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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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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잡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3건 조회 1,987회 작성일 04-07-0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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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미스테리(인용글-편집)

예전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재미있는 글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너무 심한 유추가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 한번은 이 내용을 연구하는 분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소개합니다.
멕시코 치아파스주에 팔렝케유적이 있는데 여기서 발견된 마야의 왕 파칼의 피라미드는 한국의 장군총과 규모와 모양이 같고 파칼왕의 머리는 가야의 귀족들이 했던 두개골변형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에 멕시코를 방문해서 마야의 피라미드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먼저 한국에서 두곳의 유적지를 답사해보고 떠나야 합니다.
첫번째는 경북 안동시 안동탑과 경남 산청의 산청탑으로 두탑은 만주의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과 똑같은 형식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안동탑과 산청탑이 멀어서 가기 힘들면 서울 방이동에 있는 백제고분을 답사해도 되는데 원형을 많이 상실했으나 고구려식 피라미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피라미드가 고구려에서 출발해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다고 말하는데 일본의 후쿠오카현 구마야마, 오사카의 나라등지에서 흙으로 만든 고구려식 피라미드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고구려식 피라미드)
두번째 찾아볼 곳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으로 그곳 전시실에는 잘 보존 처리된 인골(人骨)이 있는데 그 중 이마가 심하게 납작한 두개골을 볼 수가 있고 이 유골은 가야지역의 경남 김해군 대동면 예안리 시례부락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납작이마 두개골의 골반뼈를 조사한 결과 주인공은 귀족층으로 추정되며 가야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판정합니다. 두개골의 변형은 비단 이 유골만 아니라 10구의 유골에서도 발견됐는데 당시의 어떤 풍습으로 인위적으로 머리를 변형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납작해진 두개골은 머리뼈가 굳기 전인 어린아이때 변형됐을 것으로 가야의 특정한 집단 혹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편두라는 풍습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편두- 이마를 납작하게 하는 두개골 변형)
고구려식 피라미드와 가야의 편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멕시코의 팔렝케유적을 살펴보면
신전은 3개의 방과 벽면에는 6백여개의 마야 상형문자와 그림들로 치장돼 있고 피라미드 무덤속에 6구의 유골이 발견된다.
그 중에는 여성의 유골도 있는데 유골의 가면은 이마가 편두처럼 푹 꺼져 있어서 가야의 편두형 머리와 비슷하고 유골 외에도 왕관을 비롯해 꽃과 목걸이와 귀걸이와 반지 그리고 회반죽으로 화장해서 만든 두개의 두상도 발견됐는데 왕의 얼굴을 기념해 새긴듯하고 역시 편두 이마의 조각상이 있다.
팔렝케유적의 발견 이후 다른 마야 유적지인 과테말라의 티칼에서도 무덤형 피라미드가 발견됐고 1994년에도 또 무덤 피라미드가 발견되는데 마야학자들은 최대의 비문이 발견된 팔랑케 피라미드를 기념해 [명각의 신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팔렝케 유적을 모르고서는 마야문명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이후 마야학자들은 명각의 신전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무덤의 주인이 '방패'라는 뜻을 지닌 파칼왕임을 밝혀냈다. 기록에 따르면 파칼왕은 12세에 왕위에 오르고 80세(AD.683)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구려식 피라미드


파칼왕의 [명각의 신전]과 여러 피라미드들은 한국의 고구려 고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구려식 피라미드는 만주의 집안과 요녕지역 일대에 약 12000여기가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특히 높이 30m에 9개의 기단으로 이루어진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그 규모나 구조가 집안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을 연상케 한다.
파칼왕의 피라미드가 지하에 석실과 석관이 있다면 장군총은 5층 내부에 석실과 석관이 있고 차이점은 파칼왕은 1개의 석관인데 장군총은 부부의 무덤으로 2개의 석관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양 피라미드의 유사성을 비교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신전인데 멕시코 고고학자들이 파칼왕 피라미드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정상에 신전이 세워져 있는 반면 장군총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장군총 꼭대기가 원래부터 빈 공간은 아니었는데 고구려 고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장군총 정상의 돌덩이에 작은 구멍이 일정하게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난간을 꽂는 주공(柱孔)으로 보았고 있다.
건물의 기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피라미드 정상에 모양은 알 수 없지만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밝혀냈다.
이화여대 신형식교수는[장군총 정상에 사당을 짓고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장군총 역시 피라미드 위에 신전이 있다는 것이다.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683년 이후에 건설된 피라미드로 이때는 신라가 중국의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패망시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시기적으로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장군총(3세기 이전)보다는 후에 건설된 피라미드다.
그런데 파칼왕의 피라미드처럼 무덤은 발견되지 않으나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피라미드는 그 건설 시기가 훨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멕시코 최대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펴낸 책자를 통해 메소 아메리카문화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보면 지금부터 4000년전 내지 3500년전에는 멕시코에 옥수수를 재배하는 마을들이 곳곳에 자리 잡았다. 이후 토기와 토우 예술 및 파라미드들이 건설됨으로써 문화가 꽃피게 된다.
멕시코 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전기고전기(BC.1200년~BC.100년), 고전기(BC.100년~ 900년), 후기고전기(900년~ 1521년)로 나누어 문명의 변천사를 기록한다.
따라서 마야문명은 사람들이 착각하듯 메소 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이 아닌 선대문화를 계승한 것이며, 주인공 파칼왕은 바로 마야문명의 대표적 인물에 해당한다.
장소를 이동해 한국의 고구려식 피라미드로 눈을 돌려보면 학자들은 장군총과 같은 피라미드(적석총)는 고구려 초기의 무덤 양식으로 대체로 3세기까지를 그 하한시기로 잡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 피라미드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 기원은 서기전으로 올라가고 고구려는 그 문화를 고조선으로부터 이어 받았다는 게 정설이다. 즉 고구려의 파리미드 장묘제 역시 고조선 문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용마고성 유적에서 약 5000년전에 쓰인 제사용 토단이 발견되었는데 제사용 토단은 한집단이 종교적형태를 갖춘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다.
그리고 장강문명의 기원 연대와 비슷한 또 다른 문명으로 한(韓)민족의 발상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적이 중국의 요녕지역에서도 발견된다.
1986년에 중국 고고학계의 발굴 보고서가 나온 요녕성의 우하량 유적에서 돌로 제단과 흙으로 구운 신상의 머리 부분이 발굴돼 학계의 관심을 모았는데 연대가 BC. 3700년으로 보고있다.
후기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이 유적지에 중국학자들은 홍산문명(紅山文明)이란 이름을 붙였고 홍산문명은 종교의 권위가 뒷받침하는 정치권력이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고대문명으로 간주합니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는[홍산문명은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사와 직결돼 있기에 중국과 일본학자은 그 중요성을 외면하고 있지만 홍산문명와 장강문명 등 새로운 고대문명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이상 황하중심의 동아시아 고대사 인식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홍산문명과 장강문명에서 피라미드의 원형이 발견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홍산문명과 장강문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동아시아인으로 그 문화가 고구려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분명한 것은 동아시아의 피라미드가 멕시코의 피라미드 건축연대보다 빠르다는 점입니다.


가야식 편두   

파칼왕의 편두와 가야인의 편두가 똑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멕시코시티에 있는 국립 인류학박물관을 봐야 합니다.
전시실에는 편두 인골을 전시해두고 있는데 부산대 박물관에 있는 것과 같고 인골 위에는 마야인이 어떤식으로 편두를 했는지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야학자들은 왜 마야인이 편두를 하고 있었는지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편두와 연관된 연구결과를 마야학자인 마이클 코가 주장했는데 마야인은 심령능력 개발에 노력했고 심령능력을 개발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야의 군주는 바이라고 하는 별개의 자아 또는 분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분신은 꿈을 통해 접촉하는 동물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마야도시들의 일정한 건물에는 마야왕들이 <환상의 탐구>를 위한 특별한 침실이 있다]

.이것은 편두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데 일찍부터 영적인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가야의 편두도 영적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것인지를 기록에서 살펴보자.



<삼국지>'동이열전'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遍, 今辰韓人皆遍頭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펑펑한 머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의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 이다]



중국 진나라 때 진수가 역사를 기록하면서 동이족 국가들의 역사와 풍속을 설명한 글로 진한은 고대의 동이족 국가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이 기록은 의심할 여지없이 3세기 경 한(韓)민족의 풍속을 묘사한 것이다.

   

<지증대사비문- 최치원>는

遍頭, 居昧錦之尊, 語襲梵音, 彈舌足多羅之字 ... 宜君子之鄕也

[편두는 신라왕의 존귀함이 었고, 말은 범어를 차용해 썼다 ... 마땅히 군자의 고향이라]



신라말의 학자 최치원이 지증대사비에 새겨놓은 것으로 신라왕이 편두에다가 이상한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서로 반대되는 지역에서 고대에 이와 같은 구전과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마야문명에서 귀족층의 자제들이 종교적의식으로 편두와 신라의 왕이 존귀함의 상징으로 편두를 했다는 기록은 이상한 일치를 보여준다.
이렇게 볼때 베링해를 건너간 먼 옛날의 아시아인종이 두 대륙에서 독창적으로 편두를 했다는 설명보다는 역사시대에 들어서 아시아에 있던 편두형 집단이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직접 문화를 이식했다는 것이 더 논리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의 <용봉문화원류>라는 책에는 중앙 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인 올멕문화는 중국의 은나라가 주나라에 망해서 이동한것으로 보고 있으며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사건도 수집해 발표했다. 1910년 청나라의 외교관 구양경이 멕시코혁명시 죽은 화교에 대한 배상문제를 협의하는데 멕시코 인디오가 찾아와 자신들은 은복포족으로 중국혈통이니 우리를 보호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문서는 정식 외교문서로 대만 외교부 자료보관처에 보관)
이런 사실을 떠나서 놀라운 점은 멕시코 인디오들 스스로 자신들을 중국에서 건너온 은나라의 후예로 자처했다는 점이고 이주한 지 3000년이 됐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우리 고대사를 새로운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제안를 한다 문명전파론자들이 파칼왕의 피라미드가 발견됨으로써 이집트와 멕시코 문명의 연결보다 차라리 한국의 동이문화와 연결시켜 전파론을 연구해 보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출처:cafe.daum.net/sos119end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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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동희님의 댓글

총잡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흥미로운 글이군요,
그러나 꼼꼼히 생각해 보면 어차피 인간이 생각해낸 무덤의 양식이란 오십보백보입니다,
가령 물위에 띄우는 배도 전혀 교류가 없이 동떨어진 지역이었다고 해도 그 형태가 비슷하지요,
용도가 같으면 형태는 비슷해지는것이 인간문명의 발달과정이 아닐까요?
올멕문명이든 마야문명이든 한번이라도 그 사진을 본 사람은 그 문명이 고대한민족이든 중국민족이든 그 어느 문명과 닮았다는 생각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것입니다,,아니 아예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 문명의 독창성과 독특함은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것입니다
돌에 새겨진 그 불가사의한 조각들과 신전들을 보면서 우리와의 연결고리를 찾는건 무척 긴 여행이되겠군요 **

김용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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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생각을 해보면..
무덤양식이 비슷하다는 것은 그럴듯 하고, '편두'란 것도 그럴싸 하지만...
무덤양식이 고구려의 후예를 통하여 건너 갔다는 것이 좀 그렇군요.
그당시 태평양을 건너 가려면 지금 현재의 대양에 적합한 배들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알기로 당시의 한반도에는 우리나라 전통방식의 바닥이 넓고 납작한 배만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건지도 모르죠.)
하여튼 비슷하기때문에 비슷한 문명이거나 하나의 문명에서 갈라져 나왔을 지도 모른 다는 것에는
이해가 가지만, 아직 고증도 없고, 편두와 무덤양식외에는 증거가 될만한 것들이 없으니, 고구려에서 건너간 후예라고 하기는 좀 그렇네요.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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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봉문화설을 뒷받침 하는 듯한 자료군요... 인디오들이 자처했다는 사실은 첨알았는데 진짜라면 용봉문화설의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겟죠.. 용봉문화설은 중국에서 처음 나온주장으로 현재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또 부정하더군요 ㅡㅡ; 역사죽이기의 황제의 나라 답다니까 ㅡ;

진상지님의 댓글

총잡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리나라 학자들은 다 뭐하는거냐 정론이라고 나와 있으면
토달고 게기는 자들이 그렇게 없단 말이냐

이규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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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가설이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연구를 했으면..
아니 우선 그것보다도  빨리 국가에서 고구려 문제나 지원해줬으면 하네요..

박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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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편두 풍습이 마야와 가야에만 있던 것은 아니죠??
에 꼭 둘을 연관 지을 이유가??
그보담도 우린 중국에서 이루어진 여성학대, 전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흥미롭죠?? 어떻게 약 1000년 동안 수억의 인구가 그런 비이성적인 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그게 더 신기하죠?? 그 방범위한 지역과 참여자와 시기..........

김윤식님의 댓글

총잡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용봉문화설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것 같아서 설명좀 해드리겟습니다. 용봉문화설은 중국에 있는 학자들이 처음 제기 한주장으로 중국의 고대국가인 은나라가 우리민족의 국가라는 설입니다. 중국은 용을 수호신으로 믿고 황제들의 옷을 보면 용그림이 있죠. 그게 그겁니다. 중국은 용을 믿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우리나라는 단국이전 쥬신시대부터 봉을 믿었고요.. 조선시대에도 보면 왕옷에 봉그림이 있습니다. 용과 봉의 그림을 같이 쓰죠.. 중국에서 봉을 섬기는 국가는 없었고.. 전부 용을 섬겻습니다. 그런데 은나라는 봉을 섬겻고요... 그것때문에 주나라는 용을 믿는데 은나라를

최재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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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두 풍습은 원래 왕이나 귀족만이 하게 전유물인데 가야 만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두 풍습을 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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