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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고대문명 수메르 문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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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안네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1건 조회 2,634회 작성일 03-04-2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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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김진영씨의 저작 "수수께끼의 고대문명" - 도서출판 넥서스 - 에 있는 내용입니다.

책에는 여러가지 사진과 그림들, 자료들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 내용은 책전체 내용의 일부만 있으므로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책을 직접 읽어본다면 이전의 인류역사에 대한 많은 의문점이 풀릴것이라 생각됩니다.






수메르의 역사와 문화




로켓의 신의 땅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강 사이의 좁고 기다란 평야지대는 옛 그리스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두 강사이의 땅')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시리아 북부까지 포함한 넓은 지역을 합쳐서 그렇게 부른다.

엄밀히 말해 이 지역최초의 문명은 서기전 5000년~4300년경 번영했던 시리아 북부의 옛 도시 '텔 할라프'에서 일어난 비수메르계의 '할라프 Halaf 기' 문화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곳은 1927년~1929년 사이 독일의 오펜하임 Oppenheim 이 발굴했던 신석기 초기 시대의 도시 유적으로, 보리재배, 가축사육과 함께 구리 제품과 칠무늬 토기를 만들었던 문화기였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 이후문명은 남부 메소포타미아가 기선을 잡았다.

늦어도 서기전 3500년~3000년 사이에 분명히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수메르인은 원래 이 지역 원주민이 아니라 이르게는 서기전 4000년 무렵 중앙아시아의 어디에선가 이 곳으로 이주, 정착했던 것이 분명하다.

'수메르'라는 호칭은 원래 북부의 아카드인이 부르던 두 강 사이 하류지역 '낮은 땅' 을 뜻하는 이름이었는데, 수메르인은 스스로 '키 엔 기르 KI. EN. GIR'의 주민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GIR는 로켓( 및 '게 crab ') 이라는 뜻이다.

곧' 로켓의 신의땅'이란 뜻이다.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들이 자기네 땅에서 신들이 로켓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또 '게'는 황도 12궁의 하나인 거해궁(巨蟹宮)을 뜻하는 '기르탑 GIR. TAB'에서 나온 말이다.].





발굴의 역사


가장 남쪽에 있는 '에리두 Eridu'는 전승에 의하면 대홍수 이전 최초의 도시로 알려진 곳인데. 발굴자들이 깊이 파들어 가자 과학과 지식의 신 엔키를 모시는 신전 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은 단 하나가 아니라 층위에 따라 서기전2500년, 2800년, 3000년 등 연대순으로 여러 번 재 건축됐던 것이 드러났다.

고고학에서는 이것을 '에리두 기(期)'라고 부른다.




1919년 영국의 홀 H.R. Hall과 푸에 레오너드 울리 경 Sir C. Leonard Woolley은 서남부 사막지대에 있는, 우르 서북쪽4마일 거리의 '엘 우바이드' 라는 촌락에서 고대 유적을 발굴했다.

이 곳이 '엘 우바이드 El-Ubaid 기'의 표준 유적지로 알려진 곳인데. 서기전5000년~35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측되며 에리두 기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문화기로 알려졌다.

이 곳에서 최초의 접토 벽돌, 모자익 장식, 벽돌 장식 묘지, 기하학적 무늬의 채색 토기와 구리 거울, 전투용 구리 도끼, 옷감, 가옥의 흔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물인 신전유적이 드러났다.

또한 1922년~1937년 울리 경이 발굴을 지휘했던 바그다그 동남방 3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우르' 에서는 수많은 호화로운 보석류, 무기, 전차, 군기(軍旗), 금, 은, 청동제 투구들이 왕묘에서 발견되고 직조공장터와 법원 기록이며 거대한 지구라트 유적이 드러났다.

이 곳이야 말로 수메르 역사의 왕도(王都)로 흥망성쇠가 거듭되었던 곳이다.




1913년~ 1939년 사이 독일 오리엔트학회에서 15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발굴했던 '우르크'는 역사를 서기전 4000년대로 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게 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곳은 영웅 길가메쉬의 고향이었으며, 여신 아난나가 수호신으로 모셔진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도가니에서 구운 최초의 채색 토기와 최초의 석회암 포장도로 흔적이 발굴되었다.

또 최고신 아누를 모셨던 백(白)과 적(赤) 신전이며, 매우 중요한 최초의 문자판(원문자판)과 원통 인장이 나타났다.

이 문자판은 늦어도 서기전 310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모두 570장에 달한다.

또 발굴된 원통인장도 기적처럼 놀라운 고고학적 보물로 찬사를 받았다.

이 우루크의 유적을 표준 유적으로 하는 '우루크 기'는 정통학계에서 가장 오래 기록된 역사시대로 인정되고 있다.





그 다음은 '젬데트 나스르Djemdet Nasr 기'(우루크 근처의 유적 발굴지 이름)로, 엄밀하게 말해 대략 서기전 2800년~2700년경 본격적인 '도시 혁명'이 일어났던 도시국가 시대였다.

이 때의 도시들인 니푸르에서는 3만 장의 각종 문서가 발견되었고 '수루파크 Shuruppak'에서는 첫 학교건물이 발굴이 발굴되었다.

이 시대에 도시들은 저마다 수호신을 모시고 통치자들은 그 대리자로서 '엔시' 또는 '루갈 LU.GAL'('큰 어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후기 바빌론/앗시리아의 왕들에 비하면 아주 겸손하고 부드러운 칭호였다.







본격적인 도시 문명의 시작


서기전 3000년 ~2340년 무렵의 도시국가 시대는 후대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다른 점은 각 도시의 주권자가 신으로, 이를테면 신권(神權) 사회주의 사회였다고 부를 수 있다.

당시 대표적 도시로서 라가쉬 Lagash, 움마Umma, 우르 , 우루크, 니푸루, 슈루파크, 에리두 등이 있었고, 각 도시에는 필수적으로 먼저 인공적으로 구축된 고지대에 신전이 세워지고 그 주위의 성역에 창고, 작업장, 서기들의 방이, 다시 그 주변에 주택이 밀집하는 등 철저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

도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귀금속 세공인, 대장장이, 피혁공, 목수들이며 심지어 각기 먼 바다. 담수, 은하, 늪에서 일하는 어부 등 여러 전문 어부에 이르기까지 세분되었고, 원거리 통상에 종사하는 상인('우르의 상인'은 뒤의 페니키아의 상인만큼 활동범위가 넓었다.)들과 여러 직급의 서기와 관리가 있어서 신전 직할지가 분배되었으며 신전, 성벽, 운하 같은 공공건물의 보수 팩임을 맡았다.

또 심지어 가축 사육에도 전문분야가 있어서 각기 소, 당나귀, 양, 염소, 돼지를 기르는 전문직으로 세분되었다니 수메르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 사회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도시국가들 중 두드러진 우르의 제1왕조시대는 거시전 2500년~2340년 사이 다섯 왕이 통치한 뒤키쉬 출신인 아카드의 사르곤 왕이 수메르의 '루갈자게시'를무찌르고 '수메르 아카드 왕국'을 세워 서기전 2200년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나 동북쪽 자그로스의 산악민족인 '구티움'족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그 약 90년 후인 서기전 2110년경 우루크의 통치가 '우투헤갈'이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 신하 우르남무'가 우르 제3왕조를 세웠다.

이때 유서 깊은 라가쉬에서 영주(英主) 구데아 Gudea'가 출현하여 수메르 민족을 부흥시킨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닌기르수 Ningirsu'(니누르타)를 수호신으로 모셔 그 독실한 믿음으로 유명한 통치자였다.

이 우르 제3왕조 시대는 전 시대에 이어 세계적인 통상무역이 융성해지고 정치적으로 관료조직에 의한 통치가 행해졌으며, 또 가장 오래된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 Code of Urnammu>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도 다섯 왕이 다스린 뒤 앞서 말했듯 신들 사이의 갈등과 전쟁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로써 수메르 민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수메르어는 제3왕조 이후부터 사어(死語)가 되어 갔지만, 이후에도 문화어, 학술어로 중세의 라틴어 같은 구실을 했으며, 대역(對驛)된 어휘표(사전)가 중동 각지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수메르의 농업과 직조기술


수메르는 원래 기본적으로 농업경제사회였다.

예나 지금이나 강우가 아주 적고 뜨거운 이 지역에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 시스템이 발전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그들의 일상식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푸짐하고 넉넉했던 것 같다.


주식은 밀과 보리로, 이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발효시키든가 그대로 빵, 죽, 케익, 비스킷을 만드는 방법이 문서에 적혀 있다.

소, 양, 염소 등 가축에게서 짜낸 우유로 음료와 요리와 요구르트, 버터, 크림과 치즈를 만들었으며, 각종 육류, 특히 돼지고기가 선호되었다.

한 텍스트에 의하면, 신전에 보리와 엠메르 밀 빵, 꿀과 크림, 대추야자, 과자, 맥주, 포도주, 우유가 바쳐졌으며, 특히 구운 쇠고기는 최고의 봉헌 음식이었다고 한다.

살구, 버찌 같은 과일이며, 양파, 콩 오리, 양배추와 상추는 식탁의 필수품이었다.

특히 맥주는 현대인도 놀랄 정도로 흔했는데, 건조한 지대에서 맥주 원료인 보리농사가 적합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종류도 흑맥주, 갈색 맥주, 쓴 맥주, 단 맥주, 흰 맥주, 강한 매주 등 16종이나 되었고 거리에 비어 홀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관개농업 발전은 곧 정비된 행정관료조직을 낳았으며 이것이 정치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농업과 함께 어업도 발전했다.

페르시아만과 두 강의 지류와 수많은 늪지와 호수들이 자연의 양어장 구실을 했으므로 앞서 말했듯이 어부의 직종이 세분될 정도로 어류가 풍부하고 다양했던 것이다.

농업과 더불어 천연섬유 작물을 원료로 하는 직조 기술도 발달했다.

그것은 실로 그 4천 년 후인 1760년대의 영국의 산업혁명을 무색하게 하는 업적이었다.

이미 서기전 3800년경에 아마와 양털로 만든 정교한 의류 제품들이 나타났으며, 그로써 시민들은 상당한 사치를 누렸던 것이다.

그 당시의 의류제품들이 어찌나 우수했던지 수메르 멸망 1천년이 지난 뒤 씌어진《구약성서》<여호수아 서> 7장 21절에는 약탈을 자행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무릅쓰고 유대의 병사들이 '시나르'(수메르)로 들어가 옷감을 입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이와 유사한 우수한 직조기술이 옛 이집트에도 있었다. 1950년대에 하바드 대학의 월터 에머리 Walter B. Emery 교수의 발굴팀은 사카라의 왕묘에서 오늘날 섬유공장에서 짜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우수하고 가는 아마제 직물천을 발굴했다고 한다.)



수메르에서는 원유와 아스팔트를 이용한 화학공업도 발달하여 각종 염료와 의약품을 생산해 냈지만, 오늘날 같은 '오염'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신들의 엄격한 지시에 따라 무절제한 공업 생산을 절제했던 것일까?







발달한 공업기술과 무역


전쟁은 과학과 기술 발정을 비약시키는 돌파구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수메르인들에게는 신전 건축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것 같다.

천상의 그들의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신전 건축에 필요한 불에 구운 벽돌과 점토제 일용품을 만들려면 우선 크고 강한 도가니가 필요하고 그 연료로 원유와 역청이 필요하게 된다.

신전 건축은 그래서 요업과 건축기술과 기하학과 인력동원을 위한 효율적인 행정조직 체계까지 발전시켰다.




또한 신전을 장식할 금, 은 ,동, 청금석(靑金石)-아프가니스탄에서만 산출된다.- 같은 귀금속을 조달하려면 멀리 해외로 무역활동을 해야 했다.

더욱이 금속재련 기술은 용광로를 발명하게 하고 금속의 주조법과 경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5천 년 전인 서기전 3000년경에 이런 기술과 무역이 번창했던 것이다.



금속가공 기술은 고대에 있어서 놀라운 기술 문명의 한 단면이었다.

도가니가 만들어져 강한 열과 합께 온도를 임의로 조절하고 불순물 없는 정련된 금속을 채취하 수 있었다.

이미 8천 년전에 동북부 자그로스와 타우루스 산지에서 자연 금이나 은, 구리 원광을 녹이고 두드려 원하는 금속을 얻었다.



그러나 과학사가 포브스 R. J. Forbes의 《고대의 금속 기술》에 의하면, 고대 중동에서 자연동의 공급은 어느 틈에가 급속히 사라지고 대신 함량이 낮은 동광석을 채취해야 했으며 이를 채굴하고 분쇄, 정련하는 기술이 도가니 같은 용광로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급속히 진전되었다고 한다.

구리에 주석을 섞어 더욱 주조하기 쉽고 단단하며 가소성이 있는 청동을 만들었다.

수메르인들은 대충 구리와 주석을 6 : 1 ~ 9 : 1의 비율로 섞어 우수한 청동제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석이었다.

주석은 정련하기 힘들고 또 산출지가 제한 된 금속으로, 중동에서 가까운 곳이라곤 중부 유럽의 다뉴브강 유역이나 체코의 삭소니아 등지였지만 고대에 이미 산출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버마나 말레이지아 같은 먼 동쪽에서 구했던 것도 아니었다.

전세계에서 주석의 원광인 석석(錫石)이 노천 채굴되었던 곳은 영국의 콘월 반도와 남미 안데스 산지의 볼리비아뿐인데, 이 중에서 전자는 이미 고대에 소진되었고 후자는 '주석이 산'이란 별칭이 붙은 수도 라파즈 동남방에 있는 산지가 그 산출지이다.

또 티티카카호 동부연안에 깔린 원광이 있었다.




Z. 시친에 의하면, 이 볼리비아의 '주석의 산'이 수메르 문서에 묘사된 주석 산출지와 유사하며, 또 티티카카호 주변에 옛 수메르의 닌하르사그 여신과 비슷한 조각상이 발견되었고, 남미에서는 고대에 청동기 문명의 흔적이 전연 없었다는 등 많은 증거와 연구가들의 서적을 인용하여 놀랍게도 옛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먼 거리에서 주석 원광을 채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앞서말한 옛 지도에 관한 의문이라든가 기원전 6세기경 체니키아인들이 신대륙과 브라질을 탐험했다는 주장(사이러스 H. 고든 박사가 주장했다.) 도 풀릴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길지 모른다.

또 마야 문명 유적에 나타난 메부리코를 가진 셈족을 닮은 인물상이 수수께끼라든지 멀리 잉카족의 문화영웅 '비라코차' 전승의 수수께끼도 풀릴지 모른다.





이처럼 먼 거리를 주파하는 해양무역은 필시 아눈나키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또 이렇게 정련하고 구리와 혼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술적 노하우를 축적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청동제 천문시계의 제작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카드어로 번역된 선박 기술서에는 크기, 행선지와 사용 목적에 따라 105종이나 되는 수메르의 선박의 종류가 나타났으며, 또 선박 제조와 운용에 관한 69종의 용어가 적혀 있다.

필시 그들은 금속, 석재 목재와 그밖에 국내에 조달할 수 없는 물품을 원양 항해용 선박으로 해외에서 운반했을 것이다.






교육과 문예


벌써 5천 년 전 본격적인 교육이 보급되었던 듯 슈루파크의 지하에서 학교 건물 유적이 발굴되었다.

교육은 우선 왕실과 신전 운영 기록을 담당하는 서기를 양성하는 목적으로 시행되었고, 나아가 다양한 상거래를 기록하고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교육받은 인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학교는 '에두바 E. DUBA', 곧 '점토판의 집' 이라고 물렀는데, 처음에는 서기 양성을 목표로 했었고 또 이들은 신전 서기, 공공기관 서기, 상업 서기, 학교 서기 등 어부만큼이나 직종이 세분되었으며 교사로서도 활약했다.

학교에서는 읽기, 쓰기는 물론 수학, 신학, 지리학, 동 식물학과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고 신화나 서사시, 신을 찬양하는 찬가와 애가(哀歌)도 배웠으며, 고등교육으로 고전작품을 복사하고 연구하는 과정도 있었다.



교원은 '움미아 ummia '라고 하는 전문 교사가 있었는데, 수메르어나 그림을 담당하는 움미아뿐 아니라 회초리를 담당하는 움미아도 있어서 학생들은 심하게 매를 맞았던 것 같이, S. N.크레이머가 소개한 <학교의 나날>에서는 , 한 학생이 학교에서 수시로 매를 맞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교장 선생에게 좀 더 많은 급료를 주세요. 그러면 나에게 도 친절하게 해 줄 거예요'라고 부탁하고 있다.

아버지는 즉시 교장 선생을 초대하여 향유를 뿌리고 새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며 급료를 올려 주었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나 이 학생은 교장 선생에게 크게 칭찬을 받고 그 장래를 축복 받았다고 한다.





교육과 함께 민중 예술도 번창했다.

신전에서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환영을 받았다.

하프와 리라 같은 악기도 흔했으며, 서기전 2000년 무렵 이미 오늘날 똑같은 7음계의 악보가 발명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서양 음악의 기원이 그리스가 아니라 수메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한다.







개혁과 사회복지


수메르는 우리가 생각하듯 결코 유토피아적 사회는 아니었다.

하찮은 어부나 서기의 직업조차 세분될 정도로 산업활동이 왕성했던 만큼 부패와 비리도 심했던 모양이다.

절대권을 쥔 신일지라도 인간의 일에 간섭하여 자질구레한 행정법령으로 백성을 묶어 둘 수는 없었다.



벌써 서기전 2600년 무렵 엔시(왕) '우르카가나 Uriahina'는 자유, 평등, 정의에 대한 개념을 명문화시켰다.

곧 그는 사업장의 월권과 부당한 착취, 공권력 남용, 독과점 집단의 가격 조작 등에 대한 개혁령을 선포했다.

예컨대 당나귀 한 마리나 집 한 채 값도 임의로 정할 수 없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해서는 안되고 또 빈민과 과부와 고아는 물론 이혼당한 여자도 법의 보호를 받도록 조치했다.

그렇다면 수메르 문명이 얼마나 오래 되었기에 그런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수메르의 법령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상업사회의 병폐인 경제 범죄에 관한 규정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식량 가격, 량, 선박, 가축의 임차료, 부동산, 재산 상속, 노사관계와 세금에 대한 이의 신청 절차가 나타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범죄와 처벌보다는 예방과 복지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법정에서 판사는 심판자라기보다는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배심원 같은 역할을 했으며, 보통3~4인의 판사가 심리를 밭았는데, 그 중 1인은 왕실 법원 판사이고 나머지는 36인 위원회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천상의 신이 지상에 정의를 보장하기 위하여 왕을 임명했다는 믿음으로 법률을 정의의 개념에서 이해했다.

곧 왕일지라도 그가 얼마나 많은 땅을 정복했는가 또는 얼마나 부유한가로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가 정의로운가 아닌가 하는 윤리적 기준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히브리 성서에서 야훼가 임명한 판관(judge)이 왕 이전에 백성을 다스렸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수메르와 히브리 민족에게 똑같이 이 판관은 '정의의 양치기'로 불려졌다. 다윗왕이 바로 그런 양치기 출신이었다.









퇴보하는 문명



신화를 날조한다


수메르가 서기전 2000년 무렵 멸망하고 마르둑이 바빌론에서 신위에 오르자, 처음으로 서둘러 행했던 일은 신년 경축의식 Akitu 이었다.

이것은 우주의 생성 신화와 아눈나키('하늘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로 조작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는 의도에서 베풀어진 새해 첫날의 축하연이었다.




<창조의 서사시 Epic of Creation>는 그런 이유로 마르둑이 날조했던 가장 큰 신화였다.

이것은 그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 곧 '옛날 옛적 저 높은 곳에… When high…' 라는 뜻인 <에누마 엘리쉬 Enuma Elish>로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것은 원래 수메르의 우주 창생신화(cosmogony)로, 태양계 행성들의 생겨남, 제12행성 '니비루'의 출현, 이것과 '제5행성'의 충돌과 폭발로 인한 소행성대의 출현과 지구와 달의 탄생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길고 방대한 비유적인 서사시라고 Z. 시친은 주장하고 잇다.



우선 태양계의 맹주인 12번째 행성 '니비루'란 이름이 '마르둑'으로 바뀌어 우주 최고신이 된 것이다.

이 아눈나키의 별이며 '아누의 거처'인 니비루에서 아누가 쫓겨나(물론 상징적으로) 천왕선(우라누스)으로 옮겨지고 아버지 엔키는 해왕성(넵튠)으로 옮겨졌다.

엔릴의 아들 이슈쿠르/아다드[중동 북서부의 '바알(폭풍)신]의 별인 수성(머큐리)은 자기 자식인 '나부'의 별로 바뀌었고 이난나/ 이슈타르의 별인 금성은 배우자인 '사르파니크'에게 옮겨지기로 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중동 신화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12신전의 멤버들이 각기 특정한 별에 고정되어 관련된 것은 아니었으며, 멤버가 아닌 니누르타는 토성신, 네르갈은 화성신으로 알려졌다.

[원래 수메르시대부터 '운명을 결단하는 일곱 신'이란 주요 신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누, 엔릴, 엔키, 닌하르사그(모신), 샤마슈(태양신), 신(달의신) 및 이슈타르(금성신)등이었다].



엔릴은 너무나 막강한 신이었기에 그의 지위(지구)를 바꾸는 대신 숫자로 표시된 그의 지위[60진법에 따라 아누=60, 엔릴=50, 엔키=40, 난다/신(달의 신)=30, 샤마슈(태양신)=20등]를 마르둑에게 옮겨 스스로 '50의 지위 Rank of Fifty'이니, '50의이름 Name of Fifty'이니 하고 부르게 바꿔 놓았다.

비록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는 적대자일지라도 다른 신들을 처벌하거나 권력을 제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권력이 자신에게 종속된 것처럼 존칭을 바꿔 놓았다.

예컨대 농업의 신인 나누르타는 '마르둑의 괭이', 네르갈은 '마르둑의 공격자', 엔릴은 '마르둑의 주권과 자문역', 난나르/신은 '밤을 밝게 해주는 마르둑'등으로 바꿔 놓았다.






신들 가운데 으뜸 신



마르둑은 또한 다른 신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바빌론으로 초청하여 각자 민중의 숭배를 받는 신전 성소를 건립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연회를 열어 엔릴, 엔키 같은 원로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위신과 정통성을 과시했다.

그래서 이들 신들의 뻔질난 출입으로 바빌론 Babylon은 문자 그대로 '신들의 출입문 Bab-ili'이 된 것이다.

하기야 그 자신 앞서 아누, 엔릴 등 원로들의 회합에서 마음내키지 않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주권신으로 승인을 받았으니 형식상 정통성은 이미 갖추었던 것이다.

마르둑은 드디어 '신들 중의 으뜸 신' (God of Gods)이 되었고 따라서 엔티-마르둑-나부로 이어진 가계를 찬양하는 새로운 신앙이 강조되었다.

마르둑 MAAR. DUK이란 이름은 학자에 따라 '청정한 땅의 아들', '우주의 신의 아들' '찬란한 날의 아들' '빛의 아들', '진정한 아들'로 해석되고 있다.




2천 년간 지속된 우주적인 신들의 시대 대신 국가적인 신이 출현하여 정치와 종교는 더욱 밀접하게 결합하게 되었다.

이렇듯 신들이 너무나 초연하고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자. 왕과 신관들은 변하는 천체의 징조와 예언 같은 것을 신들의 가르침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근거 삼아 국가와 민중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로써 점성술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이때는 바로 2160년간 계속된 '금우궁(金牛宮 Taurus)의 시대'가 끝나고 '백양궁(白羊宮 Ram)의 시대'가 된 때와 일치한다.




아누, 엔릴, 엔키 등 일곱 명의 조요 안누나키가 인간과 지구의 운명을 관장했던 시대는 물러가고 천체의 징조와 예언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 시대가 왔다

(이 7이란 숫자는 명왕성으로 부터 차례로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를 가리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점성술의 시대


수메르 말기에 기록된 '예언 텍스트'에는 주요한 신들이 천체의 징조의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기록하고 잇다.

이런 경향이 더욱 확대되어 바빌론 시대에는 행성들이 합(合 conjunction), 일식과 월식, 달무리, 행성의 12궁도에서의 위치 같은 천체의 변동과 징조가 신들의 가르침 대신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이끄는 지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이런 예언을 전담하는 신관도 생겨났다.

앞서 우르 제3왕조 시대에 기록된 예언은 이러하다.



"달과 목성에 광휘가 둘러싸이면 '아후루'의 군사들이 침입할 것이다.

태양이 그 천정(天頂) 자리에 달하여 어두워지면 이 땅의 불의한 자들이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금성이 마갈궁(磨蝎宮 : 염소자리)에 가가워지면 독기를 품은 바람이 이 땅에 닥칠 것이다.

목성이 새해 시작에 나타나면 곡물의 수확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바빌론 시대에는 행성들이 황도12군의 특정한 위치에 출현하는 현상이 이행성이 가져올 길· 흉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져 특히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더욱 성좌와 별과 각 달(月)들은 여러 신들과 관련된 것으로 믿어졌기에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예컨대 " '아야루'달에 달무리(halo)가 끼는 것이 세 번째 관측되면… 엘람의 왕이 스스로 칼을 맞아 쓰러지리라. …그의 아들은 왕위를 잇지 못하리라. … "하는 것이다.



바빌론에서 발굴된, 12권으로 된 한 문서 텍스트에는 각 특정 달에 무었을 해도 좋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예를 들면 "왕은 다만 '쉐바트'와 '아야루' 달에 신전을 건축하거나 성소를 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바빌론 신이 하루도 한 나절씩 나누어 길흉을 가렸으며, 이로써 시집오는 신부를 하루의 어느 시각에 데려와야 좋은가 점을 쳤을 정도이다.

이런 징조와 예언과 지침이 중요시되자 민간에 12궁도 점성술의 예언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어떤 사람이 병에서 쾌유될 것인가, 임신한 어머니가 건강한 아기를 낳을 것인가, 때가 좋지 않든지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면 어떻게 예방해야 좋을까 하는 것이 그 예였다.

이를 위해 주문을 외우는 것이 유행했고, 심지어 윤기 나는 수염의 빛깔이 퇴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빛의 별'에 기도하며 주문을 외우는 일도 있었다.

이래서 액운을 막아 주는 문구가 새겨진 부적이 생겨나고 또 이것들은 대개 끈에 꿰어 목에 거는 것이었다.

이 부적을 만든 재료가 무엇인가도 중요한 것이었는데, 예컨대 적철석(赤鐵石)으로 만든 것은 '얻은 재물은 쉽게 얻을 수도 있다'는 자중(自重)과 근신을 상징하는 것이고, 라피스 라줄리(청금속)부적은 '세력을 떨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아슈르바니팔왕 도서관에서 2천 장이 넘는 이런 징조와 예언 을 기록한 문서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해몽법이며 기름방울을 물에 떨어뜨려 그것이 풀어지는 모습으로 점을 치는 '기름과 물 예언법'과 신전 희생 가축을 잡을 때 내장(특히 간)의 모습으로 점을 치는 법까지 기록되었다.

수메르 시대에 천문학 이었던 것이 점성술(astroology)로 변질했고, 이것은 또 다시 그 밖의 주술과 마법으로 변질되었다.

천문학은 인간의 이성과 노력으로 이룩한 진정한 과학이었으나. 그 다음 것들은 불안한 시대의 삶을 반영하듯 미신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퇴보하는 과학


왜 이 새 시대(백양궁 시대)에 과학이 이렇게 퇴보된 것인가?

그것은 그 전 2천 년간 시종일관 지속되어 온 신-신관-왕이라는 굳건한 사회의 뼈대가 붕괴되었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곧 백성들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나날의 일과 세상의 사건들이 그런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줄 통치 귀족계층, 신관, 지식인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막강했던 옛날의 신들이 신정에서 사라졌으니 백성들은 그처럼 격동의 시대에 천체의 징조와 유언비어 같은 예언에 의존해서라도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현대 천문학의 기원이 된, 수학원리와 방정식과 계산법과 개념으로 기록된 수메르의 천문학은 바빌론 시대에 이르러 창조력을 잃게 되었다.

더욱이 바빌론 제1왕조 창립 이후 1천 3백 년이 지난 서기전 5세기 이후 그리스인들이 찬탄하고 선망했던 서기전 800년경의 칼데아(신 바빌론니아)의 천문학조차 수메르의 그것과는 먼 것이었다.

이 수메르 이후 '새 시대'는 새로운 진전이라곤 거의 없는 과학의 공백기였다.

저명한 오리엔트 학자 오토 뉴지보어 Otto Neugebauer 교수는 《고대의 진정한 과학 The Exact Scence in Antiquity》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수학이론이 실체 관측치와 비교해 본 측면에서 바빌론 천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 관측수치에 근거한 방정식에 의존하지 않고 금성의 궤도 운동 수치를 한 장, 한 장 또 한 장 꼼꼼이 기록한 마야의 천문학 두루마리와 다르지 않게 바빌론의 천문도표도 태양, 달과 눈에 보이는 행성들의 예정된 위치들을 극히 정밀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바빌론의 경우 이 천체 위치 조견표(早見表 ephemerides)를 작성함에 있어서 이를테면 월식이 태양과 달의 궤도 속도와 그 밖의 요소에 의하여 50년 뒤 언제 일어날지 계측할 수 잇는 근거가 되는 수학공식 교과서를 가지고 이것에 의거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주의 깊게 계산되어 작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뉴지보어 교수는 《상형문자의 천문학 텍스트》에서 또한 "이 계산 교과서는 진정으로 수학적 '이론'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정밀한 계획 없이 그러한 고도로 복잡한 수치계산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수학이론이 원래 바빌론 이전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지적하며, "결국 바빌론 천체력 작성에 이용된 수학공식 교과서는 이미 그 이전에 완성되어 정확, 치밀하게 기술된 것을 복사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 " 이 천체력에 사용된 계산 단위는 수메르인이 고안한 60진법이었고, 황도대의 성좌, 달[月]의 이름들과 50개가 넘는 천문학 용어는 순수한 수메르어이며, 따라서 바빌론인들은 단지 수메르의 천문학 기록을 배우고 익혔을 따름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신바빌로니아 시대인 서기전 8~7세기 무렵에야 실제 관측의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씌어진 《천문학자의 일기》란 책이 있었는데, 그리스와 페르시아인들이 이 기록으로부터 천문학을 배웠던 것이다.

오늘날 천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옛 바빌로니아인들은 실제로 그 이전 수메르인들로부터 모방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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