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불사의 사나이 생제르망 백작 (세인트 저메인) > 미스테리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미스테리

불로불사의 사나이 생제르망 백작 (세인트 저메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선장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6건 조회 731회 작성일 15-06-04 07:54

본문

생 제르망 백작, 그는 누구인가?


"나는 현재이며, 과거이며, 또한 미래이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탄생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더욱 젊고 활기차게 변해간다..."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書)-


◆ 클로드 루이 드 생 제르맹 백작(Claude Louis Comte de Saint-Germain) ◆
유일하게 존재하는 생 제르망 백작의 초상화. (작가 미상)



'신비의 사나이" 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18세기의 모험가.

혹자는 그를 입만 살아있는 희대의 사기꾼이라 하고, 혹자는 그를 당대 최고의 신비주의자라고도 하지만, 그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바람처럼 유럽에 나타났고, 마찬가지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불로불사의 영약'과 '현자의 돌'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떠벌리며, 수많은 예언과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매료했다. 그는 '실제로 분명한 마법을 한번도 부리지 않고서도 마법사로 가장해 명성과 돈을 번 흥미 있는 사례'로 손꼽히기도 한다.


● 이름 ●
생 제르망 백작이 그의 본명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본인도 "이 이름은 가명이지만, 내가 생 제르맹을 자칭하는 한, 나는 어디까지나 생 제르맹이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개의 가명을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라츠코치 공, 생 마르탱 백작, 알리에 후작, 쉬르몽의 영주, 웰던 후작(밀라노에서 사용), 몬페라토 후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아이마르와 벨마르의 후작, 벨라마르 백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솔티코프 백작(제노바에서 사용), 쇠닝 기사(피사에서 사용), 차로지 백작(슈벨바흐에서 사용) 등등...


● 탄생 ●
생 제르망 백작의 정확한 출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어 왔다.

첫번째는 그가 1690년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미망인과 그녀가 베이욘에서 만난 아나데로 백작이라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스페인 왕비의 이름은 마리 드 뇌부르라고 하며, 훗날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희곡 작품『뤼 블라(Ruy Blas, 1838년)』에서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두번째는 그가 아이마르라는 이름의 유대계 포르투갈인의 아들로서 1710년에 태어났다는 설, 그리고 세번째는 그가 알자스 출신의 볼프라는 유대인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둘 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퍼뜨린 소문에 근거한다.

가장 나중에 제기된 설은 그가 1712년경에 지벤뵈르겐(Siebenbuergen)에서 트란실바니아의 대공인 프란츠 라코치 2세와 그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 라코치 대공의 아이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감시 아래 자라나게 되었으나, 그들 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사실은 살아있어서, 메디치 가의 마지막 후손에게 맡겨져 이탈리아에서 성장했다.

그는 자기가 어릴 때 수 년간 살았고 그의 아버지가 영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던 작은 마을 산 제르마노의 이름에 착안하여 생 제르맹이라는 가명을 고안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남쪽 나라의 풍경과 햇빛 비치는 궁전들을 언급했는데, 그 기억이 바로 이 시절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어릴 때 헤어진 그의 두 형제들이 각각 성 찰스와 성 엘리자베스에게서 따온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그 성인들의 성스러운 형제인 성 게르마누스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루이 15세가 그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한 것이나, 백작이 자기의 비밀을 맡겼을 만한 사람들이 철석같이 비밀을 지켰던 것도, 라코치 2세와 별로 사이가 안 좋았던 오스트리아 황제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갔을 때의 결과를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밖에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출신이라던가, 헝가리 혈통이라던가, 실은 1561년에 태어났다던가 하는 설도 난무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백작 자신이 스스로 자기 아버지는 비밀기사단원이고 어머니는 밀교의 사제라고 밝혔다고도 하나, 신빙성은 떨어진다.

백작은 1723년에 드 장리스 부인의 어머니인 드 장리스 백작부인과 만나, 자기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자기 모친의 초상화를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조그마한 그림 속의 여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백작부인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의상을 입고 있었다.

"대체 이 의상은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건가요?"

백작은 그냥 미소만 지어보이더니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35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을 살면서 유럽 역사의 여기저기에 여러 가지 신분으로 간섭했다고 믿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프랜시스 베이컨,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먼드 스펜서, 몽테뉴, 로버트 버튼, 세르반테스, 발렌타인 안드레아스, 가발리 백작(Comte de Gabalis) 등이 바로 백작의 가명이라는 것이다.

장미십자회(薔薇十字會, Rosicrucians)의 전설적인 시조(始祖)인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가 바로 생 제르맹 본인이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이다.

또다른 황당무계한 주장에 따르면 그는 5만 년 전에 지금의 사하라 사막이 있는 곳에 번창했던 초고대 문명의 통치자로 태어났는데, 서서히 육욕(肉慾)에 물들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절망하여 그 낙원을 버리고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이후 아틀란티스의 대사제, 선지자 사무엘, 예수의 아버지 요셉, 로마에서 순교한 성자 알반(Alban),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 프로클루스, 캐멀롯의 마법사 멀린, 로저 베이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생 제르맹 백작으로 환생을 거듭하며 역사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 중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스웨덴의 신비철학자이자 기술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가 그의 또다른 모습이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 방랑 ●
이러한 추측보다 더욱 오래되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바로 '방랑하는 유대인'에 관한 전설이다.
이 전설은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동방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을 유럽에 퍼뜨린 것이라고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는 카타필루스(Cartaphilus)라는 유대인 문지기가 있었는데, 그는 나사렛 예수가 재판을 받을 때에도 참석했다.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 고행의 길을 걸어가다가 지쳐서 잠시 쉬려고 멈춰섰을 때, 길 옆에 늘어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속에서 카타필루스가 뛰쳐나와 예수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예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자네는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예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가던 로마 병사들이 카타필루스를 군중들 쪽으로 다시 밀어넣었고, 예수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타필루스는 자칭 메시아라는 사내가 자기에게 내뱉은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십수년 후, 친구들은 모두 늙어 죽어가는데도 자기 혼자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게 되자, 그 유대인 문지기는 예수의 말을 기억해 내고 전율에 온몸을 떨었다.

그는 결국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성직자들은 이런 이야기가 단순히 종교적인 농담에 불과하다며 무시했고, 급기야 이 이야기는 예수를 자기들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니라며 내쳐버린 유대인들이 그 벌로써 나라를 잃고 방랑하게 된 역사를 비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설은 중세를 거치면서 유럽의 민담 속에 편입되어,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13세기에 동방에 갔다온 많은 여행자들이 자기가 카타필루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비슷한 보고가 줄을 지었다.

그리고 각각의 조우(遭遇)는 점점 서유럽과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던 1740년의 어느 날, 검은 비단옷을 입은 무명의 신사가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생 제르맹 백작이라고 칭했다.

그의 특이한 언행과 값비싼 장신구는 파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잘생긴 용모에서 풍겨나오는 유대계의 특징을 보고, 미신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들은 그야말로 방랑하는 유대인 카타필루스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어느 독일 장군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파리의 사교계에 드나들게 되었다.

● 인물 ●
생 제르맹 백작은 '중간 정도의 키에, 탄탄하게 단련된 몸매를 지녔고, 놀랄 만큼 간소하게 차려입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드 오세 부인(Madame de Hausset)이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방문하는 그의 모습을 묘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섬세하고도 재치있는 태도를 가졌으며, 매우 단순하지만 고상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또한 정교하게 제작된 담뱃갑과 시계를 가지고 다녔다.
눈은 크고 갈색, 머리는 까만 밤색이고 치렁치렁하며, 신장은 170센티 전후, 얼굴이 긴 편으로 곧게 뻗은 콧등은 고귀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희미한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있다. 목소리는 맑고 명쾌했다.
그는 아무리 높은 사람을 만나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식의 화법을 사용했다.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감에 가득찬 어조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아담하고 날씬한 체구와, 온화하고 우아한 몸가짐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를 지을 줄 알았고, 특출나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데마르 백작부인도 "오, 세상에나! 태어나서 이제까지 그처럼 멋진 눈동자는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 친교 ●
유럽 각국의 귀족들이 오컬트나 연금술, 비밀결사, 마법 등의 화제에 몰두하던 시절에, 불로불사의 영약을 지니고 있으며 마음대로 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소문난 이 희한한 남자는 세인들의 끊임없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냉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점성술에 대해 흥미를 보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기에 절대로 안 죽는 사내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프랑스의 미라보 백작은 여기에 덧붙여 "그는 언제나 조심성없이 굴더니만, 결국 자기의 선대(先代)들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마저 까먹은 모양이다."라고 비꼬았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나 장 자크 루소와도 친분이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가 그와의 친교로 인해 궁정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는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희한한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흥미를 느껴, 사람을 보내서 그의 소재를 알아내고는, 그를 궁전으로 초대했다. 백작은 초대를 받아들여 왕을 방문했고, 탁월한 언변으로 왕과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당시 왕은 백작과 후작부인과 셋이서 방에 틀어박혀 대화를 나누느라 저녁 내내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드 오세 부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왕은 생 제르맹이 상당히 고귀한 출생 배경을 가진 것처럼 말했다고 한다.
카를 폰 헤세 카셀 백작(혹은 헤센의 카셀 영주, 카를 폰 헤세 대공) 또한 생 제르맹과 인연이 깊은 인물인데, 그는 여러 해 동안 백작과 함께 연금술 실험(흑마술이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을 해 왔고, 백작은 그를 동등한 친구로서 대했다.
생 제르맹이 1784년에 (공식적으로) 세상을 뜨기 전에 자기의 서류들을 맡긴 것도 헤세 카셀 백작이었다.
하지만 루이 15세도 헤세 카셀 백작도 생 제르맹의 출생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실도 밝힌 바가 없다.
백작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이 늘상 빠지게 마련인 엄숙주의의 함정에 말려들지 않고 자유로운 개성을 유지했다.
그는 당대의 어여쁜 여인들과 어울리며 인생을 즐기기도 했다.
비록 그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지만, 순전히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즐기기 위해 외식 자리에 끼여들곤 했다.
그는 어떤 신분의 사람 앞에서도 절대로 기죽지 않는 귀족적인 품성을 지녔으며 심지어는 각국의 왕족들과도 동등하게 지냈다. 그는 피부의 주름을 없애거나 흰머리를 염색하는 비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는 또한 엄청나게 다양한 이야기로 좌중을 열광케 만드는 재주도 갖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자기과시욕이 강한 현학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되는 진술도 전해진다.
제라르 드 네르발의 『깨달은 자들』은 백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의 회고록들에 의하면, (그는) 사기꾼에게나 어울리는 뻔뻔스러움도 없었고 광신자에게 필요한 유창한 언변도 없었으며 피상적인 사람들을 이끄는 유혹도 없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한다.
'생 제르맹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충실하려고 하며 회원들이 좋은 평판을 받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던 (프리메이슨, Freemasonry) 교단을 오히려 신비스럽게만 만들 뿐이었다.'
폰 글라이헨 남작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파리에서 명망있는 기사인 랑베르의 집에 머물며 그 딸인 마드무아젤 랑베르의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로슬리의 회상록에는 백작이 네덜란드에서 자기 자신만큼이나 부유하고 수수께끼에 싸인 어느 귀부인과 사귀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이에 따르면, 백작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이 부인 또한 백작과 함께 여러 차례 다른 시기에 목격되었으나, 남편과 마찬가지로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 보석 ●
그는 보석류에 대해 상당한 애착을 보였으며, 자신이 소유한 보석들을 아무렇게나 지닌 채 걸어다니다가, 기회만 있으면 꺼내어서 사람들에게 선보이곤 했다. 그는 진기하고 뛰어난 보석들을 캐스킷에 보관하거나 옷에 장식처럼 꿰매어 붙이고, 어딜 가나 항상 그것들을 지니고 다녔다.

그가 유쾌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자랑했던, 각각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구두 버클은 파리 사교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빠트렸다. 그가 보석 매매를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다는 전설도 있지만 그 진위는 확실치 않다.

그가 보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그가 그린 그림들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보석으로 귀부인들을 장식하여 그림의 모델로 세우는 것을 즐겼다.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항상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는데, 그가 보석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색채가 워낙 은은하고 신비스러워서 인물들의 얼굴은 대조적으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드 장리스 부인의 『회고록』에도 백작이 보석을 과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많은 보석들, 특히 놀라울 정도로 크고 완벽한 채색 다이아몬드들. 그가 말했다. "나는 요술 램프의 보물들을 보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보석들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감히 자부하는데, 분명히 장담하지만 내 눈은 그 보석들이 진짜라는 것을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들은 어떤 틀에도 끼워져 있지 않았으니까요."'

엄청난 사이즈의 오팔이나 달걀만큼이나 커다란 하얀 사파이어 같은 희귀한 보물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는 종종 커프스(cuffs, 소맷부리)를 끌어내리고 옷의 뜨개질코에 달려있는 루비의 반짝이는 광채를 자랑하기도 했다.

하루는 마드무아젤 랑베르의 침실을 방문한 백작이 그 유명한 보석함을 열고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했던 다이아몬드들을 보여주면서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권유한 일도 있다고 한다.

그는 비록 확실하게 긍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조그만 돌(혹은 다이아몬드) 여러 개를 재료로 삼아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인도에서 배워온 재주라는 설명과 함께) 은근슬쩍 과시했다.

그가 신발과 가터에 장식하고 다닌 다이아몬드를 모두 합치면 적어도 2십만 프랑은 될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또한 자기가 진주의 크기를 마음대로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루이 15세가 소장하고 있던 다이아몬드의 흠집을 제거하여 그 보석의 가치를 4천 리브르 정도 올려주었고, 헤이그 주재 프랑스 대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는 초대형 다이아몬드를 시험삼아 분쇄해 보였다. 그 다이아몬드는 그가 당시 5500 루이를 받고 팔았던 것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드 오세 부인의 말에 따르면, 하루는 생 제르맹이 왕비가 참석한 자리에서 가지고 있던 보석들을 보여주었고, 부인은 흰색과 녹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생 제르맹은 짐짓 무관심한 투로 그것을 그녀에게 선물하겠다고 제의했고, 드 오세 부인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하지만 왕비는 그 보석들이 가짜일 거라고 생각하고 부인에게 제의를 받아들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직후 부인은 그 보석들을 감정해 보았는데, 모두 다 진짜였고 엄청나게 가치가 높은 최상급의 '물건'으로 판명되었다.

백작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 샤코르낙은 그가 자신의 처방을 이탈리아 과학자인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백과사전 『정교한 것들에 대하여』 제7권에서 이끌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푸코의 진자』의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조사에 따르면, 그 내용은 '보석 모조품 만들기'의 상당히 합리적인 기교를 다룬 것으로, 그 처방을 사용하면 사파이어도 다이아몬드 같은 투명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재능 ●
글라이헨은 생 제르맹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모자와 칼을 바닥에 흘려놓고, 벽난로 근처의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방금까지 이야기하고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며 대화에 끼여들었다. "자넨 그 문제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게 없구만! 그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뿐일걸.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질릴만큼 연구해서 이젠 말하기조차 싫을 지경이야. 마치 내가 음악을 배우다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만둔 것과 마찬가지지."'

그의 악기 연주 실력은 음악회를 열 수 있을 정도로 초일류였고, 그가 연주 못하는 악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실제로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당대의 이름난 거장들과 거의 동등한, 혹은 그들을 압도할 만큼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의 연주를 후대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니콜로 파가니니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는 피아노 연주도 일급이었고, 노래도 잘 불렀으며, 동시에 뛰어난 지휘자이기도 했다.
그의 하프시코드 연주를 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열정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마드무아젤 뒤 크레스트는 그가 '모든 노래를 편곡 없이 하프시코드로 반주하였는데, 놀랄 정도로 완벽하였다'고 한다. 그는 직접 작곡도 했는데, 스코틀랜드와 이탈리아 시인들의 텍스트를 가사로 삼아 아주 멋진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네 개의 악보 중에서 두 개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페르디난트 폰 롭코비츠 대공이 입수했고, 각각 1745년과 1760년이라는 일자가 기입된 나머지 두 개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1710년에 베네치아에서 만난 작곡가 라모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훌륭한 화가이기도 했는데, 주로 유화(油畵, 기름으로 갠 물감을 사용하는 회화의 한 분야)를 그렸다.

하루는 백작이 글라이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과 만나서 매우 즐거웠소. 그 답례로 오늘은 내가 그린 그림들 몇 점을 보여드리지."

글라이헨은 이어서 이렇게 서술했다.
'그가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왜냐하면 그가 내게 보여준 그림들은 모두 당대의 최고 예술품들보다도 훨씬 흥미로운 일관성이나 완벽함의 표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값진 보석들의 아름다운 색채를 캔버스에 그대로 재현하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갖추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비결이 뭐냐고 물어봐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감과 함께 자개(mother-of-pearl,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조각으로서 빛깔이 아름다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게 썰어 가구를 장식하는 데 쓴다) 가루를 섞어서 그런 신비스런 효과를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그는 미술 평론가로서도 이름이 나 있었고 그림의 진품 여부를 가리기 위해 종종 감정을 의뢰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시인으로서는 그다지 완벽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가 쓴 글들 중에서는 그저 그런 소네트 몇 편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낸 편지들(다데마르 백작부인에 의해 인용된)에 실린, 운율이 심각하게 안 맞는 예언시들이 남아 있다.

한번은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요청을 받고 희극의 줄거리를 짜 준 적도 있었는데,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에 그는 유럽 거의 모든 나라의 언어를 습득한 언어학자였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을 어떤 어색한 액센트도 없이, 마치 현지인처럼 능숙하게 구사했다.

게다가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도 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방 문물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높은 교육 수준을 은연중에 드러내 보이며, 세련된 회화(會話)의 달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극히 짧은 시간 안에 배운 듯하다는 사실이다.

그의 기억력 또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는 바로 전날에 곁눈질로 잠깐 훑어보았을 뿐인 서류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암송했다.

또한 그는 양손잡이였으며 한쪽 손으로 시를 쓰는 동시에 다른쪽 손으로는 외교문서를 작성한 적도 있었다.
그는 가끔 봉인된 편지의 내용을 손도 대지 않고 알아냈으며, 누군가가 그에게 질문을 하려고 하면 그 내용이 말로 옮겨지기도 전에 답변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가장 빼어난 검객 중 한사람이었고, 비범한 발명가이자 강령술사(降靈術師)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뛰어난 역사학자였으며 약학과 연금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생 제르맹이 값싼 금속을 재료로 사용하여 마음대로 금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정작 백작 자신은 현명하게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유럽 어느 은행에도 구좌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만이 그 소문에 일말의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프랑스의 관리들은 줄곧 부자였던 생 제르맹이 어디로부터 송금을 받고 있는지 조사를 하였는데 오히려 그에 대한 수수께끼만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몇년에 걸쳐 감시하였으나 생 제르맹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생활하며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그 동안 프랑스에 있는 그에게로 들어온 송금은 일체 없었다.카사노바가 투르네이(Tournay)에서 생 제르맹과 만났을 때를 회상한 기록에 따르면, 그때 그는 아르메니아 풍의 긴 겉옷에다가 뾰족한 모자와 아이보리 지팡이까지 갖춘 마법사같은 차림새를 하고, 그를 자기의 실험실로 데려가서 은화를 순수한 금으로 바꾸는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진위야 어떻든 간에, 그가 사람들 눈에 띄기를 좋아하고 항상 소문거리를 만들고 다닌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를 여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유럽에서는 아직 생소했던 많은 기술과 비기(秘技)를 터득했다. 보석의 크기를 키우거나 흠집을 없애는 기술 역시 페르시아의 샤(shāh, 왕[王] 또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페르시아어)를 방문했을 때 배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면술의 발견자라고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의사 안톤 메스머에게 인체전기나 최면술에 대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가르쳐준 것도 생 제르맹의 업적이라고 한다.

그는 유대교의 신비사상인 카발라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의 연금술에 대한 관심은 황당무계한 기적술보다는 오히려 현대적인 의미의 화학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특히 연금술에 몰두하였지만 과학의 다른 분야들을 간과하지 않았'고, '산업과 수공업 분야에서 그 간접적인 결과들을 활용'했다.

백작은 염색용 물감에 관심이 많았고, 독일에서는 펠트(felt, 양털이나 그 밖의 짐승의 털에 습기·열·압력을 가하여 만든 천으로서 신발·모자·양탄자 따위를 만드는 데 쓴다) 모자를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의 가장 특출난 업적은 유럽의 국제외교 분야에서 루이 15세, 프리드리히 대왕의 밀사(密使)이자 비밀 외교관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세운 것들이다. 다만 그러한 활약에 대한 공식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기존 권력들과 그의 관계는 오히려 수단적인 관계, 즉 비밀 첩보와 외교적 중재자의 관계'였고, 전설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대단한 모험은 아니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그의 임무는 '대사, 혹은 국제사절'에 가까운 것으로, '특히 여러 수도들 사이에 효율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타인을 현혹시키는 듯한 백작의 언동은, 그의 지식이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배워 익힌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심심풀이로 익힌 것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 결사 ●
당시 유럽 각국에서는 비밀결사가 유행병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냈다.
성직자나 귀족들도 이런 유행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여성의 권익이 별로 보장받지 못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을 위한 지부(lodge)들까지 창설되었다.
랑바르 공녀는 이들 지부 가운데 한 곳의 그랜드 미스트리스였다.

독일에서는 광명회(일루미나티, Illuminati)와 엄중 서약의 기사단 혹은 엄격한 준수단(the Knights of Strict Observance)이 생겨났고, 프리드리히 2세는 권좌에 오르자마자 아프리카의 건축가들(the Architects of Africa)의 지파(sect)를 세웠다.

프랑스에서는 성전기사단이 재구축되었고, 샤르트르 공작을 그랜드 마스터로 내세운 프리메이슨은 무서운 속도로 각지에 지부를 설치해 나갔다.
마르티네즈 드 파스칼리는 마르세이유, 보르도, 툴루즈에서 독자의 사상을 설파하고 있었다.

한편 사바레트 드 랑에는 게베린 남작이나 생 마르탱같은 신비주의자들과 함께 친우회(Friends Assembled)의 지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전설'과는 달리, 이들 단체들은 대부분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자선단체나 사교클럽에 불과했다고 한다.

실제로 사회의 대변혁을 이끌어낸 것은 비슷한 시기에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정치 클럽과 아카데미, 그리고 문학 단체들이었다.
이들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구제도)의 종말을 준비한 아주 적극적이고 극단적인 혁명 단체였다.
닥쳐올 대혁명에서 비밀결사가 실제로 맡았던 역할은 아주 미미했고 그들은 오히려 내부의 이권 다툼이나 교회와의 싸움으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귀족과 부유층이 대부분이었던 당시의 메이슨들은 혁명파와 왕당파로 나뉘어 '형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야 하는 아주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이들 결사들이 혁명의 배후조종자로 잘못 알려진 것은 바뤼엘 신부를 비롯한 반(反)메이슨 인사들의 흑색 선전에 기인한 것이지만, 혁명의 기운에 편승하여 교단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세력을 넓히려는 메이슨 지도부가 이를 조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 제르맹은 빈에 머물면서 아시아 형제회(the Society of Asiatic Brothers)나 빛의 기사단(the Knights of Light)의 설립에 관여하고, 그들과 함께 연금술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들의 최대 목표 중 하나는 연금술의 핵심 요소인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빈에 체류하는 동안에 란트스트라세에 있는 장미십자회의 연구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1713년에 라이프니츠가 머물렀던 방에 투숙한 적도 있었다.

로젠크로이츠가 주로 육성으로 가르침을 전하려고 한 것에 비해, 생 제르맹은 위대한 진리들을 신성한 숫자로 바꾸었고, 그의 암호화된 가르침들 중 일부는 절친한 친구였던 헤세 카셀 백작이 상속받았다.

백작은 1782년의 빌헬름스바트 집회와 1785년의 파리 대집회에서 프리메이슨의 대표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를 여기저기 방랑하는 성전기사단의 최후 생존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소문들은 점점 불어나더니 급기야는 그가 바로 장미십자단이나 근대 프리메이슨의 창시자라는 근거없는 전설로까지 발전했다.

어떤 이들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독립선언서와 합중국 헌법을 기초할 때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실제 미국 독립전쟁을 이끈 사람들 중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지식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생 제르맹이 프리메이슨 결사들과 연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으며, 어쨌든 그는 어떠한 비밀결사도 창립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위의 진술들은 단순한 전설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백작이 홀슈타인에 머물던 때에는 유명한 기적술사 알레산드로 디 칼리오스트로 백작(본명 주제페 발사모)의 방문을 받아 그가 입문식을 치르도록 이끌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헤이그에서 탈출한 후 영국에 건너간 시기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는 얘기도 있다)

이 역사적인 만남의 최초 정보는 뤼셰 후작이 1785년에 쓴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역사에 유용한 정확한 회고록』에 실려 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이 두 사람이 거의 동시대 사람이며 직업상으로나 생애의 환상적 경향에서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다데마르 백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1789년의 파리 방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 지옥의 악마같은 칼리오스트로 녀석이 어떤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는지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었소.'
혹자는 이를 근거로 칼리오스트로가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후의 역사적 격변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이 두 모험가의 이미지를 뒤바꾸거나 덧칠해 가며 그들을 전설화하기 시작했다.

백작이 (공식적으로) 죽은 뒤 1785년 1월의 「베를린 월간지」는 그를 '죽은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멋진 모사품'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실제 칼리오스트로는 이보다 10년 뒤인 1795년에 죽었다)

그노시스 교회의 창립자인 장 코츠카(Jean Kotska)는 익명의 저술 『검은 누더기』에서 생 제르맹을 '18세기의 신비주의를 지배하고 프리메이슨 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혁명을 통제한 거대한 흑막'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뒤마의 소설 『조제프 발사모』를 통해 신격화된 칼리오스트로의 이미지와 생 제르맹의 활약을 혼동하여 이루어진 중상모략에 가깝다.

결국 그들이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언가 비범한 사물이나 사람을 믿고 그를 의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의 대상'으로서 충실히 기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 불사 ●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는 그의 『회상록』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나를 몹시 놀라게 만들 만한 얘기만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다이아몬드를 녹여서 그걸 가지고 가장 아름다운 투명도를 갖춘 새 다이아몬드를 1다스 정도 만들어 보일 수 있다던가, 특수한 비약 덕택에 어떤 음식도 먹을 필요가 없다던가 하는 얘기 말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실은 3백 살이라는 말도 했다."

생 제르맹은 1740년 처음으로 파리에 나타났고 1743년에는 런던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사람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존하는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적어도 1651년부터 1896년까지 무려 245년 동안 유
럽 각국에 출몰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1710년부터 1822년 사이에 중요한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긴 수명 때문에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여러 명의 각기 다른 사기꾼들이 생 제르맹을 사칭하며 전설을 만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대의 다른 이가 생 제르맹을 사칭한 것이라면 어째서 전부터 그를 알았던 사람들까지 그를 진짜로 믿어버린 것일까?

생 제르맹은 1710년 베네치아에서 몬페라토 후작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바로 그때 음악가인 쟝 필립 라모와, 외교관인 제르지 백작부인을 만났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백작이 그때도 40대에서 50대 사이의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러한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면, 앞서 언급되었던 생 제르맹이 마리 드 뇌부르의 아들이거나 혹은 프란츠 라코치 2세의 아들이라는 설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 이 가설들에 따른다면 생 제르맹은 1710년에 고작해야 20대의 젊은이였거나,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735년에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며, 이것이 그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라모는 자기 일기에 백작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50세 정도로 보이지만 그보다 더 젊을지도 모르겠고, 혹은 더 나이를 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무서울 정도로 화제(話題)가 풍부해서,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왠지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1755년, 제르지 백작부인은 퐁파두르 부인의 살롱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가 생 제르맹과 대면했는데, 그를 보자마자 45년 전 자신이 베네치아에 대사로 있을 때 만난 정체불명의 귀족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동일인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부인은 백작에게 혹시 50년 전 그의 아버지가 베네치아에 있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아닙니다, 부인. 하지만 제 자신이 지난 세기 말부터 이번 세기 초에 걸쳐서 베네치아에 살았던 적은 있지요. 당시 저는 부인에게 구애하는 영광을 누렸고, 부인께서는 제가 작곡한 변변찮은 바카롤(Barcarolle; 곤돌라에서 부르는 뱃노래)을 즐겁게 들어주셨답니다."

그에 이어 백작은 부인이 젊었을 때 대단히 아름다웠고, 자신도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해 주는 것을 즐겼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녀를 놀라게 했다.

백작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움찔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거의 백 살은 넘는다는 말이군요."
백작이 대답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노부인이 소리질렀다.
"당신은 정말로 괴이한 사람이로군요! 당신은 악마예요!"

악마와 비교당한 사실이 그의 아픈 곳을 찔렀는지, 백작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주시오!"
그리고 그는 충격을 받은 부인을 남겨두고 등을 돌린 채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이야기도 전해진다.

드 오세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는 수백 년을 살아온 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백작에게 직접 질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당신의 나이를 말하지 않으면서 아주 늙었다고 믿도록 내버려 두는군요. 제가 알기로는 제르지 백작부인은 50년 전 베네치아에 대사로 있었을 때부터 당신을 알았는데, 오늘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말하더군요."

"사실입니다, 부인.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백작부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지금 백 살이 넘었을 것이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저는 제가 존경하는 그 백작부인께서 착각하셨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그녀에게 놀라운 효과를 지닌 불로장생의 약을 주었다던데요. 그녀는 오랫동안 스물다섯 살의 모습을 유지했다고 주장하더군요. 왜 그런 약을 왕께도 드리지 않습니까?"

그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부인! 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약을 왕께 감히 드릴 정도로 미치광이는 아닙니다."

이러한 기록을 스테파니 펠리시테 드 장리스 부인(Mademoiselle de Genlis)이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 백작과 만나서 나눈 대화와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아가씨가 17세나 18세쯤 되었을 때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행복할까?"
그녀는 굉장히 기쁠 거라고 대답했다.

"좋아."
그는 매우 엄숙하게 말했다.
"틀림없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내 장담하지."
그러고 나서 그는 곧 화제를 바꾸어 대화를 계속했다.

생 제르맹 백작이 파리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시기는 대략 1760년에서 1770년 사이였다.
겉보기로는 40세에서 50세 정도로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이후 15년 동안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고, 1775년에 다데마르 백작부인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그는 그전보다도 훨씬 젊고 기운차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로부터 12년 뒤 다시 백작을 만났을 때도 그의 겉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백작 자신이 청중들에게 자기가 상당히 긴 시간을 살아왔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가 노골적으로 그렇다고 말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기에 대한 온갖 소문을 부정하거나 바로잡으려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약간의 신비를 덧씌우고 살짝 변죽만 울려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전설을 확산시키기보다는, 다만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다는 것을 믿도록 만들기보다는 그렇게 믿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즐깁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과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중함으로 인해 성공을 얻었다.

글라이헨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청중들의 반응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자기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신비함을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상대방이 남의 말을 쉽게 잘 믿는 사람이면, 그는 샤를 5세 시대 때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런 반면 상대방이 훨씬 회의적인 사람일 경우에는, 그는 비교적 세세한 정황이나 등장인물들의 생김새와 몸짓, 그들이 있는 장소에 대해 아주 쾌활하고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듣는 이에게 백작이 정말로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주었다. 어느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아둔한 파리지앵들은 내가 정말로 5백 살이나 먹었다고 믿더군요. 그들에게도 그게 나름대로 기쁨을 주는 모양이라, 나는 그들이 그렇게 믿도록 내버려 둔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겉보기보다 엄청나게 늙었다는 게 거짓말이냐 하면... 글쎄요."'

야사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예수와 만난 적이 있으며 니케아 공회에도 가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상대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그들의 경솔함을 비웃기 위해서 그렇게 막가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야사는 희극적인 인물로 유명했던 고워 경(Lord Gower)이 그의 집에 손님들을 모아놓고 당대의 명사들을 흉내내는 쇼를 벌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생 제르맹의 차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 신비한 인물이 기독교의 창시자와 벌였을 법한 가상의 대화를 보여주며 그의 음성과 몸짓을 흉내냈다.

고워 경의 원맨쇼 속에서 생 제르맹은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였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앞뒤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백작은 어느 회화에서 예수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얘기를 하듯 언급한 적이 있다.

예수에 관련된 기묘한 일화를 털어놓은 뒤에, 백작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그답지 않게 우울하고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소."
그는 자기가 칼데아(Chaldea)를 방문했고, 시바의 여왕과도 만났으며, 고대 이집트 현인들의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떠벌렸다.

어느 점심식사에서는 "나는 지금으로부터 2백 년 이상 전에,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5세의 대신(大臣) 자리를 맡아보았소. 바빌로니아에 있을 때에는,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건설한 바빌론의 도읍에도 가보았죠.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 입성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또한 율리우스 케사르(=시저), 클레오파트라, 마르코 폴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8세 같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마치 허물없는 친구처럼 얘기했다. 그는 프랑소와 1세 때의 궁정 얘기를 하면서 왕의 목소리나 몸짓을 흉내내고, 그 생김새도 그림으로 그리듯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회의적인 역사가들이 그의 발목을 잡기 위해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소한 역사적 사실들을 질문할 때마다 백작은 언제나 놀랄 만큼 정확한 답을 짚어냈고 상대방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백작은 수 세기 전에 벌어진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중에 자기의 집사를 돌아보고 자기가 혹시 뭔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백작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모신지 5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을 리 없다는 사실을 깜빡하신 모양이군요. 아마도 거기 있던 사람은 제 전임자였을 겁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그밖에도 존재한다.
그는 어느 날, 사교계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사자왕 리처드에 대해서 자기의 하인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 하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잊으셨습니까? 저는 주인님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겨우 5백년(혹은 3백년)밖에 안 됩니다요."

또 다른 이야기에서 집사인 로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인님께서는 항상 당신이 4천 살쯤 된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분 밑에서 일하게 된지 겨우 백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화들은 콜랭 드 플랑시가 1844년에 펴낸 『지옥 사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에서 빌라도 총독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총독의 집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였고 저녁 식사에 제공된 음식들을 설명하였다. 드 로앙 추기경은 꾸며낸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여, 생 제르맹 백작의 하인으로 있었던, 새하얀 머리에다 진지한 태도를 지닌 노인에게 말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 주인이 하는 말을 믿기가 어렵군. 복화술사(複話術師)라는 것은 그렇다고 치세. 또 황금을 만든다는 것도 이해하겠네. 하지만 2천 살이나 되었고, 본디오 빌라도를 보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네. 자네는 그곳에 있었는가?"

하인은 순진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오. 아닙니다, 각하. 제가 백작 나리를 모신 것은 단지 4백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760년경, 영국의 「런던 머큐리」라는 신문은 상당히 진지한 논조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생 제르맹 백작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어느 귀부인이 노화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그 유명한 불로불사약 한 병을 선사했다. 그 부인은 약병을 옷장 위에 두었는데, 그녀의 시중을 들던 중년 여인 한명이 그 병의 내용물을 평범한 하제(purge, 下劑, 설사약)로 생각하고 몰래 마셨다. 다음날 귀부인이 그 하녀를 부르자 그녀 앞에 거의 꼬마로 보일 정도로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불로불사약이 하녀를 젊은 시절로 되돌린 것이다. 아마도 그 약을 몇 방울만 더 들이켰더라면 하녀는 여주인의 부름에 아기 울음소리로 답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쯤 되면 거의 믿거나 말거나이다.

생 제르맹이 빈에 들렀을 때, 오스트리아인 친구 프란츠 그래퍼(Franz Graeffer)가 그에게 헝가리 토케이 산(産) 포도주를 권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먹거나 마시는 것을 누가 본 적이 있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비록 많은 말벗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얘기하는 걸 즐겼지만 음식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자신의 젊어뵈는 외모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소박하고 절제된 생활습관과 오트밀(oatmeal, 맷돌 따위로 간 귀리를 쪄서 우유, 설탕을 넣은 음식), 태운 귀리(groats), 차(茶) 등으로 이루어진 간소한 식사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늙은이를 다시 젊게 만드는 법은 모르지만, 대신 인간의 육체가 소진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균형잡힌 식사와 그에 곁들여진 약간의 엘릭시르가 그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정 종류의 허브를 넣은 차를 특히 즐겼는데, 친구들에게도 즐겨 선물하곤 했다.

또한 그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센나(senna, 아라비아·아프리카산 석결명류)의 꼬투리를 사용해서 직접 만든 약물의 조제법을 신이 나서 알려주곤 했다. 현재 전해지는 음료 중에 '생 제르맹 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 하제(下劑)로서, 몸 안의 독성물질을 배출하여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다.

백작은 건강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불로불사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연금술로 만들어낸 비약 대신에 하제를 지니고 다녔던 것일까?
루이 15세의 궁정에서 열린 화려한 연회에 참석했을 때에도 그는 요리나 포도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가끔씩 광천수를 홀짝거릴 뿐이었다.
어쩌다 식사를 할 때에도, 그 식사는 남들의 눈을 피하여 은밀하게 이루어졌고, 그가 실제로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몇몇 호사가들은 그가 채식주의자였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확인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
그는 고기와 포도주를 멀리했고 꼭 마셔야 할 경우에는 닭고기만을 먹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쩌다 가끔 아주 약간의 포도주를 들기도 했고,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밤 늦게까지 계속 깨어있었다.

그러나 감기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자칫 잘못하여 감기에 걸리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백작이 유일하게 남긴 저서인 『La Tres Sainte Trinosophie』라는 책이 프랑스 트루아(Troyes)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그 의미를 완전히 해독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다만 간신히 해독할 수 있었던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리는 너무나도 빨라서 오직 그 자신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도로 대우주를 여행해 왔다. 불과 몇 초만에 우리 발 밑의 지평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지구는 희미한 성운의 일부분으로 변해버린다.'

영국 작가 톰 슬레멘(Tom Slemen)은 자기의 저서인 『기이하지만 정말인 이야기』에서 이 부분을 소개하면서, '생 제르맹은 혹시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가 아닐까'라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염력(念力)이나 특수한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시공의 벽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영원한 젊음이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겠지만, 역시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또한 이러한 장수를 불로불사약이나 시간여행으로 설명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오래 사는 체질을 타고 난 장수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모험 ●
생 제르맹 백작은 1737년부터 1742년에 걸쳐 샤의 궁전에 기거하며 연금술 연구를 행했다.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그는 1743년에 런던에 도착하여 세인트 마틴 가(街)의 어느 하숙집에 숙소를 잡았다.

그는 그 도시에서 2년 정도 머물렀는데, 얼마 후 개인 실험실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연금술과 관련이 있는 듯한 여러가지 신기한 실험을 거듭했다.
그가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기 때문에 실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인조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백작은 킷캣 클럽(Kit-Kat Club)에 주로 드나들며 그곳의 단골인 고위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백작은 거기서 자기가 연구 중이라는 두 가지 발명품에 대하여 털어놓음으로써 좌중을 놀라게 했는데, 그 발명품이란 바로 증기기관차와 증기선이었다.

제임스 와트가 털털거리는 초기 증기기관을 실용화하기 20년 전에, 그리고 조지 스티븐슨이 최초의 증기기관차 로켓호를 달리게 만들기 무려 84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생 제르맹은 영국에서 자신의 신비스런 생활 때문에 수상한 자로 의심받고 체포당한 적도 있었다.

1745년에 영국에서는, 튜더가를 몰아내고 왕위를 수복하려는 스튜어트가의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재커바이트(Jacobite)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바로 그 해에 생 제르맹 백작이 패터노스터 로(Paternoster Row)에 위치한 어느 커피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다.

영국의 첫번째 수상인 로버트 월폴 경의 아들이자 최초의 본격 고딕소설 『오트란토 성』의 저자인 호레이스 월폴은 평생 지기인 호레이스 만 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편지는 생 제르맹의 실존에 관한 최초의 신빙성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 생 제르맹 백작이라고 자칭하는 수상한 남자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네. 그는 여기서 2년 동안이나 머물렀지만 자기가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고, 다만 자기의 이름이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것만 밝혔다네. 그는 노래도 잘 부르고 바이올린도 거의 예술급으로 켜지만, 어리석은 기벽(奇癖)을 지닌데다 분별이 없는 편이라네.'

전형적인 영국인인 월폴의 관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거리로 삼았으며, '도무지 신사라고는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당시 수많은 외국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이 재커바이트 당원들에 대해 동정을 표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증은 극에 달해 있었고, 백작이 체포당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스파이라고 단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곧 석방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해서 그렇게 곧바로 풀려날 수 있었는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당시에 회람(回覽)된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백작이 그를 심문한 자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그가 결백하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안톤 메스머가 생 제르맹 백작에 대해서 '그는 인간 심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서 정말로 잘 이해하고 있다'는 찬사와 함께, 애초에 자기에게 최면술을 가르쳐준 것도 백작이었다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백작은 1748년경에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빈으로 향했다.

백작이 그 직후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Sans-Souci, 프랑스어로 '근심없는'이라는 의미) 궁에 도착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당시 그곳에는 볼테르도 머물고 있었는데, 비록 그는 생 제르맹과 동류인 신비주의자 생 마르탱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나, 생 제르맹 본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좋은 인상을 받았던 듯 하다.

볼테르는 이후 대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생 제르맹 백작은 결코 태어난 적도 없고, 절대 죽지도 않으며,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남자입니다."

1755년(혹은 1756년), 백작은 영국의 장군인 로버트 클라이브 경(Sir Robert Clive)의 인도 방문에 동행했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 15세에게 자기가 만들었다는 다이아몬드를 헌상(獻上)한다. 그의 다이아몬드 정제 기술에 홀딱 반한 루이 15세는 백작에게 샹보르 성(Chateau de Chambord)을 숙소로 제공했고, 백작은 여기에 설치한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시연하여 왕과 궁정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루이 15세의 신임을 얻은 백작은 한동안 그의 고문 노릇을 했으며, 급기야는 국정에도 관여했다.
왕은 그를 총애하여 외교사절로 임명하고 여러 가지 비밀 임무를 맡겼다.

1760년에는 베르사유 궁전의 무도회장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보고도 있다.
다만 크리스티앙 자크에 따르면 그가 베르사유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이 아닌 퐁파두르 부인의 도움 때문이라고도 한다.

'프리메이슨 스타일의 신비주의가 한참 유행하던 1758년,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궁전에 편지를 보내어 자기가 금을 만드는 법을 발견했다고 떠들었다. 그의 말은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퐁파두르 부인은 그에게 샹보르에, 그리고 나아가서 베르사유에까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정확치는 않지만 그는 루이 15세를 만났을 수도 있는데, 왕은 그에게 해외 비밀요원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백작에 대한 왕의 편애는 많은 이들의 질투심을 자아냈고, 당시 외무장관이던 슈아죌 공작(Duc de Choiseul)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1760년, 루이 15세는 외무장관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정책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네덜란드를 회담 장소로 삼아 장관 몰래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평화협상을 중재하려 했다. 생 제르맹이 교섭 임무를 띠고 브룬스윅의 루이 공과 함께 헤이그로 파견되었다.

네덜란드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외교관인 무슈 다프리(Monsieur d'Affry)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통보받고는, 외무장관에게 자기 손을 거치지 않은 교섭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기회를 포착한 슈아죌은 다프리에게 생 제르맹을 즉각 파면하고 네덜란드 정부로 하여금 그를 체포하게 한 뒤 파리로 압송하게 하라고 전문을 보낸다.
이 결정은 중신들과 함께 회의중이었던 루이 15세에게도 전달되었지만, 복잡한 외교적 분쟁에 말려드는 것을 우려한 왕은 자신의 관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밀사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생 제르맹은 운좋게도 체포되기 직전에 경고를 받는 데 성공한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영국으로 가는 배를 잡아탈 수 있었다.
그는 그로부터 약 2년 동안 영국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마침 생 제르맹이 묵고 있던 숙소 근처의 호텔에는 '생갈트의 기사'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문필가 카사노바가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생 제르맹과의 만남을 계기로 보석과 사기꾼과 기만당한 늙은 아버지와 자기에게 맹렬히 반해버린 아가씨가 뒤엉킨 복잡다단한 모험담에 빠져들게 된다.

카사노바는 훗날 자기의 『회상록』에서 생 제르맹의 괴벽(怪癖)에 대해 언급했다.
이밖에도 루이 15세가 그를 영국에 첩자로 파견했으나, 그를 질투한 슈아죌 일파의 음모로 인해 베르사유에서 쫓겨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는 전설도 있으나, 앞서의 이야기와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어쨌거나 슈아죌이 백작을 미워하여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적당한 때 이를 눈치챈 백작이 영국으로 달아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물론 여론을 피해 그가 받을 수 있는 보호란 프리메이슨 밖에는 없었다.
이와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일단 루이 15세가 생 제르맹을 밀사로서 파견하는 도입부는 같다.
백작은 헤이그와 런던을 오가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왕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슈아죌 공작이 뒤편에서 이중으로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백작은 비록 이 사실을 왕에게 진언했지만, 한편으로는 누가 영예를 얻든 간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평화조약은 반드시 체결?
추천1 비추천0
Loading...

댓글목록

선장님의 댓글

선장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 전설 ●
1870년, 생 제르맹의 기묘한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호텔 드빌을 근거지로 삼은 특별위원회를 설립하고, 18세기 후반에 관한 문서고의 자료들을 샅샅이 뒤져, 그에 대하여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경찰의 엄중한 경비를 받아가며 한곳에 모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곧 프로이센과의 전쟁과 파리 코뮌의 시대가 닥쳐왔고, 호텔 드빌은 1871년에 일어난 원인불명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그와 함께 '영원히 죽지 않는 백작'에 관한 수많은 문건들도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생 제르맹이 실제로 살아있다고 확인된 1821년(혹은 1822년, 인도 여행중 목격)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영국인 앨버트 밴담(Albert Vandam)의 회고록 『파리의 영국인』에 따르면, 루이 필립 치세 말기의 파리에 생 제르맹과 상당히 비슷한 수수께끼의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프레이저 대령(Major Fraser)이라 불렀다. 그는 혼자 살았고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아낌없이 돈을 펑펑 써댔지만 그가 어디서 그런 부(富)를 축적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모든 시대의 유럽 각국에 대하여 상당한 양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기억력은 완벽했고,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쩐지 그가 그러한 지식들을 책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서 얻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종종 묘한 미소를 띠고 자기는 네로 황제를 알고 있었다던가 단테 알리게리와 대화한 적이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생 제르맹과 마찬가지로 프레이저 대령도 40대에서 50대 사이의 남자였고 키는 중간 정도였으며 탄탄하게 단련된 몸매를 갖추었다.
그가 어느 스페인 왕자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생 제르맹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수년간 파리의 사교계에서 적잖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에 어느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혹자는 1820년에 출판된 히말라야 여행기에서 성스러운 갠지스 강의 수원지인 강고트리를 돌아보고 줌나 강의 원천에서 미역을 감았다고 주장한 어느 유럽인이 그와 동일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들어서서 생 제르맹 백작에 관한 전설은 더욱 크게 불어났다.

그가 보여주었던 엄청난 지식의 보고와 삶의 활력과 원천을 알 수 없는 막대한 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신비로 인해 그는 최초의 장미십자단 단원들의 계승자거나, '현자의 돌'을 소유한 마법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급속히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던 신지학자들 중에는, 생 제르맹이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자도 있었다.

백작은 때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육신으로, 때로는 형체 없는 영혼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일부의 신비주의자들은 그를 히말라야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위대한 화이트 로지(White Lodge)의 마스터로 생각하기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티벳 깊은 곳에 자리하여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라마 사원에는 잃어버린 고대 아틀란티스 문명의 비밀을 간직한 현인(賢人)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이따금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열정과 무지에 눈이 먼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해 외부세계로 사신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 전설을 믿는 이들은 크리슈나, 부처, 예수도 그러한 사신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자들이었으며, 생 제르맹도 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1877년, 밀라노에서 열린 프리메이슨 대지부의 집회에서 생 제르맹 백작이 아주 잠깐동안 모습을 드러냈다.
그밖에도 1800년대의 여러 여행자들이 극동 지방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그를 목격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1896년, 신지학자 애니 베선트(Annie Besant)가 생 제르맹과 만났다고 주장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러시아의 신지학자인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 부인(Madame Blavatsky)이 그와 접촉했다고 하면서, 그는 히말라야 북쪽에 자리잡은 지하왕국 샴발라에서 온 불사종족의 일원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1897년, 프랑스 가수 엠마 칼베(Emma Calve)는 생 제르맹이 자기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그녀의 손금을 보고 여러가지를 알아맞췄다고 주장했다.
1903년에는 인도의 봄베이(뭄바이)에서, 그리고 그밖에도 뉴욕, 시드니, 솔즈베리, 부에노스아이레스, 테헤란, 북경, 일본에서도 그를 목격했다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

티벳의 승려집단인 케-란(Khe-lan)에는 역사상 유일하게 이방인이 그들의 일원이었던 때의 전설이 있다.
20세기 초의 어느 해에 서방으로부터 찾아온 그 영국인은 티벳어를 비롯한 수십 가지의 언어를 말할 줄 알았고, 예술과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 신비한 나그네에 대한 전설은 오늘날까지도 티벳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고 있으나, 그의 본명은 오직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만 전해졌고, 오늘날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백작의 추종자들은 이 신비한 이방인이야말로 생 제르맹 본인이며, 근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가 티벳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작 자신이 므두셀라(노아의 홍수 이전의 유대 족장으로 969년간 살았다)처럼 무한한 미래까지 살 수 있다고 암시한 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 신화 ●
20세기에 들어서서 백작의 전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14년 8월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제 1차 세계대전 초기에, 두 명의 바바리아인 병사가 유대계로 짐작되는 프랑스 군인을 알자스에서 생포했다.
밤새도록 계속된 심문에도 불구하고 이 완고한 포로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끝끝내 거부했다.
그런데 아침이 밝아오면서 이 정체불명의 프랑스인은 갑자기 초조한 기색을 보이더니 전쟁의 무상함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를 붙잡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무기 따위는 다 던져버려! 전쟁은 1918년에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패배로 끝난단 말야!"
병사들 중 한명인 안드레아스 릴은 포로의 허튼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 자가 단지 프랑스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사항을 대변하는 것뿐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포로는 또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백만장자가 될거야! 너무나 많은 돈이 시중에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까운 줄도 모르고 지폐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누구도 그걸 주우려고 하지 않아. 고기 한 조각 사려면 그런 돈을 손수레에 가득 담아가지 않으면 안 될걸!"

이것은 종전 직후에 독일을 덮치는 혹독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예언이 아닐까?
병사들은 코웃음을 쳤고 포로가 얼마나 황당한 소리를 더 해댈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돈의 광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거야. 고대의 상징물을 내세운 하층민 출신의 독재자가 말이지. 그는 1939년에 독일을 또다른 세계대전에 몰아넣게 돼. 하지만 6년간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잔학한 짓을 벌인 뒤 패배하고 말 거야."

그 직후 프랑스인의 말은 점점 지리멸렬해졌다.
그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더니 울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그가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라 판단하고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의문의 남자는 희뿌연 햇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이 신비한 병사의 이야기에는 어딘가 생 제르맹 백작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1948년에는 역사소설가 레르네 호레니아가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책을 썼다.
그밖에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도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생 제르맹과 칼리오스트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소설가 조반니 파피니는 자신의 풍자소설 『고그』에서 불사의 권태에 빠져 무기력해진 노년의 생 제르맹 백작을 등장시키고 있다.

파피니에 따르면 백작은 15세기 초에 태어났고, 1594년 런던에서 햄릿의 공연을 관람했으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마르틴 루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 15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루트비히 판 베토벤, 미켈란젤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만났다.

1972년에는 리샤르 샹프리(Richard Chanfray)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이 스스로를 생 제르맹이라고 주장하며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납을 금으로 바꾸는 실험을 시연하기도 했다. 1982년에는 프랑스의 전기 작가 샤코르낙(Chacornac)이 여러가지 현대적 해석을 가미한 백작의 전기 『생 제르맹 백작』을 출판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동북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본래 오컬트나 환상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에게도 생 제르맹 백작의 기이한 이야기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일본의 만화가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그의 평생을 바친 SF대작 『사이보그 009』중에서 생 제르맹이라 칭하는 인물을 두 번 등장시켰다.

첫번째는 1977년 7월부터 1979년 9월에 걸쳐 「망가소년」지에 연재된 「해저 피라미드 편」이고, 두번째는 1985년 2월부터 1986년 9월에 걸쳐 「SF아니메디아」지에 연재된 「시공간 표류민 편」이다.

전자에서는 스스로 인류의 역사와 진화에 간섭하는 '신적인 존재'로서, 후자에서는 시공의 틈에 끼여 오도가도 못하는 미래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묘사되었는데, 같은 이름을 쓰긴 해도 완전 별개의 캐릭터인 듯한 인상을 주며, 양자의 관계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번째 백작은 サン·ジェルマン伯爵이고 두번째 백작은 サンジェルマン伯爵이다. 즉 두번째의 경우 가운뎃점[·]이 없다)

이시노모리는 「해저 피라미드 편」의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스스로 생 제르맹 백작에 관하여 해설하는 단편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1978년에는 나오키상 수상자인 일본 작가 아토다 타카시(阿刀田 高)가 문예지 「소설현대」 12월호에 『생 제르맹 백작고(考)』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동시대의 도쿄를 무대로, 주인공인 아이자와 마코토가 생 제르맹 백작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단편에서 이시노모리 본인이 펼쳐드는 책이 바로 이 작품이다.

1994년에는 여성국극단인 타카라즈카 호시구미(星組)가 코이케 슈이치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카사노바∼꿈의 발자취』를 공연했는데, 도입부분에는 생 제르맹 백작을 중심으로 한 프리메이슨의 세계가 펼쳐지고, 그 안에서 카사노바와 퐁파두르 부인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액자 구조로 되어 있다.

중반에 이르면 모든 것이 백작의 손아귀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지만, 결국 카사노바가 사랑을 관철하기 위해 전혀 뜻밖의 행동을 취함에 따라, 백작은 좌절하여 쓰러진다. "나는 되살아날 것이다"라는 대사와 함께.

2000년에 집필된 사이토 나오코의 피카레스크 판타지 『가상(假想)의 기사』(제 12회 일본 판타지노벨 대상 우수상 수상작)에도 백작은 등장한다.
18세기 파리, 자칫 여자로 착각할 만한 미모의 기사 디온 드 보몽이 밀명을 받고 여장을 한 채로 러시아에 잠입, 여제 엘리자베타에게 밀서를 전달한다.

당시는 친영파의 재상이 실권을 잡고 있던 터라, 발각되면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
그러나 보몽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러시아 전담 에이전트로 임명된다.

2번째의 러시아 체재시에 주인공에게 날아들어온 경악할 만한 소식, 그것은 국왕 루이 15세가 디온의 연인 크리스티느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람둥이 카사노바, 사교계의 정점에 선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 그리고 의문의 남자 생 제르맹 백작이 얼키고 설키면서 디온의 연인 구출작전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급전개된다...는 스토리.

본작은 이후 NHK-FM에서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되어 방송되기도 했는데, 생 제르맹 백작의 목소리는 중견 성우 이케다 슈이치(『기동전사 건담』의 샤아 아즈나블!)가 연기했다.

생 제르맹 백작은 이제, 단지 하나의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시공을 초월한 불멸의 신화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 동명이인 ●
18세기에는 샤를 루이 클로드 드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인물도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백작과 달리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1707년 4월 15일에 태어나 1778년 6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루이 15세 및 루이 16세 시대에 복무했던 군인으로, 귀족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나 7년전쟁에 종군하였고, 특히 7년전쟁에서는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1775년 루이 16세 치하에서 육군대신을 맡게 되나, 쓸모없는 장관(將官)들의 봉급이 국가재정을 압박한다고 생각한 그는, 4대손손 계속하여 귀족이 아닌 자는 장관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규칙을 세웠다. 이는 상당히 용기있는 개혁이었으나, 예상대로 보수 문벌계층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육군의 사기 고양을 위해 대귀족보다 소귀족에 더 신경을 썼다.
그는 포병대를 창설했으며, 혁명 이후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는 프랑스 육군의 기틀을 세우기도 했다.

1777년에 프로이센식 군사제도를 도입하려 했다가 좌절, 반대파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전부터 특권계급에 불리한 그의 개혁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던 재상 모르파 백작에 의해 파면당하고 만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에 대한 언급이 두어 줄 나온다.


◎ 참고문헌 ◎

움베르토 에코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 (열린책들, 2003)
크리스티앙 자크 『프리메이슨』 (문학동네, 2003)
리더스 다이제스트 편집부 『초능력과 미스터리의 세계』 (동아출판사, 1994)
이시노모리 쇼타로 『사이보그 009』 한국어판 제11권 (시공사, 2003)
00넘버 프로젝트 『사이보그 009 컴플리트 북』 (미디어 팩토리, 2001)


◎ 참고 사이트 ◎

*생 제르맹 백작 관련 (영어)
http://www.occultopedia.com/c/count_saintgermain.htm
http://members.fortunecity.com/jadekohl/
http://www.crystalinks.com/stgermain.html

*생 제르맹 백작 관련 (일어)
http://www.crc-japan.com/mystery/san-j.html
http://www.kdn.gr.jp/~takion/no4.htm
http://www.tekipaki.jp/~iwashi/san.html
http://www.d1.dion.ne.jp/~u_maaya/sentozya-main.htm
http://www3.realint.com/cgi-bin/tarticles.cgi?mystery+283
http://www11.ocn.ne.jp/~baronh/kizoku/kizoku.htm
http://ikebukuro.cool.ne.jp/fleurdelis/sa/SaintGermain.htm
http://ikebukuro.cool.ne.jp/fleurdelis/sa/SaintGermainLaguerre.htm

*생 제르맹 백작 등장작품 (일어)
http://village.infoweb.ne.jp/~fwhw3229/94casa.html
http://homepage1.nifty.com/naokiaward/jugun/jugun81AT.htm
http://www14.big.or.jp/~touya/books/200204.html#kasouno-kishi
http://www.asahi-net.or.jp/~wf3r-sg/ntsaitonaoko.htm
http://www.asahi-net.or.jp/~FG4H-KTGR/book/archive/readh0101.html#kaso
http://www003.upp.so-net.ne.jp/takasaki-world/k-g.html
http://www.aa.alpha-net.ne.jp/mikial/meddle-1.html

*칼리오스트로 백작 관련 (영어)
http://www.occultopedia.com/c/cagliostro.htm
http://www.crystalinks.com/cagliostro.html
http://www.themystica.com/mystica/articles/c/cagliostro.html
http://www.worldwideschool.org/library/books/relg/socialeccltheology/MemoirsofPopularDelusionsV3/chap40.html

http://www.theage.com.au/articles/2003/07/24/1058853193712.html
http://home.freeuk.com/russica2/books/cagl/cagl.html

사과향기님의 댓글

사과향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시간여행자..혹은...지구외부에서 온 지식인..정도로 보여지네요...일단 글의 흐름만 본다면 말이죠.

과연 그는 누구일까요..ㅎㅎㅎ

난다도니님의 댓글

난다도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아~ 다 읽었다 ^^;; 정말 흥미롭게,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전에 tv프로그램"서프라이즈" 에 나오는걸 다 보진 못하고 잠깐 본적이 있었는데,지금처럼 자세하게 보긴 첨이네요. 

다 보고 나니 정말 그는 누구였을까??? 더욱더 궁금해 집니다...

세이야님의 댓글

세이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생제르맹 백작은 시간여행자의 범주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대요.
시간여행자 정도로 취급하다니..
무식쟁이가 진정한 능력을 가진자를 몰라도 넘 모르는정도의 것이죠.
프랑스에서 자신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모으게 한다음 전부 소멸시켰내요.
역시 달라도 너무다르군요.

호노룰루면봉님의 댓글

호노룰루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지금은 아다무스라는 이름으로 채널링을 하고있답니다. 관심있으면 읽어보시길. 상당히 재밌는 사람임

Total 1,459건 5 페이지
미스테리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비추천 날짜
1379 미소똘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57 6 0 09-04
1378 그대에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031 6 0 09-02
1377 비슈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57 6 0 08-29
1376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2 2 0 08-22
1375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279 4 0 07-14
1374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708 5 0 07-11
1373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871 4 0 07-11
1372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94 3 0 07-11
1371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66 4 0 07-11
1370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57 2 0 07-11
1369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63 1 0 07-11
1368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72 2 0 07-11
1367
한달간 화두 댓글+ 2
공중장악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4 2 0 07-09
1366 페가수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29 3 0 07-08
1365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994 3 0 07-07
1364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220 3 0 07-07
1363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46 2 0 07-05
1362 최악의소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89 0 0 07-05
1361 광석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064 4 0 06-30
1360 fbima…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64 2 0 06-29
게시물 검색

회원로그인

구글 OTP 인증 코드 입력

디바이스에 앱에서 OTP 코드를 아래에 입력합니다.

OTP 를 잃어버렸다면 회원정보 찾기시 해지 되거나,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이메일 인증으로 해지 할수 있습니다.

OTP 해지하기

론건맨 상위 순위 10

  • 1 사라랜스396,241
  • 2 선상반란302,220
  • 3 eggmoney117,537
  • 4 샤논115,847
  • 5 nabool99,640
  • 6 바야바93,966
  • 7 차카누기92,793
  • 8 기루루87,407
  • 9 뾰족이85,875
  • 10 guderian008384,405

설문조사

론건맨 싸이트가 열리는 체감 속도는 어떤가요.?

설문조사

론건맨이 부활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접속자집계

오늘
1,714
어제
1,912
최대
2,420
전체
14,216,913
론건맨 요원은 31,001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