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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군인 병원이 부산에 있었던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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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1건 조회 674회 작성일 09-09-0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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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 산책] 한국 최초의 서양 병원은 '제생의원'?

[프레시안 박형우 연세대 교수,박윤재 연세대 교수]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제생의원(濟生醫院)'을 거론하는 글을 접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인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그 주장은 제생의원이 1877년에 설립되었으니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는 것이다. 시기상으로 보면 제중원보다 8년가량 앞선다. 정말 제생의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일까?

한국의 문호 개방

▲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동은의학박물관
1876년 맺은 조일수교조규(강화도조약)는 한국을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근대는 자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서양이 아닌 '서양화된 동양' 즉 일본을 통해 한국에게 다가왔다.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근대를 미리 맛본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다치거나 병에 걸린 일본인을 치료할 병원은 빠질 수 없는 시설이었다. 더욱이 영사재판권을 장악한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사상자의 검시나 진단을 담당할 의사는 반드시 필요했다.

불안한 한국의 위생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낯선, 일종의 '개척지'였다. 개척지는 언제나 위험했다. 질병, 그중에서도 일본에 없는 풍토병이 유행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위생 면에서 특히 위험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한국에는 위생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한국인들이 가진 위생 사상은 '유치'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과 섞여 생활할 경우 언제 전염병에 걸릴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한국은 일본 거류민들에게 불안한 환경이었다. 일본 정부는 그 염려를 없애줄 필요가 있었다.

일본 관립병원의 설치

▲ 제생의원. ⓒ동은의학박물관
일본 정부는 한국이 개항장을 열 때마다 그곳에 관립병원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1876년 수신사와 동행하여 부산에 체재 중이던 일본 군의(軍醫)는 병원이 설립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일본 정부에 전했다.

부산에 제생의원이 설립된 시기는 1877년 2월 11일(음력 1876년 12월 29일)이었다. 1880년 개항한 원산에도 영사관의 설치와 함께 일본인의 질병 치료를 위해 병원이 설치되었다. 이름은 생생의원(生生醫院)이었다. 의료진으로는 육, 해군의 군의가 교대로 임명되었다.

인천에는 1883년 군의가 외무성 고용 의사의 형식으로 파견되면서 영사관 부속 의원이 개원하였다. 이미 1880년 서울에 공사관이 개설되면서 부속 의사로서 군의가 부임해 있었지만 정식으로 공사관 부속의 병원이 개원한 것은 1883년이었다.

일본 군의의 파견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의사로는 군의들이 파견되었다. 당시 개항장은 일반 개업의들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일본인 거류민들이 지나치게 적었기 때문이다. 진료 수익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개업의들에게 내한은 무모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공백을 군의들이 메웠다.

군의들은 진료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항장 병원에 파견하기에 적격이었다. 하지만 군의가 파견된 이유가 거류민 수의 부족에만 있지는 않았다. 일본은 군의를 파견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무료 혹은 저가 진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국인의 마음을 잡아라!

일본 병원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치료를 병행하였다.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가진 인식은 좋지 않았다. 거류지를 한발만 벗어나도 일본인을 의심하고 모멸하는 공기가 가득하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거류지 바깥으로 여행하던 일본인이 살해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의술은 이런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개항장에 설립된 일본 병원에서는 한국인 치료를 병행하였다. 생생의원의 경우 개원 첫 해에 일본인보다 조선인을 더 많이 치료할 정도였다.

더욱이 일본 병원에서 시술되는 의술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 즉 서양 의학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개항 이전부터 서양 의학을 수용, 발전시키고 있었다.

'난학(蘭學)'으로 통칭되는 서양 학문의 주류는 서양 의학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서양 해부학 서적을 독자적으로 번역할 정도였다. 서양 의학 수용의 속도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가속화되었다. 군의들은 그 수용의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군의의 육성과 부국강병

일본이 군의 육성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가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던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실현하는데 있었다. 서양 의학이 외과술에서 장점을 보이고 있었던 만큼 부상병 치료에도 뛰어났다. 따라서 서양 의학을 내용으로 한 군진의학(軍陣醫學)은 '강병(强兵)'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분야였다.

일본 육군의 경우 군의 양성을 위해 내부에 별도의 군의학교를 부설하기도 했다. 초창기에 5년제였던 군의학교는 이후 의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군진의학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군의들은 일본의 부국강병, 외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외 침략을 앞장서서 이끌고 있었다. 그 군의들이 한국인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일 우호에 공헌한 군의

군의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평가는 좋았다. 종래 치료받지 못하던 질환을 치료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생의원의 한 군의는 부스럼 때문에 얼굴뿐 아니라 목까지 종양이 퍼져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던 환자를 절개 수술을 통해 치료하였다. 그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산 제생의원에 파견된 고이케 마사나오(小池正直)는 당시 일본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도쿄대학 의학부 출신이었다. 그는 나중에 일본 육군의 군의총감으로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1883년 4월에서 1885년 3월까지 진료한 환자에 대한 간단한 통계를 <계림의사>란 책 속에 포함시켜 1887년 발행하였다.

서울 공사관 부속의원에서 근무하던 군의는 내, 외과 모두에 기량이 우수했을 뿐 아니라 환자를 대하는 태도도 친절하고 따뜻했다. 더구나 머리까지 희끗희끗하여 연장자를 우대하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 고이케 마사나오(小池正直)와 계림의사(1887). ⓒ동은의학박물관

인류애로 포장된 제국주의

군의는 한일 우호에 큰 공적을 세우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치료해준 일본인 의사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일본 군의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진료를 통해 한국인들의 신용을 얻게 되면 자연히 서로간의 우의도 두터워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우호는 순수한 인류애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일본 군의들의 진료에는 정치적 색깔이 섞여 있었다. 군의들은 자신의 활동을 국가의 영광과 연결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존경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예일 뿐 아니라 황국(皇國)인 일본의 영광"이기도 했다.

군의의 파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일본인 관리는 좀 더 노골적이었다. "한국인을 회유하여 일본을 존경하고 의뢰하며 우러러보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개화의 단서를 만드는데 의학은 첩경"이 될 수 있었다. 일본 의사들의 진료를 통해 한국인들은 일본의 선진성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 일본이 지도하는 근대화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수용에서 침략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일본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진료는 이후 진행되는 한국 침략의 길을 닦는 일이었다.

제생의원은 한국 병원인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제생의원은 한국 병원일까? 한국 병원이 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은 만족시켜야 할 것이다. 주체가 한국이거나 객체가 한국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인이 설립하였거나, 한국인을 위해 설립한 병원이어야 한다.

하지만 제생의원은 일본 정부가 일본인 치료를 위해 세운 병원이다. 한국인을 치료하기도 했지만, 설립 목적은 아니었다. 일본이 일본을 위해 세운 병원을 한국 병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국제화'이다. 더구나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병원이었음에랴.

제생의원의 변천

▲ 부산공립병원 제8대 원장 今村保(1901). ⓒ동은의학박물관
1877년 설립된 제생의원은 부산의 일본 거류민이 증가하면서 1885년 9월 관제가 폐지되고 일본의 부산거류민단이 운영하는 부산공립병원(釜山共立病院)으로 인계되었다. 이 병원은 1893년경 공립(公立)으로 개칭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1905년 통감부령에 의해 거류민단법이 발포되어 부산거류민단이 설립되자 부산공립병원(釜山公立病院)은 1906년 부산거류민단립병원(釜山居留民団立病院)으로 개칭되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1914년 4월 부산거류민단이 폐지되면서 병원도 부산부립병원(釜山府立病院)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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