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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대의 선사시대 거석물 -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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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667회 작성일 06-09-2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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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01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고인돌. 고인돌과 뒤에 보이는 교회 사이에 고수천이 흘러내리는데 그 강의 흐름과 고인돌의 방향축이 일치한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상류쪽에도 고인돌군이 있다.


고인돌(支石墓·Dolmen)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그 보존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향토학자들에 따르면 구한말과 일제시기 고인돌은 마을 앞의 신작로를 내거나 저수지를 만드는 데까지 마구 동원됐다고 한다.

국토개발 시기에도 각종 토목공사로 그 훼손의 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도시와 공단건설, 농지정리, 도로공사, 댐 건설현장에서 고인돌들은 중장비에 의해 쪼개지고 물 속에 잠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렇게 유실된 고인돌도 수만기에 달할 것이란 지적이다.

그 러나 역설적이지만 국내에서 고인돌 연구가 본격화된 것 또한 국토개발 덕분(?)이었다. 7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대형 댐(소양·팔당·안동·장성·대청·영산강·남강·충주·임하·주암·합천댐 등)이 건설되면서 수몰지역별로 긴급 구제발굴이 잇따라 이뤄진 때문이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를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로 보거나 한(漢)나라의 일부로 보던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의 신석기∼청동기시대는 복원됐고, 그것이 오히려 일본 야요이(彌生)문화를 촉발시켰다는 가설도 입증됐다.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물로 꼽히는 고인돌은 북유럽에서 출발해 서유럽·중유럽과 영국·이베리아반도·북아프리카·중동으로까지 퍼져나갔고, 아시아에서는 인도와 인도네시아·중국·한국·일본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그 가운데 한반도의 고인돌은 그 규모와 형태면에서 단연 첫번째로 손꼽힐 만하다.


사진#02
▲고인돌 덮개돌 아래서 대표적으로 발굴되는 마제석검.


===== 전세계 고인돌 절반이 한반도에 ====

지구상에 존재하는 7만여기의 고인돌 중 절반에 가까운 4만여기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 남한에 3만여기, 북한에 1만여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수를 7만∼8만기까지 늘려 잡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듯 최근에도 새로운 고인돌군(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지난 3월 대표적인 고인돌의 고장으로 꼽히는 전북 고창과 강화도 고려산에서 고인돌 무덤떼가 새로 발견돼 고증작업이 진행중이고, 지난해 8월에는 서울대박물관팀(관장 崔夢龍)에 의해 울릉도 고인돌도 처음으로 보고됐다. 울릉도 고인돌은 특히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于山國)의 기원 연대를 청동기 이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성과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 고인돌은 미술사적 가치도 평가받을 만하다. 유홍준(兪弘濬·영남대) 교수는 한 글에서 ‘세계 미술사의 지평에서 한국 미술을 평가할 때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첫번째 유물은 단연 고인돌’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반도 곳곳에 선사시대 고유 거석기념물들이 떼를 이뤄 장관을 이루는 것과 우리 고인돌 특유의 멋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내 고고학자들은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는 동아시아 거석문화권의 중심권”이라는 사실에 누구나 동의한다. 중국에서는 황해에 인접한 랴오닝(遼寧)·산둥(山東)·저장(折江) 일대에서 3백50여기,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인접한 규슈(九州)지역에 5백5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됐지만 그 형태의 다양성이나 분포도에서 한반도에 크게 못미친다. 인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의 고인돌도 수백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한반도에 고인돌이 집중돼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기원은 어디로 보아야 할까. 한반도 기원설은 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한반도의 고인돌은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그 가운데 대동강 유역의 평양 일대와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지역에서 특히 많은 고인돌군이 발견된다. 북한 학자들에 따르면 평양 일대에만 모두 1만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 일대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2만기에 달해 전국적으로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인다.

최몽룡 교수는 지난해 12월 전북 고창에서 열린 ‘고인돌 관련 국제학술회의’에서 “고인돌사회=단군조선=청동기시대=노예순장제사회=최초의 국가 형성이란 등식을 규명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 고인돌은 주로 해안과 하천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국내 고인돌은 많은 군집지 가운데 전북 고창·전남 화순·경기 강화의 고인돌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전북 고창군 죽림리 일대 고인돌 무리(사적 제391호)는 동양 최대로 꼽힌다. 이곳은 지난해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무려 1천4백여기의 고인돌 무덤떼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고창지역은 특히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이 섞여 있다. 고인돌의 형식변천 과정을 한눈에 조명할 수 있고 바둑판식 거석화가 이곳에서 이뤄진 것으로, 다방면에서 보존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03
▲전남 고흥군 동강면 고인돌. 덮개돌 높이가 1.5m 가량으로 밭 가운데 있다. 바로 옆에도 3m 높이의 사각기둥 상석이 올려진 아름다운 고인돌이 있다.



==== 고창 죽림리 고인돌 무덤떼 동양 최대 =====

화 순지역 고인돌 무덤떼(사적 410호)는 불과 3년 전에 발견됐다. 96년 목포대 이영문(李榮文) 교수팀의 화순 능주 일대 유물·유적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견돼 학계에 보고됐다. 화순 고인돌 계곡에는 남방식·북방식 고인돌 수백기가 산재해 있는데, 특히 이곳에서는 고인돌 채석장과 함께 머릿돌 무게가 무려 2백t에 달하는 고인돌이 발견돼 주목받았다.

한편 강화도 일대에는 80여기의 고인돌이 보존돼 있는데 특히 강화 부근리의 ‘키다리 고인돌’(사적 137호)은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그 외향도 수려할 뿐만 아니라 덮개돌 무게가 무려 50t에 달해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꼽힌다.

한 반도 고인돌의 형식과 관련한 구분은 일반적으로 북방식·남방식·개석식(蓋石式) 고인돌 등 세가지로 대별된다. 작고한 임병태(林炳泰) 전 숭실대 교수는 이를 외형에 따라 탁자식(卓子式)·기반식(碁盤式)·무지석식(無支石式)으로 구분하고 지하 매장 형태에 따라 다시 세분화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인돌과 관련한 용어들은 학자에 따라 아직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북 방식 고인돌은 보통 잘 다듬어진 덮개돌(머릿돌·상석)을 위에 올리고 3, 4개의 비교적 평평한 굄돌로 짜맞춘 상자 모양의 석실이 땅 위로 노출돼 있다. 책상을 닮아 탁자식 고인돌로 부르고 대동강 유역과 중국 랴오둥(遼東) 일대 구릉이나 산 중턱에 거대한 북방식 고인돌이 남아 있다.

남방식 고인돌은 판석을 세우거나 깬 돌로 쌓은 무덤방(墓室)을 땅 밑에 만들고 그 부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어 기반식으로도 불린다. 덮개돌이 큰 것은 주로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많이 보이고, 일본이나 동남아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을 괸 형태다.

이에 비해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묘실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랴오둥반도와 한반도, 일본 규슈지방에 주로 분포한다. 이는 지석이 없는 남방식 고인돌로, 무지석식 고인돌로 불리기도 한다.


사진#04
▲전남 순천시 송광면 고인돌 공원. 주암댐 건설 때 수몰지역 고인돌을 모아 만든 공원이다. 사진 아래는 덮개돌 밑에 있는 석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 힘 얻는 고인돌문화 한반도 자생설 =====

한 반도 고인돌의 기원(起源)과 관련, 확실한 정설은 없지만 전파설과 기원설로 나뉜다. 전파설은 또 남방설과 북방설로 갈려 있다. 남방설은 한반도의 벼농사(稻作) 전파와 연관돼 있다. 한양대 김병모(金秉摸) 교수는 “고인돌 사회는 정착농업경제에 기초한 씨족부락단위 사회로 원시신앙이 존재했다”면서 난생(卵生)신앙과 관련된 남방설을 주장했다.

그는 고인돌은 당시의 또다른 거석물인 입석(立石·선돌)과 함께 거석숭배 신앙을 가진 남방문화집단에 의해 해류를 따라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석관묘가 ‘천손강하(天孫降下)신앙’을 가진 북방 시베리아 계통인 반면 지석묘는 북위 45도 이남의 남방계 문화로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북방기원설은 한반도 청동기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북방식 고인돌이 중국 랴오닝지역의 석관묘(돌널무덤)로부터 발전했다는 것이다.

석 관묘는 구조상으로 러시아 미누신스크 지방의 안드로노스(Andronovo)기에서 시작된 것이 동진, 몽고·열하(熱河)를 거쳐 동북아까지 전파됐고 ‘비파형 동검문화’의 유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고인돌의 부장품 유형과 관련된 것으로, 그동안 한반도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와 돌칼(마제 석검)·돌화살촉(석촉)·붉은토기(紅陶)와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청동촉·무문토기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땅 속은 이전처럼 석관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땅 위에 거대한 머릿돌을 올려놓은 것은 저승에 대한 관념 변화와 새로운 권위의식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엄청난 인력의 동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은 유목사회보다 오히려 농경사회에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전 파설에 맞서 제기된 한반도 자생설도 만만치 않다. 이영문 교수는 “아시아지역 고인돌의 중심 분포지가 우리나라이고, 형식도 북쪽에 북방식 고인돌이 많고 남쪽에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비슷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랴오닝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남·북방의 문화가 융합한 독자적인 고인돌문화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일부에서는 발해 연안의 랴오둥·산둥반도와 한반도 고인돌이 서로 같은 계통임을 밝히고 고조선시대의 문화영역이기도 한 이 일대의 고인돌 문화가 자력 발생한 것으로 보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 고인돌의 신비, 風水와도 관련 ====

고 인돌의 형식과 관련한 상호관계에서도 학자들간에 이견이 적지 않다. 일본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개석식에서 출발해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발달한 것으로 주장했지만 국내 학자들은 대체로 북방식에서 개석식→남방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작고한 김원룡(金元龍) 전 서울대 교수는 “북방식 고인돌의 무너진 형태가 남방식 지석묘의 등장을 불러왔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와 함께 한반도 벼농사의 전래와 관련해 북로설과 남로설의 가설을 처음 제시하기도 했다.

고인돌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연구 초기, 제단·주거·무덤으로 구분됐지만 차츰 무덤과 제단으로 대별돼왔다.
최몽룡 교수는 당시 고인돌 사회를 ‘족장사회’였고 혈연을 바탕으로 어린 아이까지 묻을 수 있는 세습신분제를 띤 계급사회라고 보았다. 결국 고인돌군은 지배가족의 공동묘지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이 영문 교수는 전남지역의 고인돌들을 조사한 뒤 대부분의 고인돌 밀집지역을 17개 마한소국과 지역적으로 비정했다. 이 지역 고인돌들이 적게는 2백∼3백기, 많게는 6백∼8백기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고인돌 사회가 마한소국으로 계승·발전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지건길(地健吉) 주(駐)프랑스 한국문화원장은 한 지역이나 묘군(墓群)에서 나타나는 고인돌 크기를 피장자의 신분차이와 관련해 설명했다. 그는 또 지금까지 고인돌이 소수 지배계급의 무덤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무리를 짓고 있는 고인돌군이 강의 흐름이나 산맥의 방향과 관련이 있고, 산세(山勢)나 수세(水勢)에 따른 것으로 볼 때 이는 자연숭배사상과 관련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고인돌의 무덤 방향이 물의 흐름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또 고인돌 사회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해안지역에 위치한 고인돌의 방향은 주로 같은 지역에 위치한 반도(半島)를 향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학자들에 따라 무덤 고인돌과 의식용(儀式用) 제단 고인돌의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결 국 많은 학자들은 고인돌의 근원형태를 돌널무덤에서 찾고 있다. 발굴유물들로 볼 때 고인돌 사회는 돌넘무덤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러나 지역에 지하의 매장법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인돌은 지상에 거대한 표지물을 추가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보이고 있다.

고인돌 사회는 큰 돌을 다루고 운반하는 데 상당한 인력과 시간·경비를 동원할 수 있는 체제였고, 그 돌을 쪼개고 운반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수준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간에는 고인돌 사회의 문화적·의례적(儀禮的)인 의미와 관련된 주장도 적지 않다.


사진#05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토성 안 밭 가운데 있는 고인돌. 덮개돌이 마치 흙으로 빚은 것처럼 매끄럽다.


==== 세계문화유산 지정 앞둔 한국 고인돌 ====

첫 째로 앞서 설명한 고인돌 덮개돌(상석)의 축이 강·산맥·반도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자연숭배 내지 죽음·재생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상석 아래에서 붉은 흙과 붉은 간토기가 발견되는 것도 영생을 기원하는 내세관을 뒷받침하며, 피장자(被葬者)의 재생을 기원하기 위한 지킴돌들이 고인돌 주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둘째로 고인돌의 덮개돌 위에서 흔히 인공적인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우선 여러개의 구멍(성혈)들은 친족집단의 수를 나타낸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또 덮개돌이 거북 모양을 띠고 있는 것은 다산(多産)과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의식 때문이라고 해석됐다. 고인돌이라는 지상표지물은 결국 권위의 상징물인 동시에 조상숭배 관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한반도 고인돌은 세계 거석문화의 발생, 분포 및 전파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특히 밀집 분포도나 규모, 다양한 형식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 20여개국이 참가한 세계거석문화협회(회장 柳寅鶴·한양대 교수)가 결성되고 2000년에는 한국에서 세계거석문화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다.

국 내 고인돌문화와 유럽을 비롯한 해외 거석문화의 비교연구도 활성화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학계와 정부·지자체가 공동으로 고창·화순 고인돌지역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도 추진돼왔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오는 7월에 최종 결정될 예정이다. 한반도 고인돌문화의 올바른 복원을 위한 남북한 고고학계의 공동연구는 과제로 남아 있다.

----꽤 오래된 글이긴 한데, 여기엔 없는 것 같아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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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단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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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 아쉬운 건 누가 고인돌 발원이 북유럽이라고 하던가여?
오히려 우리 잃어버린 역사 한단고기상에 있는 그 시대의 상징이 아닐까요?
돌맹이가 돌맨으로 이어졌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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