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물에서 엄청난 세계가 보였네! > 자유 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뒤로가기 자유 게시판

한 방울의 물에서 엄청난 세계가 보였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허순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60회 작성일 15-04-19 03:13

본문

현미경은 인류의 시야를 확장시켰다. 사람의 정자가 난자를 뚫고 들어가는 모습을 담은 전자현미경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하리하라 눈을 보다
(17) 극미의 세계
토실토실 귀여운 아기에게 엄마가 안경을 씌운다. 귀여운 장난이라 생각했는데, 순간 아기의 표정이 바뀐다. 어리둥절함을 거쳐 놀라움을 지나 기쁨이 가득한 웃음으로. 아기는 지금 태어난 지 일곱달 만에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
루이즈라는 이름의 이 아기는 선천성 색소결핍(알비노)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로 인한 시력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피부와 머리칼, 그리고 눈동자의 색은 멜라닌 색소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가끔 멜라닌 유전자의 이상이나 멜라닌 합성 효소의 결핍으로 인해 멜라닌을 거의 만들지 못하는 색소결핍증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곤 한다. 선천성 색소결핍증을 가진 아이들은 피부색으로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의 부당성을 증명하듯, 인종에 관계없이 우윳빛 피부와 은발(혹은 백금발), 붉거나 혹은 아주 옅은 하늘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런데 멜라닌 색소의 부족은 단순히 신체에서 색만을 가져가진 않는다. 이들의 피부는 멜라닌을 만들지 못해 자외선에 의한 일광화상에 매우 취약할뿐더러, 무색투명한 홍채로 인해 안구 내부로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기 어려워 시각적 이상을 동반하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만, 이들에게는 빛이 오히려 어둠을 불러온다. 눈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할 수 없기에 빛이 밝은 곳에서는 심각한 눈부심 증상으로 거의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눈부심으로 인해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눈은 안구진탕증이 일상적으로 발생하여 더욱 시력을 떨어뜨린다.
우리나라 성인 둘 가운데 하나 안경 써
색소 결핍 정도가 클수록 시력 역시도 비례해서 나빠지는 편인데, 앞서 언급한 아기 루이즈 역시도 이런 경우였다. 의료진은 루이즈의 상태를 면밀히 검토해 자외선을 차단하고 아직 미숙한 루이즈의 눈이 제대로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수 안경을 제작했고, 이를 착용한 루이즈는 그동안 목소리와 촉감만으로 인지했던 엄마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의 얼굴을 난생처음 본 루이즈의 얼굴에는 기쁨의 함박웃음이 떠오른다. 그 웃음은 보는 이들조차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강력한 전염성이 있었다.
무언가 내 눈으로 본다는 것, 혹은 무언가가 내 시선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지금껏 존재조차 알 수 없었기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상이 그 존재의 증명과 동시에 내게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살면서 우리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머나먼 타국에서 생소한 문물을 접할 때, 늘 곁에 있어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것에 새삼 주목할 때, 식견과 안목이 넓고 높은 이들을 통해 세상의 이면을 간접 경험할 때, 무심코 지나치던 것들에 한발 다가가 세밀히 관찰할 때, 그리고 나무에만 집중해서 보다가 저만치 떨어져 숲을 보게 될 때. 하지만 이와 같은 심안의 확장은 주로 생각의 협소함이나 세심함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다양한 이면을 보려고 애쓰고, 다층적인 시선을 고려하도록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맹점이다. 이와는 달리 아무리 애를 써도 눈에 담기지 않을 때도 있다. 즉 눈이라는 신체 기관 자체가 지닌 문제와 한계로 인한 시야의 제한은 굳센 의지와 현명한 깨달음만으로는 극복하기 불가능하다.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눈의 장애는 노화다. 나이가 들면 시력이 떨어진다. 이는 노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서글픈 일일뿐더러 불편하기조차 하다. 실제로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는 만년에 시력이 떨어지자 노예를 부려 대신 글을 읽게 했는데, 편지 한 줄 읽으려고 일일이 노예에게 지시해야 하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라고 투덜거리곤 했다. 인간의 신체는 수십만년간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에도 노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떨어진 시력을 보강하고자 하는 욕구는 존재했을 것이다. 뿌옇게 흐려진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아련하기는 하지만, 어렴풋해 답답할 테니.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유물들 중에는 돋보기로 추측되는 유리세공품이 출토되기도 하고, 곱게 간 석영을 확대경으로 이용한 기록들이 있긴 했지만 사람들이 안경이라는 시력 보조장치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1000여년이 지난 뒤였다. 그 후 수백년간, 광학 원리와 눈의 구조, 렌즈 가공 기술들이 발전하면서 안경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였고, 현대인들에게 명실상부한 ‘제2의 눈’으로 자리잡게 된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8살 이상 성인들의 안경(콘택트렌즈 포함) 착용률은 54.8%. 성인 2명 중 1명 이상이 안경의 도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안경은 분명 우리에게 더 선명하고 더 밝은 세상을 더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안경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볼 수 없었던 것을 처음 발견한’ 루이즈의 경우보다는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사람의 눈으로는 애초부터 원래 볼 수 없었던 것, 즉 눈이라는 신체 기관이 지닌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의 눈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는 0.1㎜(10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보다 작은 물체는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영혼이나 정령의 존재는 대상 자체가 비물질적이기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할 수도 있음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오히려 물질세계에 속했음에도 보이지 않는 세계는 상상하기 더 어렵다. 지금 내 배가 부르니 저 먼 나라의 어딘가에서 굶주리는 파리한 아이들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같은 학교 안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기도 인정하기도 쉽지 않은 것처럼.
눈으로 보는 최소한 크기 0.1㎜
이보다 작은 물체는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노려봐도 안 보여
오랫동안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상상 못했다
네덜란드 포목상 레이우엔훅이
만든 최고 266배 배율의 현미경
인류 시야 확장시킨 결정적 공헌
“신은 왜 이런 작은 것까지 창조했나”
17세기 사람들의 신념에 결정타

최고 266배의 배율을 자랑한 당대 최고의 현미경을 만든 안톤 판 레이우엔훅의 초상화. 그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라 포목점을 운영하던 상인 출신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자신의 몸을 현미경 샘플 확보의 원천으로
이렇게 오래도록 닫혀 있던 인류의 시야를 확장시킨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다. 네덜란드 델프트 출신인 레이우엔훅은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라 포목점을 운영하던 상인 출신이었다. 포목상으로서 수많은 옷감들을 구별하여 등급을 나누는 일은 그의 일상이었고, 이를 위해 늘 그의 손에는 확대경이 들려 있기 마련이었다. 굵기가 일정한 가느다란 실로 촘촘히 짠 고급 옷감과 굵고 거친 실로 얼기설기 엮은 거친 천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차이가 났지만, 좀 더 세밀하게 옷감을 구분하려면 천을 확대해서 자세히 볼 필요가 있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확대경을 통해 천을 이루는 실의 본모습을 들여다본 레이우엔훅은 알고 있었다. 얼핏 매끄러워 보이는 실이 얼마나 많은 잔털들을 품고 있는지를, 미인의 삼단 같은 머릿결도 실제로는 거친 돌조각들을 겹겹이 쌓아올린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떠한 조작을 가한 것도 아니고 단지 조금 확대했을 뿐인데도,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꼼꼼했을뿐더러 손재주도 좋았던 레이우엔훅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유리세공법을 익혔고 이를 이용해 성능 좋은 현미경을 만들어냈다. 그가 만들어낸 현미경은 길이 7㎝ 정도로 셔츠 앞주머니에 쏙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최고 266배의 배율을 자랑할 정도로 당대 최고였다. 1675년, 드디어 레이우엔훅은 지금껏 인류가 알았던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의 존재를 처음으로 들여다보는 인물이 된다. 며칠째 줄기차게 비가 내리던 날,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바닥에 떨어진 빗물 한 방울을 떠서 올려 현미경을 갖다 댄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한 방울의 물 속에서 지금껏 자신이 보았던 그 어떤 작은 벌레보다도 천 배는 작은 것들이 가득 찬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빗방울은 놀라움을 그득 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수많은 작은 것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꿈틀거리거나 헤엄치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레이우엔훅은 자신이 처음 본 이 작은 생명체들을 흙먼지나 보푸라기 같은 부스러기들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극미(極微)동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번 마이크로월드의 비밀을 엿본 레이우엔훅의 호기심은 멈출 줄 몰랐다. 그는 계속해서 빗물뿐 아니라, 강과 호수와 연못과 우물의 물방울을 수집했고,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에 현미경을 들이댔으며, 심지어 자신의 몸을 현미경 표본(샘플) 확보의 원천으로 삼기도 했다. 인류는 그를 통해 한 방울의 연못물 속에 네덜란드 연방의 전체 시민 수보다 많은 극미동물이 살고 있음을 알았고, 동맥과 정맥은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혈관으로 이어진 순환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정액은 단지 끈적이는 액체가 아니라 미친 듯이 헤엄치는 정자들로 가득 찬 수영장과 같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보았던 것은 개인의 시선의 확장에서 멈추지 않았고 전 인류의 시야로 퍼져 나갔고, 단지 물리적 확인에서 그쳤던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에 대한 개안의 수준으로 날아올랐다.
태곳적부터 존재했으나 이제야 드러난 극미의 세계. 그 세계의 존재는 사람들이 지금껏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에 결정타를 날렸다. 17세기의 사람답게 경건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레이우엔훅이었기에, 그의 눈앞에 드러난 극미동물은 존재 그 자체로 혼란이었다. 감히 신의 의중에 토를 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다. 신께서 이렇게 작고 이렇게 다양한 존재들까지도 하나하나 다 창조하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지를. 게다가 신의 피조물 중 유일하게 그의 목소리에 부름을 받을 줄 아는 인간들이 전혀 인지할 수 없는 형태로 말이다. 크고 높고 위대하신 신께서 뵈지도 않을 만큼 하잘것없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그것도 서로 다른 형태와 특성을 가지도록 일일이 재단해가며 진지하게 만들어내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러울 정도였다. 실제로 진화론의 아버지로 유명한 찰스 다윈도 비글호 탐험 도중, 망망대해에서 걷어 올린 그물 속에 그득 찬 진귀하고 아름다운-혹은 괴상망측한- 생명체들의 존재를 대면하고는 “왜 신께서 이토록 아름답고 섬세한 업적의 결과물들을 감탄하고 찬양할 이조차 하나 없는 이 망망대해에 만들어 두셨는지”에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심안의 열림이 오랜 인내와 고된 수련의 결과로 힘들게 얻어지는 것에 비해, ‘극미동물을 제 눈으로 보는’ 말초적이고 단순한 경험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오래된 믿음에 균열을 가져왔다. ‘보인다는 것’의 힘은 생각보다 컸다.
더 많이 보면서, 더 많이 볼 수 없게 되다
레이우엔훅의 발견 이후, 인류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고 애썼으며 다양한 기구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영역들을 가시적인 범위로 끌어들였다. 현미경을 통해 극미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망원경을 통해 극대의 세계를 한눈에 담으려 하며, 초음파와 적외선과 엑스(X)선을 통해 가려진 내부와 감춰진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해 왔다. 그렇게 해서 우린 시각의 영역을 넓혔고, 인식의 범위를 확장했다. 보임이 준 존재감은 스스로를 구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미생물을 볼 수 없지만, 도처에 미생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보이는 것처럼 행동한다.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어쩐지 손이 무겁고 찝찝하게 느껴지는 것은 밖에서 수없이 많은 것과 닿았던 손끝에 그만큼의 먼지와 미생물이 달라붙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며, 사탕을 먹고 난 아이가 이 닦는 것을 거부하면 그 순간 부모의 머릿속에는 삼지창을 든 까만색의 악마들로 표상화된 뮤탄스균(충치균)이 아이의 여린 치아를 신나게 갉아먹는 것이 그려진다.
청결함의 기준이 단지 ‘오물이 묻지 않은’의 수준을 넘어, 항균, 제균, 살균을 넘어 멸균 수준으로 높아지는 것도, 피 묻은 일회용 외과장갑이 그 어떤 총칼보다도 무섭게 보이는 것 역시도 미생물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일어난 변화다. 보임이 인식을 가져왔고, 인식이 다시 보임으로 되먹임 고리를 형성한 것이다. 묘한 것은 우리가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면서, 그와 동시에 더 많이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보임과 인식 사이의 되먹임 고리처럼 보이지 않음은 인식적 부재로 이어지고, 인식적 부재는 존재를 지운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이유로 사실을 지우고 보이지 않도록 애쓰는 이들의 눈가림에 여전히 남아 있는 슬픔조차 볼 수 없는 되먹임 고리 속에 빠져 버린 것은 아닐까.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687336.html?fr_=sr1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94건 9 페이지
게시물 검색
Copyright © www.sunjang.com.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