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발 7 > 자유 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뒤로가기 자유 게시판

마지막 한발 7

페이지 정보

작성자 티라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888회 작성일 11-06-10 13:03

본문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1951 4 26, 글로스터 부대의 생존자들이 서울 남쪽 영등포에 모였습니다. 850명 중에 170명만이 남았습니다.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실종상태에 있었죠. 대대장은 글로스터가 한국을 떠나지 않게 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생사를 모르는 전우들이 돌아오면 맞아줄 자신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임진강전투의 비극적인 전멸이 있던 그날부터 10일 후 대대는 다시 작전을 시작했습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중공군의 계획은 29연대의 분투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29연대를 공격했던 63군은 27,000명 중에 사상자가 7,000명이 넘었습니다. 3일 밤낮을 전투를 치렀지만 서울은 고사하고 의정부조차 함락시키지 못했고 UN군을 고립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63군은 그 자리를 65군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29여단의 희생으로 UN군은 소중한 시간을 벌어서 서울 외곽에 한층 강화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UN군은 29여단의 희생을 교훈 삼아 측면에 위치한 부대들과 상호 균형을 맞추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전투 중 고립된 부대들이 인접 부대들에 의해 구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습니다. 방어선이 그만큼 단단해진 것이죠.

429일과 30일 밤 중공군이 사라졌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중공군의 5번째 공세는 서울 북쪽 9 킬로미터까지 진출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을 포기하고 물러간 것입니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이지만 UN군은 한국의 수도를 지켜냈습니다. 만일 이 전투에서 중공군이 UN 3개 사단을 궤멸시켰다면 625의 최종 승리는 중공군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중공군이 궤멸시킨 부대는 글로스터 대대가 유일했습니다. 펑더화이의 계획에 못 미쳐도 한참을 못 미친 결과였습니다.

51 4월 한달 동안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미군 607명이 사망했고 891명이 실종되었습니다. 한국군은 518명이 사망했고 실종자 수는 7,465명에 달했습니다. 다른 UN군은 217명의 전사자와 924명의 실종자를 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사상자는 70,000명에 육박한다는 추정치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531 29여단의 병사들은 임진강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고 산과 계곡은 초록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죽은 동료들을 찾아 식별해야 한다는 임무만 제외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한 풍경이었습니다.

죽은 병사들은 자신들이 쓰러진 그곳에 누워있었습니다. 중공군은 흙을 끼얹어 시신들을 덮어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그 시신들을 파내어 수습하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이마에서 흐른 땀냄새가 시체 썩는 냄새와 뒤섞였죠. 땀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입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 맛이란 죽은 병사의 맛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끔찍했죠어느 병사의 회상입니다.

수습된 병사들을 참호에 묻고 그 자리에 전쟁묘지관리위원회의 표지를 붙였습니다. 나중에 시신처리반이 와서 뒤처리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포로가 된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중공(중국)이나 북한은 신생국으로서 제네바협정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포로를 일종의 범죄자로 다루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포로들을 대부분 사살했고 포로들에 대한 대우가 비인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될수록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수용하면서 51년 후반부터는 많이 관대해졌다고 합니다. 편지도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영양상태나 의료시설은 형편없었죠. 그 때문에 사망한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한가지 특이 한 것은 중공군 보다는 북한군이 포로를 다루는 데 더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다고 합니다. UN군 병사들은 북한군 보다는 차라리 중공군의 포로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미군 포로의 절반가량이 북한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는데 이로 인해 51년 후반에는 모든 포로들의 처리가 북한군에서 중공군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정전협상에서 포로들의 숫자는 상호간에 중요한 협상수단이었습니다. 중공군은 65,000명의 포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는 12,000명이었습니다. 그 중 영국군 포로는 1,060명이었는데 82명이 사망했습니다.

1953 7 27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85일에서 96일에 걸쳐 포로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죠.

<출처 : 마지막 한발 - 앤드류 새먼(Andrew Salmon);

퍼가는 건 자유입니다만 내용 변경이나 상업적 이용은 금지입니다.>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Total 14,260건 509 페이지
게시물 검색
Copyright © www.sunjang.com.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