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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지하궁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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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웨이포인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731회 작성일 04-08-1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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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5일, 중국 싼시(陝西)성 시안(西安) 37㎞ 떨어진 린퉁(臨潼)현.


진(秦)나라 당시 무사들의 토용(진흙으로 빚은 허수아비의 일종)이 가득 발견된 병마용(兵馬俑)박물관. 그 앞에 있는 인공 산인 여산(驪山)의 진시황릉(秦始皇陵) 동쪽 기슭에서 중국 고고학자들의 조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들은 중국 지질국 소속 물리탐사 대원으로 지난해 11월부터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진시황릉에 대한 대대적인 탐사 작업에 나선 터였다.

2명의 대원이 '뤄양(洛陽)삽'이라는 발굴도구를 이용해 힘껏 야산의 지표면을 뚫기 시작했다. 뤄양삽은 100여 년 전 허난성 뤄양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도굴꾼이 발명한 도구다. 삽끝이 반원통 모양으로 지하에 있는 흙을 담을 수 있어 지하의 토양이나 화합물을 통해 지하 유적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삽이 1m, 2m 지하로 내려가다가 30m에 이르자 갑자기 '통, 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삽이 지하에 있는 물체를 건드린 것이다. 그동안 역사의 수수께끼였던 지하궁전의 존재와 그 위치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뤄양삽'이라는 발굴도구 이용

대원들은 이 삽에서 푸른 빛을 띠는 돌 부스러기와 흙을 발견했다. 지하의 흙을 분석한 결과, 이는 석회암 성분으로 화강암과 편마암이 주로 있는 여산 부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시안을 가로지르는 위하(渭河) 북쪽의 위북(渭北) 지방에 두루 분포한 것이었다.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진시황릉 지하궁전을 짓는 데 쓰이는 석재가 위북에서 옮겼다는 사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뤄양삽과 같은 전통적 유적 발굴 작업을 통해 진시황묘의 실체 확인은 유적 발굴을 위한 첨단기술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국 정부가 진시황릉 조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지난해 초였다. 1962년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한 이후 40년 동안 70만 개의 탐사공을 뚫었지만 성과가 지지부진했다. 그러자 과학기술부 주관으로 진행 중인 첨단 하이테크 기술 응용 사업인 '국가 863계획'에 포함시킨 것이다. 지질조사국을 은퇴한 류스이 단장은 과기부의 초청을 받아 이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됐다. 그는 물리탐사와 항공 관측을 병행한 탐사 작업을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였다. 류스이 단장과 돤칭보 팀장이 물리탐사를 통해 진시황릉의 신비를 벗기는 데 앞장서고 있다면 중국석탄지질총국 원격탐지감지국 소속의 탄커룽(譚克龍)-완위칭(萬余慶) 연구원 등은 항공기를 이용한 항공 관측으로 진시황릉의 수수께끼를 벗기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말부터 올 연초까지 3개월 동안 항공기를 띄워 적외선 감지기로 지형에 변화가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챙기고 있다.

이번 탐사반은 올해 초 기초탐사를 통해 '지하궁전은 진시황릉의 봉토(무덤 위에 쌓아올린 흙) 아래 있다' '지하궁전 주변에는 성벽이 둘러싸여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지하궁전의 위치와 범위, 깊이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묘실 배수로 지금도 완벽 가동

이어 탐사대원들이 뤄양삽을 동원한 전통적인 발굴방법을 이용해 그동안 첨단과학기술의 측정으로 얻어낸 잠정 결론을 실제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가 지난 7월 15일 지하궁전의 위치를 확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이룬 탐사 성과는 11월 27일 베이징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돤칭보 현장팀장이 공개했고 이 사실을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탐사반이 이번에 새로 밝혀낸 사실은 진시황의 유해를 안치한 지하궁전이 진시황릉 봉토 지하 35m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또 지하궁전의 묘실이 동서 170m, 남북 145m의 직사각형으로 축구장의 1.5배 크기의 중국 최대의 묘실임이 드러났다. 이밖에 담장이 지하궁전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도 새로 확인했다. 묘실을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중국 역사상 처음 보는 것이다.

황릉 지표면의 수은 함량을 조사한 결과 정상보다 20~30배 많음을 확인했다. 사기가 기술한 '수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하(大河)를 만들고 그 수은을 흐르게 했다'는 내용이 사실임이 확인된 것이다. 묘실이 물에 잠기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것은 묘실에 만든 배수로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도 이번 탐사에서 밝혀냈다. 이밖에 지하궁전에 금속 부장품이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도 얻었다.

사진#1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첨단과학기술을 통해 신비를 벗고 있는 진시황릉이지만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 것도 적지 않다.



1. 진시황릉의 봉토는 어디서 가져왔는가
진시황릉을 쌓아올린 봉토는 높이 76m, 너비가 350m에 이른다. 이는 중국 최대 규모다. 도대체 흙은 어디서 가져왔는가.
린퉁 지구에서 오래 전해지는 말은 당시 진나라 수도였던 센양(咸陽)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것이다. 〈사기〉(史記)는 황릉을 판 흙으로 야산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서인 〈수경〉(水經)에 따르면 진시황릉에서 5리 떨어진 어지(魚池)에서 팠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진시황릉에서 2.5㎞ 지점에 지세가 낮은 곳에 어지라는 이름의 못 하나가 있다. 한편 항공 관측을 통해 진시황릉 남쪽 여산 기슭에서 거대한 계곡을 발견했다. 이곳은 깊이 30m에 이르는 계곡이며 인공적으로 흙을 파낸 흔적이 남아 있다. 항공 관측을 맡았던 중국 석탄지질 총국 연구원들은 산 아래쪽의 어지에서 흙을 파서 옮기기보다는 산기슭에서 흙을 파는 것이 쉬웠을 것이라고 주장, 이곳의 흙이 봉토를 만드는 데 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진시황이 옆으로 1,000m 파라고 한 까닭은
역사서 〈한구의〉(漢舊儀)에 따르면 기원전 210년, 승상(丞相)인 이사(李斯)는 진시황에게 72만 명을 동원해 여산 능묘를 수축하고 있으며 이미 아주 깊숙이 파들어가 땅끝까지 도달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진시황은 다시 '옆으로 300장(丈)을 더 파라'고 지시했다. 1장은 3.33m다. 300장이면 1,000m를 옆으로 파라는 것이다.
왕쉐리(王學理) 싼시성 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진시황이 생전의 부귀영화를 사후에도 누리고 싶어했다"고 지적했다. 진시황은 지하궁전에다 셴양(咸陽)의 궁전과 똑같은 것을 만들고 싶어했다. 진시황은 생전에 중국 전역을 두루 다닌 것과 마찬가지로 사후에도 지하궁전에서 천하를 주유하려는 뜻에서 사통팔달의 길을 뚫게 했다는 것이다.



3. 항우는 진시황릉을 태웠나
〈사기〉는 항우가 진나라를 점령한 뒤 진나라 궁궐을 불태웠고 3개월 동안 계속 탔다고 기술하고 있다. 진나라 궁궐이 아방궁인지, 아니면 진시황릉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재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아방궁의 경우 전체 유적지 20만㎡ 가운데 몇 군데 불탄 흔적만 발견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일부 전문가들은 항우가 아방궁을 불질렀다는 기록은 부정확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발굴 초기여서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그러나 진시황릉은 얘기가 달라진다. 항공 관측 결과 진시황릉에서는 대량의 불탄 흔적을 발견했다. 이것이 항우가 저지른 행동인지는 속단하기 힘들다.



베이징/홍인표 특파원 iphong@kyunghyang.com



발췌:http://www.khan.co.kr/nm/20031230/culture/contents.php3?id=6190&path=/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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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현진님의 댓글

웨이포인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역사서에 기록되어있는 대로 설치가 되어있다면 정말 인디아나 존스나 툼레이더등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연출되겠군요... 흥미진진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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