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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건설법에 관한 공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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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식탐험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0건 조회 968회 작성일 06-08-0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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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건설법에 관한 공박



피라미드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정점에 위치한 기자지역에 세계최고, 최대규모이면서 가장 정밀한 석조건축물이 우뚝 서있다. 주류고고학계에서도 4천5백여년전에 (비주류학계에서는 5천여년전이전이나 7천5백여년전까지라는 주장도 한다)건설됐다고 인정하는 건축물이다. 쿠푸왕 피라미드는 엄청난 수의 둘과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어졌다.

도대체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정답은 아직까지 그 방법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류학계든, 비주류학계든 정확하게 이런 방법을 썼다, 혹은 이랬을 것이다라는 추측만 난무할뿐, 이렇다 할 힘있는 "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도.

예를 들어 '미라'라든지 다른 소장품 같은 건 연대 측정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방법이 탄소동위원소분석법(라디오카본 데이팅:방사성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으로, 방사성 탄소 14C는 거의 일정한 농도로 모든 유기물에 함유되어 있다. 생물이 죽으면, 새로운 14C가 몸에 공급되어야만 하므로, 그 양은 시간과 함께 반감기에 따라 감소한다. 그 감소량에서 연대를 구하는 방법)이다.

쿠푸왕피라미드 건축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알려진 게 없고, 우리가 이해될 만한 어떠한 정보도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주류학계"와 "비 주류학계"의 주장을 같이 논해보기로 한다.

[읽기전에 알아둘 일]

※ 주류학계 주장의 글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겠지만 , 비 주류학계 주장의 글은 현실에 맞지 않거나 황당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알려지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이니, 어느 쪽의 주장을 믿고 ,믿지 않고는 여러분이 판단하기 바라고, 두 학계의 주장의 방법을 비교해서 논해봅니다.


주류학계의 주장

■ 주류학계의 피라미드 건축법

1. 기초 만들기

피라미드의 완성 후 위로부터의 막대한 하중을 견디기 위해 암반 위에 세워졌다. 건설지에 가로 세로로 수로를 파고, 수면의 높이에 맞춰 지표의 요철을 깍는다. 마지막에 도랑을 메워 암반을 수평으로 한다.

2. 방위를 잰다

피라미드의 네 측면은 거의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올바른 북쪽 위치 측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설지에는 원형의 벽이 만들어지고, 밤이 되면 관측자가 그 중앙에 서서 주극성 안에서 어떤 특정한 별을 선정한다. 그 별이 벽 위에 나타난 위치와 진 위치에 표를 하고, 정확한 남북 방위를 측정한다.

3. 현실을 만든다. 현실이나 통로의 벽에는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돌쌓기와 병행하여 만들어졌다. 현실 천장의 합각머리 모양의 지붕은 현실에 모래를 채우고, 그 모래를 다시 빼내는 방법으로 꼭 겹쳐지게 하였다.

4. 결사로를 만들고 돌을 쌓아올린다. 크고 무거운 석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하는 데에는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든 경사로가 이용되었다(경사로의 형태에 대해서는 나선형 등 몇몇 설이 있다). 기울기가 항상 일정해지도록, 돌을 높이 쌓아올라감에 따라 경사로도 길게 만들었다.

5. 캡 스톤을 끼운다.

6. 화장석을 연마하여 완성. 화장석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깎아서 연마해 간다. 이렇게 하여 번쩍이는 듯한 아름다운 피라미드가 완성된다.


● 쿠푸왕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풍부한 기하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하학의 요람이 이집트임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발달한 이유의 하나로 나일강의 범람을 제시한다. 쿠푸왕피라미드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에 많은 비밀이 간직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당시의 기술로만 건설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를을 건설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피라미드를 만든 공구를 알아보자.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 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이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은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 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한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석회암은 석화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공구로도 충분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한 예로, 시카고 대학의 레너 교수는 50명도 채 안되는 인원과 3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0.75톤에서 3톤에 달하는 1백86개의 돌로 8층짜리 피라미드를 고대의 연장만으로 건설했다. 즉, 고대인들이 충분히 피라미드를 고대의 공구만으로도 건설할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을 했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 안에 단단한 화강암이 사용됐는데,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도 돌의 형태와 결을 잘 알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석공들은 잘 알고 있다. 화강암이 석회암 보다 단단한건 사실이지만, 화강암은 6각의 얇은 판모양의 운모, 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모양의 장석 등3가지 성분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어, 어떤 때는 화강암이 설탕처럼 쉽게 조각나기도한다.

● 쿠푸왕의 치세가 시작되고 나서 17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높이까지 건조된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5m이므로 완성되기까지는 20여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조의 노동력은 농민이었다. 왕은 나일강의 증수로 경지가 물에 잠기는 시기에 농민을 노동자로 고용한 것이다. 농한기에 식량과 의복, 일을 지급한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실업 정책인 것이다.

● 피라미드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자대지의 단단한 암반 위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5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조는 파라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즉위하면 곧바로 착공을 시작했을 것이다.

우선 건설지가 선정되고, 설계도나 축소 모형도 작성되었다. 장소가 결정되면 우선 기초 다지기부터 시작하고 수로를 사용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하고, 별을 관찰하여 정확한 방위를 측정하였다. 피라미드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국내에서 농민들이 징용되고, 마침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일 강이 증수하여 경지가 물에 잠기게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였다. 노동자들에게는 주거와 의복, 식사가 제공되고, 피라미드 건설은 농한기에 실시되는 국가 사업이었다. 또 나일 강 수위의 상승은 석재를 운반하기에 적합하였다.

피라미드의 건재는 주로 석회암이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스완산 화강암도 사용되었다. 석회암은 기자 부근의 투라에서 좋은 질의 것이 채굴되었다. 대 피라미드는 약 270만개로 어림되는 석재를 사용하였다. 돌을 파 내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청동제의 끌과쇄기로 돌을 파내고, 현장에 운반되고 나서 모양이 다듬어 졌을 것이다.

석재의 운반에는 나무로 만든 썰매가 사용되었다. 돌을 어떻게 해서 쌓아 올렸는가는 피라미드의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데, "람프"라는 경사로를 이용했다는 것이 유력한 주장이다.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진 람프에는 썰매가 잘 미끄러지도록 석고를 뿌리거나, 역레일을 만드는 등의 고안이 되어 있었다. 썰매에 실린 석재는 기울기 10분의1(10m 에 1m 오르는 기울기)의 경사로로 운반되고, 위치를 결정할 때에는 산륜이 사용되었다. 기울기는 항상 일정하게 되도록, 높이가 높아지면 경사로의 길이도 연장된다. 내부의 구조도 돌을 쌓아올리면서 만들어 나갔다. 정상에 캡 스톤을 끼우면,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쌓아올린 석재를 발판으로 하면서 단을 깎고 표면을 연마하여 마침내 피라미드를 완성시킨 것이다.

여기까지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가장 현실적인 피라미드 건축법이다. 하지만 이 주장도 최근에는 근거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인정하지 않는 추세이다.


비 주류학계의 반박

● 많은 고고학자들은 당시가 절대왕권 체제로서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시간을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의 건축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요점은 석기와 간단한 청동기 도구로 석회암을 채굴하고, 통나무와 지렛대, 그리고 윤활유를 사용해서 돌을 운반했으며, 완만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상부까지 건설해서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가능할 것 같아도 건축의 규모를 헤아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주류학계에서는 왜, 피라미드의 건축자인 파라오 쿠푸가 암석을 사막에 있는 공사장으로 운반하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원래는 그 지역에 천연의 암벽 협곡이 있었는데 거대한 공사로 인해 암석을 다 써 버렸다는 것과, 궁색하긴 하지만, 파라오가 여름 궁전에서 작업이 진척되는 것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힘으로, 어떤 "기계"와 기술을 사용하여 암석층을 수평으로 다듬었을까? 어떤 방법으로 건축가는 갱도를 파나갔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갱도 안에 불을 밝혔을까?(주류학계의 방법대로 밑에서부터 건물 외벽과 안에 있는 현실을 같이 쌓아 올렸다고 하지만 어느정도 진척후에는 갱도 안의 내각을 맞추거나 갱도 앞에서 뒤까지의 길이를 직선으로 맞추려면 작업을 갱도안에서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암석 묘지에서도 횃불이나 그 어떤 유사한 조명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더럽혀진 천장이나 벽도 없고, 그런 흔적이 제거됐을지도 모를 최소한의 증거조차 없다. 260만 개의 거대한 석재가 채석장에서 잘라지고 연마되어 운반되고, 건축부지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맞추어졌다.

피라미드를 세울 장소는 파라오가 마음대로 결정했으며, 피라미드의 비교할데가 없는 크기는 건축가에 의해 우연히 떠올랐으며, 몇 십만 명의 인부들이 12톤이나 되는 무거운 석재를 (지금은 없는) 밧줄로 (지금은 없는) 미끄럼 틀을 사용해 경사면 위로 밀고 당기고, 수많은 인부들이 (지금은 없는) 곡식으로 연명했으며, 파라오가 여름 궁전 앞에 짓도록 한 (지금은 없는) 오두막에서 잠을 잤고, (지금은 없는) 확성기로 140m 여미터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인부들에게 "영차 영차" 소리를 내어 인부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12톤짜리 석재를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리게 하고, 인부들이 날마다 10개의 석재를 쌓아 터무니 없는 도급일을 달성 했을까?

만약 이런 식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면, 20년은 고사하고, 약 250,000일(684년)에 걸쳐 대충 250만 개의 석재를 그 멋진 피라미드에 쌓아 올렸을 것이다.

● 방위각 즉, 정확한 북쪽을 별의 움직임으로 측정을 했다.? 눈대중으로 어떻게 0.몇%의 오차를 극복했을까. 네모난 석재를 도르래로 이동시켰다고 한다(그것도 나무도르래로). 하지만 그 당시 이집트에서 주로 자라던 몇 그루 안 되는 종려나무를 벌채해서, 그것을 가공해 미끄럼 도르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려나무의 열매는 식량으로 꼭 필요했고, 그 줄기와 잎은 말라 버린 대지에 그늘을 제공하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에서는 나무 도르래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피라미드 건축에 관해 가장 뻔한 공학적 설명조차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수입한 것일까?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하려면 상당히 큰 선박이 필요하며, 선박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카이로까지 나무를 운송해야 했을 것이다. 육지에서는 어떻게 운송했을까? 역시 도르래로 밀면서? 그럼 말과 마차로 옮기지 않았냐고? 말과 마차가 이집트에 도입된 건, 기원전1600년, 제17왕조 때 일이다.

● 주류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절대 군주가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나일강 건너 수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굴림대, 로프, 나무썰매, 뗏목 등을 이용해서 이 돌들을 20여 년 동안 운반해 쌓았을 것이라지만, 이런 거석들을 1톤당 몇 명이 며칠 걸렸을 것이라는 식으로 산술적인 계산을 하여 책상 앞에서 상상만으로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고고학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토목 공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토목 공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피라미드는 노예나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불러다가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효율적인 관리 체계와 고도의 기술이 제공된 아래에서 매우 숙련된 노동력이 투입된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굴림대, 나무 썰매, 뗏목, 버팀목 등을 만들어 조달하는 인원이 필요한데, 어림 계산으로도 족히 10만 명은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목재들을 주변에서 절목해 운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원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피라미드로 돌을 운반하기 위해 10:1 의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석재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든 석재의 7배 이상이나 된다. 보조 석재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어쨌든 추가로 최소한 두 배의 인원이 더 있어야 한다. 또, 이들 전부를 먹이기 위한 식량 조달, 운송, 요리사들, 그리고, 그들을 재우기 위한 숙박 시설의 건설자들, 피복의 조달자들, 총무, 노무, 재무관리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소요된 인원은 적어도 5배가 넘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얼마나 충분한 목재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주변에 충분한 목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를 먼 곳에서 운반해와야 하는데 이는 돌의 운반에 못지 않게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돌의 무게가 평균 2,5톤 정도인 것으로 보고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2.5톤은 제일 작은 돌의 무게이며, 이보다 더 무거운 돌들이 피라미드 내부 곳곳에 사용되었다. 특히 왕의 현실로 알려진 곳을 구성하는 개당 70톤에 이르는 100개의 석재는 다른 작은 돌들과 같은 석회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다.

주류학계에서는 피라미드가 단단한 지반위에 건설됐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600만 톤이 넘는 초거대건축물이). 지반침하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1878년 영국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이라는 애칭이 붙은 186톤짜리 오벨리스크를 영국의 런던으로 옮긴 일이 있다. 맨 처음에는 이 첨탑을 국회의사당 앞에 세우려고 했으나 그곳의 지반이 약하여 탑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다는 조사 결과에 따라 현 위치인 임뱅크멘트(Embankment) 로 옮겼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의 총무게는 이 첨탑의 3만배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침하된 정도는 5mm 정도라고한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대형 빌딩에 적용하는 지반 침하 기준인 100년간15Cm 와 비교해보면 그 건축 연대를 고려할 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임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의 예로는, 63빌딩이 건축되고 한동안 주변 지역의 지반 침하로 민원이 쇄도했었다. 또,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누구라도 아는 일이다. 삼풍백화점은 부실공사였다는 것을 다들 알고는 있지만 아무리 부실공사라고 하지만 주류학자들의 말대로, 원시인이었던 5000년전의 이집트인들보다 더 원시인이란 말인가. 삼풍건물 설계자들이? 그건 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전세계의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건축회사들에게 "대피라미드" 정도의 초거대건축물을 어떤 지역에 만들라고 주문 한다면 정밀한 주변 지반 조사와 거기에 맞추어 그런 설계도를 자신있게 제시할수 있는 회사가 과연 몇 군데나 될까? 오늘날 지어지는 일반적인 건물의 건축에도 1% 정도의 훨씬 큰 오차가 적용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는 0.몇몇 % 이하다(못믿겠다면 여러분의 근처에 건축공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건설쪽으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의 직각의 오차가 몇% 까지가 규정이냐, 아니면 건물전체의 공차의 규정이 몇 %가 한정치 인가"라고 물어보라).

일본의 돈많은 어느 재력가가 축소판 피라미드를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설계 초기에 포기한 일이 있다.(시카고 대학의 레너박사팀은 모형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며....? 어떻게 된거야..?) 그러나 레너 교수는 초소형 피라미드를 만든 것 가지고 이런 말을 단정적으로 말할 자격이 없는 듯하다.

대피라미드에는 무려 70톤이 넘는 돌들이 많이 사용된 반면, 그는 고작 최대 3톤 정도의 돌들을 사용했을 뿐이다. 대피라미드가 230만 개의 돌로 140m 높이의 거대한 건축물인데 비해 그는 수미터에 불과한 모조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레너 교수는 이런 모형을 만드는데, 굳이 맘모스급 건축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건축공학적인 고려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서 어떻게 그 옛날 대피라미드가 몇 번의 실습을 통한 노하우 축적으로 충분히 재현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류 이집트학자들은 대피라미드가 건설되기 100년 전부터 피라미드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소형피라미드 건설부터 시작해 점점 건축 노하우를 쌓은 후 마침내 기자의 거대 피라미드군을 건설할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대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100년 남짓 동안 일대 기술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처음 자그마한 몇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동안 측량학, 지질학, 건축, 운송, 의료, 자원개발 등에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지 않고는 이런 초대형 건축을 시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 공사 자체는 당시 한 국가의 사회, 경제 문화 체제 전부를 좌우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쌓인 노하우는 문명의 발전에 어떤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정도로 지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피라미드 건설후 그 찬란한 문명은 도대체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단 말인가.?

기자의 대피라미드는4왕조 때 건설되었다. 그렇다면 5왕조 때는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더 거대하고 더 정밀하고 더 완벽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5왕조때의 피라미드는 지금 현재 그 형상을 원래대로 간직한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기타 관련자료

- 스핑크스의 침식흔적에 관한 자료

기자의 세 피라미드 중에 가운데 있는 카프레왕 피라미드와 연결된 하안신전, 그 신전옆에 스핑크스가 있다.

스핑크스의 머리부분은 파라오,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집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스핑크스 중에서 가장 크다. 전체 길이는 57m, 높이는21m, 석회암으로 되어있다. 완성 당시에는 전신에 채색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무덤의 수호신이며 동시에 제단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스핑크스에는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것과,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가진 두가지 형식이 있다.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토테미즘Totemism(동물이나, 특정 대상을 조상으로 인식하는 관념)에 따라 표현되어 마스타바,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신전과 궁전의 내부에다 입상으로 안치 했고,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신과 사람을 동격으로 보는 관념Anthropomorphism에 따라 신전참도(Dromos) 양측에 노변 스핑크스로 나열시키거나 피라미드와 독립시켜 대형화시켰다.

노변 스핑크스로 유명한 것은 카르낙의 아몬 대신전 경내에 위치한 콘즈신전에서 룩소르의 무트신전까지 4.2km 거리에 이르러 정면 파일론 앞에 있는 것으로 수도 양측 노변에 각각 20기 씩 총 40기가 있는데, 양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한 형태이고, 람세스2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기자에 있는 인두사자신의 형태를 한 대스핑크스는, 카프레왕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스핑크스는 아랍어로 '아불 하울' 이라고 불리며, 이는 '공포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처음 발견당시에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아랍군의 침입 후에는 코가 깎여 나갔고, 영국군에게는 수염이 뽑혀 나갔다. 지금은 공포의 아버지로 보이기보다는 측은한 경애심이 생길 정도로 되어있다. 스핑크스의 수염은 지금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것이 신비롭고 미스테리이지만, 스핑크스만큼이나 신비에 쌓인 것도 드물다. 그 신비중에 가장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바로 스핑크스의 연대측정이다.

스핑크스의 건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아직까지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학자들 마다 연대측정이 다른데, 일부는 기원전 2400년전 카프레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제3왕조 시대의 종교도시 " 헬리오폴리스" 의 태양신의 예배소의 하나로서 그 영지의 경계에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3왕조때 세워졌다는 주장의 근거는,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는 바닥면과 카프레 왕의 "하안신전"의 바닥면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나, 양쪽 모두에 사용되고 있는 석재의 생산지가 다르다는 점, 카프레 왕의 참배길이 의도적으로 스핑크스를 피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점들의 근거를 들어, 4왕조 이전에 세워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보스턴 대학의 저명한 지질학자가, 스핑크스의 제작연대를 기원전 8000년 이전이라는 주장을 해서 주류학계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기원전 8000년 이전이라는 근거는, 스핑크스의 몸에 있는 가로로 난 "홈" 이, 물에 의한 침식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는 바닥면이 주위를 깎아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과, 깎인 부분에 생긴 절벽에 무수한 세로 도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로 도랑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리면서 생긴 것이고, 그 정도 홈이 생기려면 홍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핑크스가 홍수가 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이 지질하자의 주장이다.

그럼 홍수는 언제 났는가?

스핑크스의 거대한 몸이 잠길만큼, 이렇게 큰 비는 언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10000년 이상 전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최근 지질학자의 주장이다. 분명히 지금부터 1만 년 또는 1만 1000년 전쯤에 빙하기가 끝나고, 홍수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신전말고 이와같은 거대한 상을 만들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화적 관점에서의 이론도 없다. 또, 빙하기가 끝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도 없다.

다른 학자는 빙하기 이후 온난기에 큰 비가 내렸다고 생각하는 고 기상학자도 있다. 실제로 중왕국 시대에는 지금의 사막은 더욱 뒤로 후퇴되어 있고, 그 곳에는 녹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언제 만들어 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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