사
람들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첫째, 티벳 사
람들은 이 책을 죽음의 실체와 체험에 대한 과학적인 안내서로 본다.
그들은 이 책을 죽음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현재의 행동이 죽음
의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 어떻게 대처
해야 될 지를 알려 주는 책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고, 대처하도록 도와준다.
둘째, 티벳 사람들은 이 책을 두 가지 면에서 영적인 수행의 지침
서로 여긴다. 먼저, 요기와 요기니들은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을 자신
만만하고 능숙하게 건너가는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이 책의 도움을
받는다. 다음으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자신 있게 죽음을 맞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깨달음의 세계
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종
의 종교적인 역할을 한다. 낯선 땅을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준
비물,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위험과 장애 요소 등이 자세히 기록되
어 있는 안내서가 필요하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안내서 없
이 낯선 땅을 향해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티벳 사람들
은 이 생을 떠나 미지의 중간계로 들어 갈 때 안내서가 없이는 가려
고 하지 않는다.
죽음의 과정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설명했으므로, 이 장에서는 죽
음에 대한 준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저승 중간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인 관성, 관조하는 기술, 실체를 통찰하
는 능력 등을 키우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런 것을 설명해 나
가는 과정에서 주로 <티벳 死者의 書>의 틀에 따를 것이지만, 간혹
확고하게 성립되어 있는 티벳의 다른 가르침도 소개하게 될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준비

오! 이제 이승 중간계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구나.
게으름을 버리고, 마지막 인생이라는 생각으로 살리라.
배우고, 생각하고, 명상하는 수행자의 길에 꿋꿋이 서서
현상과 마음의 실체를 밝히고,
깨달음의 세 몸을 실현시키고 말리라!
일단 인간의 몸을 입게 되면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니,
허접 쓰레기 같은 것은 좇아 다니지 않으리라.
(여섯 중간계에 들어가기 전에 드리는 기도[眞言], 쪽)

준비를 잘하지 않으면 잘 죽을 수 없다. 어떤 여행이든지, 여행에
는 항상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티벳 死者의 書>는 죽음이라
는 여행을 위해 살아 있을 동안 최소한 5가지는 준비해야 한다고 말
한다. 정보, 상상, 윤리, 명상, 그리고 지적인 차원의 준비를 해야 한
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기본적인 정보 차원의 준비란, 죽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진
행되는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준비는 죽음에 관
한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탐구함으로써 할 수 있다. 죽음에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도식을 이해하고, 죽음이 언제 닥쳐오더라도 자기
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 속에 완벽하게 담아 놓는 준
비가 바로 정보 차원의 준비다.
두 번째 상상 차원의 준비란, 죽음 이후에 오는 세계에 대해 긍정
적으로 생각하는 상상의 힘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티벳 死者의
書>는 이 준비를 돕기 위해 여러 불교 전통의 가르침을 이용하고 있
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억압을 받지 않는 사회, 특히 인도 같은 나라
에서는 나온 불교 문헌 속에는 천상계나 신들의 세계 또는 눈에 숨
어 있는 낙원 등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표현이 풍부하다. 물론 이런
표현은 모든 종교 전통에 다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내면 세계에 몰
두한 신비주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 군사 패권주의, 그리고 산업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서구
사회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천상계의 기쁨에 대한 개인적인 상상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신비가들이 이단자 취급을 받곤 했다. 그러나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
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와 졌고, 그에 비례하여 사회적인 억압도 느슨
해졌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상계에 대한 환상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분위기가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다. 현재
로서는 기쁨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분위기가 일반 예술이나 종교 예술을 막론하고 모든 예술 분야에 널
리 퍼져 있다.
예를 들면 기쁨이 넘치는 아미타바 붓다의 순순한 땅[極樂淨土] 수
카바티와 같은, 천상에 있는 붓다의 땅을 묘사하고 있는 경전이나 글
을 읽는 것은 죽음을 대비하는 아주 중요한 준비가 된다. 환경 전체
가 붓다인 상태를 일컫는 붓다의 땅은 유한한 개체가 무한한 깨달음
의 몸으로 진화-변형하여, 에고가 사라지고 만물이 일체가 된 상태를
상징한다. <티벳 死者의 書>에 의하면, 죽은 자의 영혼을 자신의 낙
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붓다가 어떤 특정한 방향에서 나
타난다. 이 때를 대비해서 경전이 말하고 있는 여러 붓다의 낙원들
중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상상하는 훈련을 해 두는
것이 좋다. 붓다의 땅에 대한 묘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상상력을 매혹적으로 자극한다. 그것들은 지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준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 상
상하는 것만으로도 장차 나타날 장엄하고 놀라운 영광을 맞을 준비
가 된다.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자기들 종교 내의 신
비가들이 본 환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 상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화려한 천국의 진 주문
을 상상하는 훈련 같은 것이 좋은 준비가 될 것이다. 종교와 무관한
사람이라면 사후 세계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특히
죽음과 비슷한 근사(近死) 체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담이나 죽음 이후
의 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보는 것이 좋으리
라. 위험과 모험이 뒤따르는 극적인 세계를 통과한 다음 말로 표현하
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상한 세상에 도달했다는 식의 공상 과
학 소설도 죽음을 대비한 상상 차원의 준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세 번째 윤리적 차원의 준비란, 죽음이 눈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훈련을 말한다. 구석에 쳐 박혀 무서
워 벌벌 떨라는 말이 아니다. 이 훈련을 하면 삶을 더 즐길 수 있고
더 강렬하게 살 수 있다. 이 훈련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죽으면 모든
재산과 가족은 물론 그대의 몸 마져도 잃는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대가 사로잡혀 있는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놓아 버리는 훈련을
한다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윤리적 차원의 준비는 관대함, 동정심, 인내를 키우는 수행으로 이
루어진다. 이 세 가지 수행은 모두 죽음에 대한 중요한 준비가 된다.
그러나 <티벳 死者의 書>에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불
교 사회에서는 이런 수행을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
다. 이런 덕성은 서구 사회의 종교에서도 가르친다. 종교인이 아니라
도 이런 윤리적 덕성이 절대자와의 만남에 대한 준비가 될 뿐만 아
니라 삶의 질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주는 것을 통해 관대함을 키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대에게 별로
관심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얼마
나 비싼 것을 주었느냐 가 중요한 게 아니다. 주는 행위를 통해 그대
가 극복하는 것은 정신적인 집착이다. 따라서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
이다.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려 알거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
면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된다. 물건이 아니라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작은 것을 주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대가 좋
아하는 것을 놓아 버릴 때 일어나는 정신의 변화 과정을 관찰해야
한다.
대인 관계를 부드럽고 원만하게 함으로써 동정심을 키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대는 언제라도 죽어 이 자리에 없을 수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에 늘
관심을 기울여라. 그들로부터 무엇을 취하는 데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질투심이 일어나면 면밀히 관찰해 보라.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이 질투심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질
투심이 그대의 마음을 얼마나 속박하고 있으며, 또 상대방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행
복에 그대 행동의 초점을 맞추라. 육체 차원을 즐거움이 아니라 그들
의 진정한 행복에 관심을 두라. 자신 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라. 모
든 관계는 일시적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최선을 다하도
록 하라.
몸에 대해 편안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인내심을 키우는 수행을 해
야 한다. 몸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라. 꼭 필요하지도 않는 것
을 위해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몸이 혹사당한다.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염려하지 않을 때의 그대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당당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울을 보라. 그리고 언
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의 얼굴이 창백해
지고, 입술이 오그라들며, 피부는 탄력을 잃고 부패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라. 그러나 이런 병적인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마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을 느끼도록 하라. 그대
의 결점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몸을 돌보되 강박 관념을 갖고 사로
잡히지는 마라. 예민하게 깨어 있으되 광기로 들뜨지는 마라. 그리고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심을 키우라. 사고를 당하면 어쩌나, 누군가가
해꼬지를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지 마라. 모기가 문다고 화 내
지 마라. 모기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위험으로
부터 그대를 보호하라. 그러나 그 일에 몰두하여 넋을 잃지 않도록
하라. 고통과 난관을 인내심과 포용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라. 그리
하여 점점 더 큰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르라. 한꺼번에 하
려고 하지 마라. 자기 학대는 자아에 대한 더 큰 집착을 낳는다. 그
런 방법을 실패할 수밖에 없다.
넷째로, 그대는 죽음에 대비하여 명상 차원에서 준비를 할 수 있
다. 명상을 위해 좋은 스승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명상 그룹에 가입하거나, 종교를 바꾸거나, 일상적인 삶의 패
턴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수행을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시
도는 생명력이 길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기 어렵
다. 이 책 이전에 번역된 <티벳 死者의 書>에는 명상 차원의 준비에
대한 안내가 없다.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는 순간과 그 이후에 전개되
는 중간계 과정에 사용할 수 있도록 번역되어 있다. 물론 <티벳 死
者의 書> 자체에도 명상 차원의 준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티벳 사람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명상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상 차원의 준비는 살아 있을 동안, 명상의 가치를 인식한 순간부터
시작해야 한다.
명상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고요하게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훈련
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균형 잡힌 자세로 편안하게 앉
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리를 틀고 결가부좌 자세로 바닥에 앉는 것
이 좋다. 결가부좌 자세로 앉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자세로
앉으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꼭 결가부좌가 아니라도 균형 잡힌 자
세로 앉아서, 5분이나 10분 정도 집중하는 훈련을 한다. 처음에는 호
흡을 세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일어
났다가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생각에 끌려들어 가면 안된
다. 이 훈련은 편안한 상태를 즐기는 동안에 끝내야 한다. 그래야 다
음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곤해질
때까지, 지루하게 계속하는 것은 좋지 않다.
편안한 상태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되면, 어떤 대상을 정해 놓고
집중하는 훈련을 시작한다. 불교인이라면 자그마한 佛像이 좋을 것이
고,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의 聖像이 좋으리라. 이슬람 교인이라면
성스러운 문자를 선택할 수 있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모나리자나 꽃
이나 천체 사진 같은 것도 집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마음이 흩
어지지 않도록 하고, 정신을 대상에 집중한다. 마음 속에서 생각이
일어나거나 감정의 변화가 생겨도 신경 쓰지 말고 대상에만 집중해
야 한다. 처음에는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때문에 실망하겠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계속 훈련해야 한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갖다
싶으면 즉시 다시 대상을 향해 돌이키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조
금씩 조금씩'.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 훈련의 목적은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을 키우고, 집
중력을 통해 마음의 힘을 키워서 감정과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을 증
진시키는 데 있다. 이 훈련은 마음과 육체의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건강을 증진시켜 준다. 또 무엇을 성취하는 능력도 강화시켜 준다.
이 훈련을 하고자 한다면, 이 훈련에 대한 보다 정교한 가르침을 소
개하고 있는 최근에 출판된 여러 책들을 참고가 될 것이다.
집중하여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은 다음 단계의 명상을 위해 도
구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만으로는 깊은 깨
달음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는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을 해야 한다.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은 죽음을 대비한 결정적
인 준비라고 할 수 있다.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이란,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강화된 마음을 사용하여 실재와 환경
과 자아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명상은 의식이 온전
히 각성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과 육체를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주시하는 훈련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수행은 집중의 대상이 자신의
마음과 육체로 바뀌었다는 것을 빼면, 객관적인 대상에 집중하는 앞
단계의 명상과 비슷하다.
이 단계에서는 마음과 육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천천히
세밀하게 관찰한다. 어떤 식의 반응도 보여서는 안된다. 마음과 육체
를 주시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다섯 무더기[五蘊]와 같은 도식을 염
두에 두고 그것들 하나 하나에 대해 주시하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그대의 진정한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다. 그대는 아마 '나'라고
하는 고정된 주관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
다. 이 깨달음은 해탈로 인도하는 문인 '자기-없음'(無我)에 대한 통
찰로 이어진다.
이 명상은 대단히 복합적이다. 이 명상에 대한 가르침 또한 엄청나
게 많다. 하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즉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
고 있는 전 과정에 대해 명민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수
행은 항상 깨어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 깨어 있
을 수 있는 힘이 커지면, 의식이 각성된 상태로 꿈을 꿀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수행은 의식이 각성된 상태로 중간계를 체험하기 위한 중
요한 준비가 된다. 내적으로 통찰하는 명상은 생각과 감정 등을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망상을 제거한다.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존재는
없으며, 그것은 일시적인 구조물일 뿐임을 깨닫게 해 준다.
명상을 통해 얻은 내적인 통찰력은 죽음 순간에 극히 중요한 역할
을 한다. <티벳 死者의 書>에는 무엇이 나타나도 두려워하거나 정신
을 잃지 말라는 권고가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 이 권고는 어떤 일
시적인 상황에 휘말려 그 상황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습관을 버리고,
전개되는 현상을 냉철한 눈으로 주시하라는 뜻이다.
명상의 세 번째 형태는 마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일
종의 치료-명상이다. 예를 들어 사랑에 대해 명상한다고 하자. 그때
그대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련성을 관조하게 된다. 이 명상에서는 다
른 존재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고 그들은 아름다운 존재로 보려고 애
써야 한다. 대상이 어떤 존재이든, 그대에게 무슨 의미가 있든, 그들
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대에게 유익이 있든 없든, 또는 아름답든 그
렇지 못하든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대의 사랑의 힘이 강
화된다. 쉽게 화내는 습관을 고치고, 관용을 키우기 위해 인내에 대
해 명상할 수도 있다. 집착을 떨쳐 버리기 위해 명상할 경우에는 죽
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제일 좋다. 죽음을 생각하면 소유에 대한
집착이나 이 세상 일에서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명상의 네 번째 형태는 시각적인 상상이다. 이 명상에서는 바람직
한 환경과 사건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이 명상을 통해서는 죽음 이
후에 직면하게 될, 전혀 새로운 상황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시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 범위가 넓다. 평
화롭고 안정된 가정을 그려 볼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을 만나도 꿋꿋
하게 헤쳐 나가는 자신의 믿음직한 모습을 그려 볼 수도 있다. 意識
下意識 속에 쌓여 있는 좌절감을 극복하고, 금강석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성취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고, 신비스러운 만
다라와 같이 완전한 환경이나 아름다운 붓다의 땅에 있는 자신의 모
습을 시각적으로 그려보는 것도 좋다.
명상의 마지막 형태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명상이다. 이 명상에
서는 일상 생활의 모든 행위가 영적인 방향을 향하게 한다. 본래 상
태의 해탈을 조망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영적
인 성숙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면 아주 평범한 일일지라도 명상 수행
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가 있다.

오! 이제 꿈 중간계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구나.
시체처럼 우둔하게 망상 속에서 헤매는 잠을 떠나,
온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실체를 체험하는 흔들리지 않는 경지로 들어가리라.
꿈 속에서도 정신을 차려,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꿈을 꾸리라.
짐승처럼 정신을 잃고 잠에 빠지지 않고,
잠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소중히 여기리라.
(여섯 중간계에 들어가기 전에 드리는 기도[眞言], 쪽)

이쯤 되면 잠자는 것도 수행으로 연결된다. 잠드는 과정을 죽음 이
후의 해체 과정에 대한 연습으로 삼을 수 있다. 일상적인 차원의 의
식이 8단계의 해체 과정을 거쳐 깊은 잠 차원의 투명한 빛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나아가 꿈꾸는 상태를 중간계 경
험에 대비한 준비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꾸는 동
안 꿈을 꾸고 있다고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은 한꺼번에 이
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수행을 지속
해 나간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꿈을 꾸면서 꿈을 꾸고 있다
는 명확한 자각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죽음 이후의 중간계를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즉 자기가 지금 어
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아는 상태에서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일상 생활 중에 행할 수 있는 명상의 또 다른 형태로 만트라를 반
복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다. '옴 마니 파드메 훔'(OM MANI PAD
ME HUM)은 자비를 비는 만트라로써, '옴 - 연꽃 속의 보석이여! -
훔'이라는 뜻이다. 티벳 사람들에게는 이 만트라가 만사 형통을 기원
하는 뜻으로 통용된다. 그들은 우주 속에 충만하게 깃들어 있는 붓다
[아발로키테스바라]의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
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만트라를 외운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
를 돕기 위해서도 이 만트라를 외운다. 따라서 이 만트라의 울림 속
에는 긍정적인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티벳 사람들에게는
마음 속으로 또는 낮은 목소리로 '옴 마니 파드메 훔'을 외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들은 이 만트라를 외울 때, 만트라와 아발로키테
스바라(觀世音菩薩)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피부로 느끼는 법을 배웠
다.
티벳 사람들은 명상 중에도 '옴 마니 파드메 훔'을 반복해서 외운
다. 만트라를 반복하면 일상적인 의식 작용이 정지하고 의식의 지평
이 만트라의 흐름과 하나가 된다. 이 만트라를 심장 차크라를 상징하
는 바퀴에 새겨진, 보석으로 장식된 여섯 문자와 연결하여 시각적으
로 상상하는 수행자도 있다. 그들은 입으로 '옴 마니 파드메 훔'을 반
복하면서, 보석으로 장식된 여섯 문자에서 다섯 지혜를 상징하는 무
지개 빛이 비쳐 나와 온 우주 만물에 은총을 베푸는 모습을 시각적
으로 상상한다. 가슴에서 발산하는 다채로운 빛깔의 사랑 에너지의
흐름과 만트라의 흐름이 하나 될 때까지 그렇게 한다.
다른 만트라도 같은 방법으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자신의 종
교가 유대교나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라면, 자기에게 맞는 짤막한 기
도문을 만들어 만트라로 사용하면 된다. 만트라의 목적은 마음 속에
긍정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만트라를 반복하는 훈련은 특
히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그 가치가 빛난다. 이 수행을 하면 모
든 것을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힘이 생기며, 간섭하지 않는
힘이 있으면 죽음에 임박해서 또는 중간계로 옮겨가는 중에 당황하
지 않고 초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일상 생활 자체를 영적인 수행으로 생각하는 훈련도
중요한 명상 수행이다. 설거지할 때는 그릇 씻는 행위를 마음의 탐착
을 씻어 내는 영적인 수행과 연결시켜, 설거지 자체가 기도가 되게
한다. 집을 지을 때는 마음 속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과 연결시킨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모르는 사람을 볼 때는 붓다의 눈으로 붓다의
심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문을 열 때는 깨달음의 문을 연다는 심정을
갖는다.
죽음에 대비한 다섯 번째 준비는 지적인 차원의 준비다. 몇몇 사람
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는 결코 반(反)-지성적인 종교
가 아니다. 지성은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 지혜가 없이
는 깨달음과 자유를 얻을 수 없는데, 지혜는 지성에서 나온다. 지혜
가 빠진 명상, 사랑, 윤리적 실천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오랜 세월 배워야 한다. 배움은 학교에 몇 년 다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지를 가르칠 뿐이다. 그러
므로 학교에서의 공부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삶, 자유, 자아 그리
고 우주의 본성을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경전들이 있다. 특히 깨달은
자의 자비와 사랑, 비어-있음(空), 자아-없음(無我), 상호 연관성 등에
대한 가르침은 주목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
경전을 읽는 것은 세 번째 형태의 명상인 치료-명상과 직결된다.
경전을 통해 붓다의 순수한 땅[淨土]에 대한 이야기, 붓다와 그 제자
들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등을 읽으면 의식 속에 그 영향이 새겨
지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약 다른 종교나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면, 그 쪽 방면의 책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세상과는 다
른 영역에 대한 이야기에도 관심을 두라. 윤리적, 종교적, 지적 성숙
을 도모하는 가르침에 주목하면서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어라. 종
교와 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로
집필된 과학 서적이나, 현대 심리학이 제시하는 자아 성장에 관한 이
야기들을 읽는 것이 지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아브락사스요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3-0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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