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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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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티라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818회 작성일 11-06-1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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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 참전용사들에게 임진강 전투는 두고두고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임진강 전투가 2차대전의 어느 전투보다도 더 끔찍한 전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임진강 전투? 최악의 전투였지. 적이 너무 많았어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어느 병사의 회상입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625 참전 경력은 별로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냉전을 둘러싼 근대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625는 일반인들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다룬 영화만 보더라도 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에 비해서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전쟁에서는 승리가 중요한 것이죠. 총성이 시작된 곳에서 다시 총성이 멎어버린 전투, 무승부로 끝난 전쟁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는 어렵겠죠.” 어느 참전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 참전용사들은 2차 대전 때와 같은 영웅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퍼레이드는 물론 없었죠. 군인으로서의 경력에도 그다지 보탬이 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포로로 잡혔던 장교들은 이후 승진에 많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벌인 전투는 이래저래 그 참전용사들에게 이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정신적인 면에서 받은 충격이었습니다. 당시는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용어도 생소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에게 그런 증상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전투의 격렬함에서 받은 충격은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과정에서 피란민들의 비참한 모습, 피난길에 버려져 죽어간 무수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같이 그들에게는 충격이 되었고 때로는 자신이 치르는 전쟁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정신적 충격들이 일상생활로 복귀한 후에도 때때로 튀어나오곤 했던 것입니다.

중공군과 쫓고 쫓기는 악몽을 꾸고, 경찰이 죄수를 죽이는 모습이 꿈에 나타나고, 일을 하다가 갑자기 지도의 등고선이 산처럼 솟아오르고, 식사를 하던 식당이 갑자기 중국 식당으로 변하는 그런 일들이 참전용사들을 괴롭혔습니다. 한 참전용사는 전투 중 처음으로 죽인 중공군 병사가 어느 날 새벽 침대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그 후에도 그 중공군 병사가 자주 나타나는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참전용사들의 마음속에 시한폭탄처럼 박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나는 그 땅을 증오하고 있었어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국군이 학살을 자행하는 모습도 수없이 봤죠. 그 때를 생각하면 민주주의 같은 것 믿을 수가 없어요.” 한 참전용사의 말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전쟁이 고착상태에 빠지고 정전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민간인들도 많이 죽었죠. 우리가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하지만 사업과 관련해서이거나 정신과 의사의 추천으로 또는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한 참전용사들은 또 한번의 충격을 받습니다. 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발전한 한국의 모습 때문입니다. 쓰레기로 가득했던 흙 길은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되었고 피난민의 행렬로 메워졌던 그 길에는 차량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포화에 부서진 민둥산은 푸른 초목으로 덮였습니다. 빈곤이란 말은 잘 쓰이지도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많이 변한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의 포화에 망가져서 초라했던 사람들은 다 없어지고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전쟁 당시 겁에 질려 말이 없던 이 땅의 아이들을 기억하던 어느 참전용사는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어린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눈물을 흘릴 뻔 했다고 합니다.

한국전 참전용사라고 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받은 환영도 큰 보람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들이 싸웠던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환영은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참전용사는 유럽의 스키장에서 한국인 여행객 일행과 만났는데 반가운 마음에 자신의 경험을 잠깐 이야기했다가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그 참전용사는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참전용사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버려진 인생이라고 여겼던 1년 남짓의 기간이 이런 신천지가 탄생하는데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답을 구한 것이죠. 침대발치에 나타나던 중공군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참전용사들에게는 한국과 북한을 비교해 보면서 그 의미가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의 전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이후에 평화를 얻는 전쟁에서는 이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그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보람이 된 것이죠.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법이 없습니다(Freedom is not free). 반세기가 지난 지금 잊혀진 전쟁은 이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과 북한을 비교해보면 그 전쟁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어느 참전용사가 한 말입니다.

한 참전용사는 인생의 황혼기에 한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발견하고 역사, 음악,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50년 전 나는 내 인생의 일년을 주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준 그 보잘것없는 것으로 그 땅의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감사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나를 돋보이게 만들어 준 것도 여러분입니다. (계속)

<출처 : 마지막 한발 - 앤드류 새먼(Andrew Sa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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