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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과 대 쥬신국( 구리국) 에 대한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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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7건 조회 1,666회 작성일 04-06-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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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용은 기존 역사학자들은 물론 중국, 일본학자들까지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단고기에 나오는 치우천자의 쥬신국의 역사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우리역사상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우리역사의 일부이다. 어느 나라이건 자기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승하여야 함에도 어찌된일인지 우리 학자들은 있는 것도 숨기고 위서임을 밝히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이 어찌 우리민족의 자손이라 할 수 있는 가 ?
진실을 얘기하는 학자들은 매도하여 강단밖으로 몰아내고 천년만년 일제식민사학의 잔재를 목숨처럼
여기며 살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가 ? 이제라도 그 더러운 민족정기 말살의 앞잡이 노릇을 그만두고 민족앞에 참회의 용서를 빌기를 진정 경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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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九黎)국 시대

# (주) 黎 : 사서에 의하면 국호로 사용할 때는 "나라이름 리"로 발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우리의 역사서(한단고기)에는 "한웅(桓雄)"시대 라고도 한다

16대 천자 1,565년 존속 (BC 3898년 ~ BC 2333년 까지 존속)

▣ 현존 기록

단기고사 (삼성기, 태백일사)

규원사화

중국 25사중 하나인 사기권 1 (한 무제때 사마천 저 : 중국 최초의 정사)

인터넷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대만의 故宮【寒泉】古典文獻全文檢索資料庫"을 접속하여 확인 가능
http://210.69.170.100/s25/ (故宮【寒泉】古典文獻全文檢索資料庫)에 가서 '史記'를 선택한 다음에 제일아래 항목선택 버튼을 누르고 다시 사기본기를 선택하고 아래 검색항목에서 '蚩尤'를 검색

▣ 치우천자는 누구인가 ? 九黎국 14대 천자 = 한단고기 : 신시역대기에 나오는 14대 천자

< 역 대 기 >

- 1세 (B.C3898) : 거발한 한웅, 재위 94년, 120세
- 2세 (B.C3804) : 거불리 한웅, 재위 86년, 102세
- 3세 (B.C3718) : 우야고 한웅, 재위 99년, 135세
- 4세 (B.C3619) : 모사라 한웅, 재위 107년, 129세
- 5세 (B.C3512) : 태우의 한웅, 재위 93년, 115세
- 6세 (B.C3419) : 다의발 한웅, 재위 98년, 110세
- 7세 (B.C3321) : 거 련 한웅, 재위 81년, 140세
- 8세 (B.C3240) : 안부련 한웅, 재위 73년, 94세
- 9세 (B.C3167) : 양 운 한웅, 재위 93년, 139세
-10세 (B.C3071) : 갈 고 한웅, 또는 독로한 한웅 재위 100년, 125세
-11세 (B.C2971) : 거야발 한웅, 재위 92년, 149세
-12세 (B.C2897) : 주무신 한웅, 재위 105년, 123세
-13세 (B.C2774) : 사와라 한웅, 재위 67년, 100세
-14세 (B.C2707) : 자오지 한웅, 일명 치우천왕이라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15세 (B.C2598) : 치액특 한웅, 재위 89년, 118세
-16세 (B.C2509) : 죽다리 한웅, 재위 56년, 99세
-17세 (B.C2453) : 혁다세 한웅, 재위 72년, 97세
-18세 (B.C2381) : 거불단 한웅, 혹은 단웅, 재위 48년, 82세

▣ 치우천자 실존증빙 - 중국정사 사마천 사기본기 원문해석

중국최고의 정사인 사기본기가 있는 한 구리국 치우천자의 역사는 영원히 존재하며 아무리 한단고기의 위서을
논한다 해도 이사실을 지울수 없다
<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1 >

# 보는 방법

<1번 큰글자>
한무제의 명을 받들어 사마천이 기술한 중국최고의 정사로 한무제 말기에 완성
(한나라 무제 : 기원전 141 - 87 존재, 사마천 : 기원전 145 - 86 존재)

<2번 "집해">
사마천의 원서에 송나라때(420 - 479) 배인이 추가한 내용 (일종의 설명)

<3번 "색은">
당나라때(618 - 907) 사마정이 추가한 내용이고 동시대 장수절이 정의를 함

<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2 >



<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3 >




# 해 설

<5 번>
제후들이 모두와서 복종하는데 치우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자가 없었다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莫能伐)

<6 번>
치우는 고천자 이다
(蚩尤古天子)

<7 번>
용어하도에서 황제가 섭정시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이며 모래를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龍魚河圖云黃帝攝政有蚩尤兄弟八十人 獸身人語銅頭鐵額 食沙造五兵仗刀戟大弩威振天下誅殺無道萬民)

<8 번>
구리의 통치자(君號:직위)는 치우다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4 >


# 해설

<9 번>
황람의 말을 인용하여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같이 솟아 올라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皇覽曰蚩尤 吊平郡壽張縣함향성 高七丈民常十月祀之 有赤旗出如匹縫帛民名爲蚩尤旗)
또한 그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견비 在山陽郡鉅野縣)

<10 번>
蚩尤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 탁鹿之野)

▣ 지도 해설


- 동평 : 치우천자의 묘의 위치
- 거야 : 치우천자의 부인 견비의 묘의 위치
- 탁록 : 치우천자와 제후의 아들인 헌원과의 최초의 전쟁지역
- 수구 : 헌원 출생지
- 황릉 : 헌원의 묘가 있는 위치

곰곰히 생각해 본다. 황제는 왜 자기가 태어난곳에서 묻히지 못하고 그 머나먼 장안북쪽 황릉에 가서 묻혔을까 ?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 제후의 아들인 헌원이 치우천자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징벌, 황제는 태행산맥 북쪽으로 쫒겨나 지나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
상식적으로 쉽게 생각해도 풀리는 부분 아닌가 ? 이것이 왜 신화인가 ? 동평군 수장현에 치우천자의 무덤과 그 유적지가 중국민족에 의해 파괴 된지가 얼마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서 내눈으로 확인하지 못함이 안타까우나 누군가는 꼭 해야할 일이다
그토록 자랑스런 우리 역사를 죽어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저위정자들의 오만과 가식에 가득찬
허구를 깨우쳐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 쥬신국 치우천자의 기록이 아직도 허구라 믿는 가 ?

중국 정사 기록의 원칙은 "나의 것은 과장하여 쓰되" "남의 것은 축소하여 기록한다" 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두려움의 존재로 여기어 졌으면 중국 최고의 정사 제일 앞부분에 이렇게 많은 부분을
기록하였을까 ? 사기에는 헌원이 이긴 것으로 되어있으나 한단고기에는 분명 70여회의 전쟁에서 헌원이 단한번도 이긴적이 없는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더구나 뒤편에서는 헌원은 제후의 아들이라고 자기들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 누구것을 따를 것인가 ? 중국정사에 있고 우리 기록에도 있다
그것이 야사라 하여 보지도 않고 부정하는 이민족 사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 한단고기의 기록

자오지(정사에서는 치우천자로 표현)한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하려고 했으나 이룰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 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찍이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 정리를 해보면

B.C 2700년대에 중국민족의 시조가 황제헌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동시대 유명인이었던 쥬신국의 치우천자를 비교론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의 사서에도 있고 중국의 사서에도 있는 공통부분이다. 왜 믿지도 않고 연구도 않고 거짓이라고만 하는 걸까 ?치우천자와 황제헌원의 사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천손민족 구리국의 치우천자께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제후국의 아들이었던
황제헌원이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천자가 징벌을 하였다. 이에 황제헌원은 매일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소를 옮겨다녔으며 수십번의 전쟁에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결국 태행산맥 서쪽으로 도망을 가 중화민족의 시조가 되었다

출처 이책 저책 보면서 직접 서술.. 쥬신건국사, 치우천황기같은 자료는 참고 안함 !
추천5 비추천0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또 치우천왕과 쥬신은 철제무기를 사용했죠.. 그 시대때 무슨넘의 철제무기냐고 하실수도 있습니다. 혹자가 청동기 유물, 유적이 B.C10세기 경에 한반도에 나타나니 고조선의 건국연대는 B.C10세기를 전후한 시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옛날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교과서는 매국 식민 사학자와 기독교인에 의해 쓰여지다 보니, 단군을 부정합니다. 이러한 점을 바로잡아 민족사의 전환점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고조선의 중심은 대륙입니다. 또한 청동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해나간 국가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내용을 보면 고조선 이전의 배달국(쥬신국)의 자오지환웅(치우천자)의 동두철액을 사용하여 백전무패의 전쟁을 이끈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두철액은 철가면으로 이해가 되는데, 곧, 고조선 이전에 당시 하이테크 첨단 기술인 철제 무기(혹은 청동기)를 사용했다는 말이 됩니다.
고고발굴과 연구가 진전되면서 종래 지나 요녕성의 청동기로만 인식되었던 비파형 동검이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서 출토되고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한국의 청동기시대 개시연대는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지나 길림성 영길현의 星星哨유적은 방사선 탄소 측정연대에 의 하면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 연대는 서기전 13세기 초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녕성 지역에는 비파형동검보다 더 빠른 청동기문화가 있습니다. 이 문화유적들의 방사성탄소측정연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지주산(蜘蛛山)유적으로서 이 문화의 개시는 서기전 2410년경으로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반도에서도 서기전 25세기로 올라가는 청동기 유적이 두 곳이나 발굴되었는데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 유적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무덤의 연대가 방사성탄소 측정에 의 하여 서기전 25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자료와 연구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이는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고고학적 신뢰성이 있음을 의미하며, 서기전 2500년이라는 연대는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333년보다 170여년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자오지환웅(정사에서는 치우)은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치우는 고조선 이전의 배달국(밝달국, 구리국 등으로 불립니다.)14대 환웅입니다. 사기에서 말하길..(사기: 지나국국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상고시대의 황제(黃帝)로 부터 한나라 무제까지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통사로 역대 지나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로서, 본기(本紀) 12편, 세가(世家) 30편, 서(書) 8편, 표(表) 10편,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후들이 모두와서 복종하는데 치우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자가 없었다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莫能伐)
(제후함래빈종이치우최위폭막능벌)

치우는 고천자 이다
(蚩尤古天子)
(치우고천자)

용어하도에서 황제가 섭정시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이며
모래를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龍魚河圖云黃帝攝政有蚩尤兄弟八十人
獸身人語銅頭鐵額 食沙造五兵仗刀戟大弩威振天下
誅殺無道萬民)
(용어하도운황제섭정유치우형제팔십인
수신인어동두철액 식사조오병장도극대노위진천하
주살무도만민)

쥬신의 통치자(군호君號:직위)는 치우다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공안국왈구려군호치우시야)

황람의 말을 인용하여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같이 솟아 올라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皇覽曰蚩尤 吊平郡壽張縣함향성 高七丈民常十月祀之 有赤旗出如匹縫帛民名爲蚩尤旗)
(황람왈치우 재동평군수장현함향성 고칠장민상십월사지 유적기출여필봉백민명위치우기)

또한 그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견비총在山陽郡鉅野縣)
(견비총재산양군거야현)

치우(蚩尤)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 탁鹿之野)
(치우작란불용제명어시황제내징사제후여치우전어 탁녹지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철제무기 혹은 청동제무기에 관해 위의 사기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환단고기에서는
뒤에 갈고한웅이 나셔서 염제신농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대를 지나서 자오지한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환단고기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시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사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철인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루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장려케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해제때 연나라의 추장이었던 위만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의 준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제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의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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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또는 필나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또는 직구다국),사납아국,선비이국(또는 시위국,통고사국이라 함.),수밀국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밀기>>의 주에서 말한다.
'개마국은 일명 웅심국이라 하니 북개마대령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으로부터 거리가 200리이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니라. 월지국은 그 북쪽 500리에 있고, 직구다국 혹은 매구여국은 옛 오난하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었다. 쑥은 다려서 복용함으로써 냉을 치료하고 마늘은 불에 구워 먹음으로써 재앙을 다스린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날에 한국이 있었는데 무리는 풍족하고 풍부하였다.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에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게 하시고, 사라마다 모두 힘써 일함으로써 근면하여 스스로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한인, 고시리한인,주우양한인,석제임한인, 구을리 한인에 전하여 지위리한인에 이르니 혹은 단안이라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이라고도 한다.
한국에 5훈이 있으며 신시엔 5사가 있나니 이른바 5훈이란 이른바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것, 둘째 공경근면함으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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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르지 않고,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이른바 5사란 우가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며,저가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혹은 계가라 함)는 선악을 관장함을 말하는 것이라.'

한국의 주에서 말한다.
'한(桓)은 전일의 광명이라. 천일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신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 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삼신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아침엔 함께 동쪽산에 올라가 해가 처음 뜨는 것을 경배하고 저셕엔 곧 함께 서쪽 강가로 나아가서 달이 처음 뜨는 것에 경배한다. 이에 앞서 한인꼐서 때어나시사, 절로 다섯가지 사물을 만들고 기름을 아시고 다섯가지 가르침을 가르치시고 다섯가지 일들을 다스리시었다. 오가의 무리는 모두 어려움을 참고 부지런하여 잘배워 지닌 끝에 마음의 빛을 얻어 상서로운 일을 만들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었더라. 한인께선 높고 높은 하늘에 오르사 홀로 생각하시며 차분히 온갖 일을 다스리시니 감히 따르지 않는자 없어 구한의 백성이 모두 하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것이 환단고기의 기록입니다.
환단고기 기록의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는 이른바, 환국(기원전 7199년, 초대 환인 안파견) 지금으로 부터 9200여년 전의 국가입니다.

물론이것들은 100% 신뢰가 불가능하죠.. 중국 사기라고 해바짜 중국의 과장심한것은다 알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장은 할 지언정 지어낸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치우천황의 존재가 있었다는것 ,.. 고조선의 국가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죠.
황제와 치우천황의 전투기록을 보면 황제는 70번 전투중 한번도 승리 못했는데 갑자기 황제가 이긴걸로 나옵니다. 이것을 왜곡일 것이라고 중국 학자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황정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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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캬 중국무림발견님 무슨 역사 선생님이세여? 저는 중국에대해서는 잘몰라서 이런글에대해서는 리플잘안다는데여 여기 자료실에서는 완전 짱이시네여 앞으로도 많은 의견바래여 역사선생님 같으시네여 ㅎㅎ

wjddyd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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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오리킥 님 치우천황은 우리의조상입니다!그땐우리가세계최강이었죠!!부디자긍심을갖아주시길...
그리고 치우천황은중국의1대황제(훤원)과대립 하여번번히승리햇으나 결국엔사라

홍민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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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쥬나 츄신 도 같은 계 인가보죠?
이제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유물이 발견이 안되니까
혹시 중국이 벌써 발견이 되었는데도 덮어 버렸을수도..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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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천자묘 중국산동성에서 발굴 
 
..  < 치우(蚩尤)천자총의 정확한 위치는 산동성 "黑虎苗(흑호묘)" 인근>

사마천의 사기본기와 중국 동평군 수장현지를 종합해보면
"치우총"은 수장현청(우리의 군청개념)의 남쪽 오십리에 있고,
한의 "장자방묘"는 현의 남쪽 육십리에 있다"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다시말하면 한의 "장자방묘"만 찾으면 바로 10리 북쪽에 치우천자총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전 안원전 선생님이 산동성 태전현(台前縣) 후삼리(后三里) 유방(油坊)마을에서 치우천자 유적을 발견한적이 있고,

길림성 연길시 개발구 송호상(0443-2856131) 선생님은 산동성 문상현 남왕진(山東省 汶上縣 南旺鎭)에서 '치우총(蚩尤塚)' 비석과 '치우사' 표지석을 발견한적이 있으나

기록에 충실한 치우천자총을 찾아본 결과 현재 중국에 한의 "장자방"묘가 실존하고 있다하며
그지역은 산동성 "黑虎苗(흑호묘)"인근으로 "자방"이라는 마을이 지금도 있으며
바로 그기에 한(漢)의 "장자방(張子房)"묘가 있다고 합니다

그 북쪽 10리(4키로)에 치우천자 총이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가 될 것 같습니다
 
지도도 올리고 싶은데 못올리네요 새글로 올리죠..

송승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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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천왕이라 그렇게 잔인한 인물은 아닌것같은데.....저도 치우천왕기라는 이우혁님(퇴마록 저자)
님의 글을 읽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하여튼 쥬신국은 존재했었고 고조선, 고구려보다 더 방대한 영역을 거느렸던 우리의 뿌리 이지요

윤대섭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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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세계사 역사를 좋아하고 다큐멘터리를 자주보는데, 다른 자료들 보니까 아틸라란 훈족의 통치자가 있었는데 그역시 배달족(한국인)일 가능성인 높다고합니다.아틸라는 몽고 이전 유럽의 막강 로마를 점령하고 대 유럽을 통치했습니다.비록 옛사랑의 화신으로 피살 당하지만...중국의 티벳 접경지역엔 거대 피라미드 군도
있다는데...그역시 우리나라조상님들이 건설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군요,짱깨놈덜이 일부러 공개 하지않는다는데 ..참....우리나라가 바로 지구의 문명의 시초가 아니였을까하는 ...ㅋㅋㅋ
  앞으로도 우리조상들의 왜곡된 문화를 바로잡는데 모두들 앞장섭시다.!!

박원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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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다시 읽어도 참으로 서두 말같이 왜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런걸 왜 숨기고
지.연.병.삽 들을 하는지 울화통이 터진다 ,,,
과거에 배운 국사책들을 보면 다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 막 치밀어 오른다,,

김경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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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역사학자 같으십니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으신 듯 한데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이런 자료는 마땅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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