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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피라미드에 대한 근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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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1건 조회 835회 작성일 06-07-27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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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01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한 진정한 연구는 알 마문이 피라미드에 들어간 후 8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물론 중세 시대에도 유럽인들의 이집트 탐험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이집트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여행 여건을 감안하면 단편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피라미드 속에 있다는 보물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 출발한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후부터 11세기까지의 500년간 서유럽은 대체로 암흑 시대였다. 오랜 세월 동안 특별한 접촉이 없었던 서유럽과 아랍 세계는 12세기에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접촉한다. 이 시기에 동양에서 발명된 제지법, 인쇄술, 나침반과 같은 중요한 기술이 아랍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특히 나침반의 전래는 원양 항해에 대한 욕구가 드높였고, 부수되는 과학적 연구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해 항해와는 달리 먼바다로의 항해에는 천체 관측과 해도(海圖)가 필요하므로 정밀한 천문학적 지식과 지리학, 배 위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구의 개발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도입되면서 활과 칼을 이용하여 전투를 하던 유럽의 기사 계급이 몰락한다. 또한 화약과 대포는 중세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 체계를 변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포는 탄환의 폭발 현상, 탄환의 비행 문제 등을 계산하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열어 놓았다. 화약의 폭발을 설명하기 위해서 화학과 물리학이, 폭발력의 연구에서 증기 기관의 아이디어가, 포신 제작을 위해서 제철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탄환의 운동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동력학이 등장했고, 이것은 수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과학 기술이 발달되고 있음에도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도 적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게와 길이에 대한 정확한 기준과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기본 단위가 적혀 있을 고문서들을 뒤졌다. 자연스럽게 이집트에 건설되어 있는 신비의 피라미드가 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대 피라미드야 말로 그들이 찾고 있는 도량형의 척도라고 생각한 것이다.17세기에 살았던 영국의 수학자 죤 그리브는 다소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후에 런던 그레삼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기하학을 가르친 정통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책에 기재되어 있는 지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그 당시 과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측량의 단위를 직접 찾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대 피라미드를 연구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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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브는 매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우선 대 피라미드를 연구하기 전에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로마의 유적들을 측정한 결과, 로마 시대의 피에(pied)가 영국의 피트(foot)보다 더 짧은 뿌스(약 27mm)였음을 발견했다. 여기에 자신을 얻은 그는 이집트의 기자를 방문했다. 고대 그는 이집트인들의 측량 단위를 발견하고자 알 마문에 의해 강제로 뚫린 개구부를 통하여 쿠프의 대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다.그는 왕의 방과 석관을 상세히 측량하였다. 석관이 6.48피트의 길이를 갖은 것을 볼 때 사람의 크기가 변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그는 대회랑에서 좁은 수직 구덩이를 발견했는데, 이 구덩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쿠프의 미라를 안치시킨 후 대 피라미드 외부로 탈출할 때 사용한 통로라는 것이 정설이다. 즉 도굴꾼들을 막기 위한 통로 봉쇄용 돌덩어리를 정해진 위치에 안치시킨 후 작업 인부들 모두가 안전하게 외부로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브는 이 통로를 끝까지 탐험할 수 없었다. 박쥐와 희박한 공기 때문에 18미터까지 내려간 후 중도에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피라미드의 높이와 토대를 재면서 연구를 마친다. 그가 측정한 피라미드의 높이는 481피트(146.30미터), 토대 측면은 693피트(211미터)로서 추후에 확정된 정확한 측정치보다 거의 20미터나 짧다. 본국으로 돌아와 그는 『피라미도그라피아』라는 책을 출판했다. 비록 원래 목표했던 도량형의 근본적인 단위는 찾아내지 못했으나 그가 발간한 작은 책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명한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그가 이집트 연구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798년 7월에 나폴레옹의 군대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 부근에서 맘루크족을 정벌한 후 프랑스 학자들에게 대 피라미드의 비밀을 파악하도록 요청한다. 학자들은 대 피라미드 앞에서 1세기 반 전에 그리브가 가졌던 의문들을 다시 제기했다.
그들 중에서 젊은 공학도 후랑스와 죠마르는 당시 혁명 국가 프랑스에 의해 채택된 ‘미터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피라미드의 크기를 측정했다. 당시 프랑스는 새로운 미터 단위로 1미터를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1/4의 10,000,000분의 1이라고 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죠마르와 그의 동료들도 피라미드 내부 탐사를 포기했다. 그리브와 마찬가지로 박쥐들에 의해 생긴 거대한 구아노 때문이었다. 어느 대령은 ‘이 동물들은 우리를 할퀴고 그들의 냄새로 우리를 질식시켰다’라고 증언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피라미드의 통로는 박쥐들의 거처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경사면은 매우 미끄러워 위험하였다.
학자들은 내부 구조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의 외부 구조와 형태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북서쪽과 북동쪽에서 수많은 모래와 석고 부스러기를 치웠는데 바위 속에 뚫린 직사각형의 빈 공간 2개를 발견하는 개가를 얻는다. 이 발견은 그들의 연구를 획기적으로 전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피라미드가 건설된 후 언젠가 사라졌지만 최초의 모서리 돌들을 끼워 넣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이 두 개의 측량 지점을 제공했으므로 피라미드 토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죠마르는 밑변의 한 측면을 측정하기 시작하여 230.90미터를 얻었다. 그는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갔지만 최상단부는 잘려 있었다. 죠마르는 꼭대기로부터 투석기를 이용, 밑변으로 돌을 쏘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다시 내려와 돌덩어리 하나 하나의 높이를 인내심을 갖고 측정하여 대 피라미드의 총 높이가 146.60미터임을 알아냈다. 이 두 개의 숫자로써 피라미드 경사가 51.19 분임을 계산해 냈고 그 변심 거리가 184.70미터임도 알아냈다.
죠마르는 꾸데라는 단위에 집중했다. 헤로도투스는 스타드(180∼190미터)라는 단위가 400꾸데와 같다고 했다. 죠마르는 변심 거리를 통해 얻어진 길이를 400으로 나누어서 1꾸데가 0.4618미터임을 밝혔다. 다른 한편 그리스의 다른 학자들은 피라미드의 4면 밑변 중 한 변이 500꾸데로 측정된다고 밝혔다. 1꾸데가 0,4618(현재는 일반적으로 약 50센티미터로 추정)이므로 500배를 하면 총 230.90미터가 되는데 이 길이는 피라미드의 밑변 길이와 정확히 일치된다.
고대의 기본적인 측정 단위 중 하나인 스타드(stade)는 600피트의 길이를 갖고 있다. 죠마르는 이 길이가 지구의 원 둘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죠마르는 이집트인들이 지구의 크기를 알고 있었고 또한 지구 둘레를 추론하였으며, 그들만의 거대한 측량 단위를 갖고 있었다고 추측했다.그러나 불행히도 죠마르는 불안정한 모래 사막에서 어림잡아 측정한 수치였기 때문에 왜곡될 가능성이 많았다. 피라미드의 4면 경사진 곳으로 모래가 밀려와 쌓이므로 피라미드의 밑변 부분을 측정하기 위해 모래를 걷어내는 작업만 해도 대단한 공사였다.그러므로 죠마르의 동료학자들간에 바닥과 높이를 측정한 데이터가 서로 달랐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문제점은 다른 어떤 고대 이집트의 유적 건축물에서도 죠마르가 제시한 꾸데의 단위가 도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절대 단위 척도를 이집트에서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원정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프랑스에서 24권에 해당하는 자세한 잭을 출간하였다.
수학자 몽즈도 이 원정대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는 피라미드의 체적이 2,600,000세제곱미터나 되며 이것으로 프랑스의 국경을 3미터의 높이에 0.3미터의 폭으로 둘러 쌀 수 있는 양이라고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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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에 의한 프랑스 과학자들의 파견과 이에 따른 자료들의 발간은 유럽에 있어 이집트에 관한 흥미를 폭발시켰고 곧바로 흥미 차원을 지나 신드롬 상태로 발전한다. 고고학자들 상호간에 미라, 조각, 오벨리스크에 관한 논쟁이 붙었고, 화가들은 그림의 배경으로 이집트의 각종 풍물을 그렸다. 황실의 재봉사도 이집트 문양을 사용했으며 장인들은 가구에 스핑크스와 악어를 조각했다. 영국 해밀톤의 10대 공작 알렉산더는 스스로 미라가 되었다. 미국 역시 그 물결을 타고 테네시 주에 하 이집트의 수도인 ‘멤피스’라는 도시가 생겼고 1880년에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장식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오벨리스크를 수입했다.

피라미드’라는 주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더욱 유행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도입되는 과도기에 전통적인 연구 결과를 위협하는 시도도 동시에 이어진다. 피라미드라는 유적은 이 세상에 조물주의 신통력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기자이며 비평가인 죤 테일러였다. 신앙심이 깊은 데다 교육을 많이 받은 테일러는 성서는 물론 수학, 천문학, 문학에 정통하였다. 서점 점원으로서 출발한 그는 1820년에는 『런던 매거진』의 편집부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한 번도 이집트에 방문한 적이 없지만 피라미드를 취급하는 전문 상점을 개설하여 그의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피라미드가 단지 무덤이었다는 가설에 반론하고자 죠마르와 다른 학자들의 자료를 조사했다. 놀랍게도 그는 피라미드 둘레를 2배의 높이로 나눈 몫이 π(3,14159……)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단위는 원둘레를 측정할 때 사용된다. 이 발견은 그에게 더욱 큰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의 건축가들이 이 π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들이 다른 수학 지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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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피라미드 건축가들이 지구 둘레뿐만 아니라 적도에서 북·남극에 이르는 거리 또한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피라미드에 π 단위로 적용한 결과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알고 있는 지구에 대한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피라미드는 무덤의 기능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가 고대 이집트인들이 π를 비롯한 수학적 지식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원시 시대나 다름없는 이집트 제4왕조 시대에 건설된 피라미드가 이집트인 스스로 축적한 건축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집트인들이 갖고 있는 고도의 지식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초기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높은 지적 능력의 일반적인 존재물은 높은 단계에서 전수된 것이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실 때 그 지식과 기술을 그에게 주신 것처럼 이집트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지식을 전수했다’라고 주장하였다.
테일러는 1859년에 78세의 나이로 『위대한 피라미드 왜 지어졌는가? 누가 지었는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의 책은 무자비한 혹평을 받았다. 피라미드를 신의 계시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커다란 반발을 받아 영국 왕실에서는 피라미드라는 주제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 것조차 거절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주장은 스코틀랜드의 천문학자인 플라찌 스미드라는 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스미드의 사회적인 배경이나 학식은 테일러에 비견할 정도가 아니었다. 우선 그는 해군 제독의 아들이고 첫 번째 유성을 발견한 유명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크루세프 플라찌의 대자(代子)였다. 그는 26세이라는 젊은 나이에 천문학 분야에서 확고한 명성을 차지하고 있었고 12년 후에는 광학에 관한 연구로 모든 학자들이 선망하는 에든버러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테일러의 책을 읽고 스미드는 ‘피라미드의 신비’에 관한 학문이 다른 학문에 비해 경시를 당하고 있으며 그에게는 이를 살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미드는 종교적 측면은 물론 과학적인 분야까지 거의 맹목적이라고도 할 정도로 테일러에 공감하였다. 그는 피라미드의 기본 길이의 척도는 ‘피라미드 뿌스’로 신성한 꾸데의 1/25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주창하고 있는 미터 단위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근거로서 영국 과학자들에 의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성경에 기술된 내용과 영국간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프랑스에서 만든 미터법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의 주를 이루는 앵글로색슨 민족이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스러운 후계자라는 생각도 팽배하여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증거를 찾는데 열심이었다. 결국 스미드는 열렬한 국수주의자로 변모한다.
1864년 말, 45세의 유명한 천문학자 스미드는 부인과 함께 테일러가 하지 못했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출발한다. 그는 스스로 피라미드를 정확히 측정하여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인 사진기를 휴대하였고 기자에 도착하여 절벽 근처의 버려진 무덤 안에 캠프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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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드는 대 피라미드 정상에서 천체를 관측한 후 대 피라미드가 북위 30도 정도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춘분 때에 대 피라미드의 그림자가 사라지는데 스미드는 이것을 대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이 고도의 천체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대 피라미드 외부를 측정하여 π의 소수점 다섯째 짜리(3.14159)까지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테일러와 마찬가지로 스미드도 대 피라미드의 구조 안에는 고대 과학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크기는 ‘지구에 살아 있었던 어떤 인간이 시도했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감탄스럽다’고 주장했다. 테일러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미드는 피라미드가 길이의 척도뿐만 아니라 시간의 척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건물의 둘레를 피라미드의 뿌스로 표현할 경우 정확하게 일년을 의미하는 365.2의 100배라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당연했다. 스미드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과학 기초’보다도 이미 5,000년 전에 물리학에 있어 전능자의 은총에 의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도의 건축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대 피라미드의 유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직 신만이 대 피라미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대 피라미드에 의해 나타나는 측량 지식과 증거는 특별한 의도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며 대 피라미드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표현하는 도구라고 확신했다. 이 거리는 뿌스에 109를 곱하였을 때 얻어지는데 9/10의 비율은 피라미드의 높이와 폭에 대한 비이다.두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예수 탄생의 날짜가 왕비 방의 바닥에 나타나 있으며 대회랑의 입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쪽의 십자가가 기독교인들의 시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또한 피라미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물론 이 땅위에 메시아의 재림일자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천재 지변, 전쟁, 지구의 최후 등 모든 계시를 피라미드의 복도와 현실 등을 측정함으로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스미드에 의하면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는 해는 1979년이었다.

당시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를 만든 날짜를 기원전 4004년으로 보고 있었다. 1650년에 아일랜드의 대주교 어셔가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토대로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 26일 아침 9시에 창조되었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10,000년 전에 살았던 이집트인들이 기독교를 알 수는 없는 법이며 특히 대 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의 이집트인들은 신의 숫자가 무려 700이나 되는 다신교였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스미드의 책은 독특한 문체로 인해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동료 과학자들을 납득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집트 학자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고, 에든버러 왕립학회는 그의 가정을 ‘연약한 여자들이나 믿을 만한 신빙성 없는 환상’이라고 단정했다.한 미국 학자는 숫자를 곱하여 어떠한 사실도 증명할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적정 척도를 만들어 런던과 미국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소도시와의 거리를 확인할 수 있고 수많은 거리까지도 심지어는 물고기의 평균 무게를 잴 수 있다’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테일러와 스미드에 대한 이러한 비평이 오히려 피라미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피라미드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깊이를 더해 갈수록 그 안에 숨겨진 정신적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877년에 미국인 목사 죠셉 세이스는 피라미드가 ‘크기, 무게, 각도, 온도, 지형적 문제 등 수치상의 커다란 체계’를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세이스는 피라미드에 5가 특별히 강조되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피라미드는 5개의 각과 바닥을 포함하여 5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손가락, 발가락이 각각 5개씩 붙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피라미드의 1뿌스는 1꾸데의 5배의 5배이다.그의 대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대 피라미드에서 교차하는 위도와 경도는(북으로 30도, 동으로 31도) 이 땅 위의 어떤 것보다는 더 확실하게 대 피라미드의 위치를 나타낸다. 그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선정하여 이 엄청난 건축물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대 피라미드를 신적인 영감에 의한 작품으로 간주하는 일부 광신자들의 주장은 마침 발표된 ‘종의 기원’을 신봉하는 진화론자들과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야기했다. 스미드와 그의 제자들은 기원전 4004년에 인간을 창조한 신적 존재의 부정할 수 없는 방법을 증명했다. 그 증명 방법이란 인류의 조상은 숲 속에 살고 있었던 원숭이와 같은 영장류가 아니라, 신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면서 건축물에 일찍 눈을 뜬 예술가들이라는 것이다.

과학자들과 접신론자(接神論者)들의 논쟁이 가열되자 이 논쟁을 종결시키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 피라미드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찾아 대 피라미드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1880년에 26세의 영국인 윌리엄 매튜 프렌더 페트리(William Mattew Flinders Petrie)는 대 피라미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수많은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이집트로 떠났다.피라미드의 규모에 관한 모든 치수는 이집트 정부가 1925년에 최종적으로 내놓은 보고서를 제외하고는 페트리의 것이 가장 정확했다. 4면의 길이에 대한 최종 보고서와 페트리가 측정한 숫자와의 오차는 고작 21센티미터였다. 그가 측정한 피라미드의 크기는 남쪽 230.45미터, 동쪽 230.39미터, 서쪽 230.36미터, 북쪽 230.24미터이며, 높이는 146.60미터로 확인되었고 기울기는 51도 52분였다.
그러나 접신론자들의 반격은 거셌다. 페트리의 과학적인 반론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 연구가들의 각종 이론은 20세기에 새로운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영국의 기술자 다비드 데이비슨은 처음에는 무신론자였으나 25년 후에 열렬한 신자가 되더니 대 피라미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내 놓았다. 그는 스미드의 이론과 페트리의 이론을 결합하여 피라미드를 평면 상태뿐만 아니라 약간 굴곡이 있는 내부도 고려하여 새로운 인자(factor)를 만들었다. 그는 페트리는 피라미드 외부의 외피에 대하여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미드가 주장한 내용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 피라미드가 특정 숫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그의 할아버지 매튜 프렌더 대위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을 통해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고, 테일러와 스미드의 저서에 매료된 그의 아버지 역시 열정적인 피라미드 연구가였다. 그는 피라미드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량 기구를 제작하는 데 20년을 투여했다. 그의 장비는 실제로 대 피라미드를 측정하는 데 아주 효율적임이 추후에 판명되었다. 어린 페트리도 13세 때 이미 스미드의 책을 읽고 치수가 갖고 있는 단위에 매료되어 측량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페트리는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대 피라미드를 측량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전 준비 작업을 위해 스톤헨지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건물을 꼼꼼하게 측량하였다. 그 후 어느 정도 측량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이 든페트리는 이집트로 향했다.
그는 쿠프의 대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케프렌, 미케리노스 피라미드도 측정하였다. 그는 열기와 먼지가 가득한 피라미드 안에서, 관광객이 떠난 밤에 발가벗고 작업을 했다. 페트리는 피라미드를 측정하면 할수록 건축물의 길이와 각도의 정확성에 놀랐다. 106미터 직선임에도 겨우 6밀리미터의 오차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부분의 마감 처리를 세심하게 검토하여 왕의 방 부근의 시공이 다른 부분에 비하여 현저하게 뒤떨어짐을 발견하였다. 그는 당초에 이집트 건축가들이 계획한 것과는 달리 미완성 상태에서 대 피라미드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쿠프가 대 피라미드를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파라오가 죽으면 그의 피라미드 공사는 곧바로 마감되고 미라가 안장된다. 이것이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이다. 새로운 파라오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해야 했기 때문이다.쿠프의 대 피라미드가 완공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의 현실이 쿠프의 진정한 현실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학자들은 이것이 쿠프의 현실이 이미 도굴된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1883년에 출판된 페트리의 저서 『기자의 피라미드와 신전』은 피라미드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진화론자들과 접신론자들의 싸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페트리 역시 피라미드 높이와 π의 관계를 확인했고 이 같은 관계는 파라오의 현실 길이와 둘레 사이에서도 나타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페트리는 스미드의 측정치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주장한 피라미드에 관한 모든 주장이 허구임을 밝혔다. 특히 스미드가 그렇게도 강조하였던 ‘피라미드 뿌스’는 어느 곳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고 또 ‘꾸데’의 길이도 달랐다. 그의 논문에 의해 접신론자들은 진화론자들과의 논쟁에서 참패했음은 물론이다.
고 그럴수록 테일러와 스미드의 이론은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지루한 논쟁은 가드너의 명쾌한 주장에 의해 종지부를 찍는다. 가드너는 미국의 워싱턴기념탑을 예로 들어 죠셉 세이스가 말한 숫자 5에 대해서도 논리 정연하게 반박했다. 이 기념물의 높이는 555피트와 5뿌스이며 밑변은 55피트이다. 창은 밑변으로부터 500피트에 있다. 가드너는 이러한 우연성이 있겠는가 하고 반론을 제시했다.



대 피라미드에 관한 과학적 조사는 고고학적인 실측뿐만 아니라 천문학 분야에서도 수없이 시도되었다. 페트리가 피라미드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있는 동안 일부 학자들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19세기 말, 영국인 천문학자 리차드 프록터는 고대 천문학이라는 명제를 걸고 피라미드 연구에 대한 새장을 열었다. 그는 대 피라미드가 완성되기 전에도 우주 관측소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내부 통로가 정남북향(正南北向)으로 되어 있고 또 26도로 경사지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 피라미드가 천체 관측 장소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는 고대 학자들이 복도 북쪽의 개구부를 통하여 천체 현상을 연구하여 북쪽 하늘의 지도를 만들 수 있었으며 그럴 경우 하늘의 80도를 커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록터의 이론은 1894년에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헬륨을 발견한 노만 로키어가 그의 저서 『천문학의 입문』에서 피라미드와 별에 대해 서술하면서 지지를 받았다. 로키어는 피라미드가 해가 뜨고 지는 방향과 특정 별자리를 향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그는 영국에 있는 스톤헨지의 거석과 피라미드를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약간 뒤에 미국인 리비오 스테시니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천문학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정확한 경도와 위도의 길이를 계산하였다고 발표했다. 경도와 위도는 유럽에서도 18세기가 되어서야 정확히 측정되었는데 이것은 대 피라미드가 세워진지 4,000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쿠프의 대 피라미드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가정은 기원전 5세기의 프로크뤼스가 천체를 관찰하기 위한 용도라고 기록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가설들은 대부분의 이집트 학자들로부터 부정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천체 관측 수준을 볼 때, 겨우 몇 개의 조잡한 천체 기구를 설치하여 별을 보기 위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는 주장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특히 쿠프의 대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케프렌의 피라미드도 대형 기념물인데 천체 관측용으로 두 개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하는 반론에는 어느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프랑스인 화학자 죠셉 다비도비는 1974년에 이집트 건축가들은 대장장이이기보다는 화학자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돌로 만든 피라미드를 분석한 결과 피라미드는 잘라서 만든 것이 아니라 마치 벽돌을 만드는 것과 같이 커다란 돌들을 형틀에 넣어 찍어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이 같은 가설을 토대로 만든 돌을 보여 주었으나 고고학자들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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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머니님의 댓글

마니머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어떤 실험을 했을까? 다비도비의 의견은 이미 틀림이 판정나지 않았나요?이집트 나일강변 채석장이 발견 된것으로 아는데 ...채석도 나무쐐기를 박은다음 물을 부어 나무를 불게 만들어 시간을두고 자연적으로 쪼개 지도록 했다는걸로 아는데...채석장에 나무쐐기를 박았던 자욱이나 아직 잘리기를 기다리던 채석의모습이 남아잇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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