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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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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베스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6건 조회 2,346회 작성일 04-01-03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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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박정희 시대의 핵개발 문제를 소재로 한 가상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모은 바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 확인이나 역사적인 평가는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으로 자리잡아 왔다.

▶핵개발 문제를 언급한 최초의 공식문서는 지난 98년 비밀해제된 미국측의 기밀 전문이다.
미국 대사관과 본국 사이에 오간 전문의 내용을 보면, 70년대 중반경 한국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으며 미국은 동북아 정세를 고려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 것이다.
이 것은 과연 사실일까..?



▶69년 7월 닉슨 독트린 이후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론을 역설하며 무기 국산화에 박차를 가한다. 일부에서는 이때
이미 핵무기 개발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70년대 한국의 핵 개발 연구는 어느 수준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원자력 에너지 공급이라는 평화적 이용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원폭개발이라는 군사적 목적을 위한것이었을까?
'박정희와 핵개발'에서는, 당시 이 사업에 참여했던 과학자와 관료들의 증언을 통해 핵개발 사업의 진상을 알아본다.


더불어 박정희 시대의 핵 연구사업을 둘러싸고 당시 국제사회의 시각은 어떤 것이었으며, 미국의 인식처럼 당시 남한 핵개발이 남북관계나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인지도 짚어봄으로써 핵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관점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는다.


▲'10·26'과 '박정희 핵개발' 관련설의 진상은?
미국과의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로 인해 10·26과 미국의 관 련설이 세간에 나돌면서 의혹이 증폭됐지만 결국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채 수십년이 흘러왔다.
그러던 중 94년 소설<무궁화꽃이 피었습니 다>가 출간된 후 핵개발 시도로 인해 저격당한 것이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다시 한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과연 10·26사건과 박정희의 핵개발은 어떤 관련이 있는것일까? 그의 소설 속에서와 같이 김진명은 "김재규가 재판에서 '핵개발은 잠꼬대같은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은 미국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것이 결국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은 다른 주장을 한다.


"10·26사건과 핵개발과의 관계에 대해서 취재를 상당히 많이 했는데 제가 내린 결론은 관계가 없다는 거다.
더구나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기 때문에 박대통령을 저격했다는 것은 소설적인 상상력에 불과하다 는 결론을 내렸다.
핵개발에 관련했던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소설<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허구성을 이야기하면서 '이휘소'는 상관 없는 인물이라는 말을 한다.
이휘소와 경기고 동창이었던 당시 경제2수석실의 김광모비서관은 "물리학자로 노벨상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핵개발과는 상관없고, 박대통령은 만난 적도 없다"고 말한다.


▲'프레이저 보고서'의 진실 확인!
"압록강까지 가는 미사일과 원자탄을 개발하라"
미 하원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닉슨 독트린 이후 한국은 70년말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비밀리에 무기 개발위원회를 만들었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는 증언이 나와있다.
당시 무기 개발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유재흥 전 국방장관의 증언으로 이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 당시 박대통령께서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계셨다. 하나는 국방부는 속히 압록강까지 갈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해라.
두번째는 우리도 원자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 두 분야에 대해서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고 한번 해보라. 그러고 뒷받침 재정은 내가 책임지고 도와준다. 그렇게해서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이렇게 설립된 국방과학연구소는 대대적인 인원확충 후 무기 국산화, 한국형 유도탄개발에 착수했고, 과기처 산하의 한국원자력연구소도 핵분야의 권위자였던 주재양 박사를 부소장으로 임명해 해외에서 활약중이던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핵무기의 재료인 플루토늄 획득과 그 운반 체인 미사일, 핵개발은 이 두 분야로 나뉘어 은밀히 진행된다.


▲미국의 노골적인 압력 속에서 진행된 기술개발 의지
74년부터 핵개발의 핵심기술 도입을 둘 러싼 미국과 한국의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기술 도입국인 프랑스를 오가며 미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과학자가 중요 코드가 적힌 릴테입을 은박지로 싸서 직접 배낭에 메고 다니는가 하면, 서 류가 오갈땐 외교행낭을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이었던 김철 박사 증언 ) 이러한 한국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미국은 주한 미 대사관과 미 국무성 사이에 전문을 주고받으면서 대책을 강구, 한국 정부의 요인들을 만나 설득하는 한편 한국의 기술도입선인 프랑스, 캐나다등에 압력을 넣어 계약을 무산시키기까지 했다.(98년 해제된 미국 비밀전문 중에서).

결국 미 교섭단과의 협상에서 승복하게 되고, 그후 미국의 감시는 더욱 심해진다. 미 대사관에 로버트 스텔라라는 과학무관이 상주하면서 수시로 원자력연구소를 드나들며 감시를 하게된다.
"내가 갈테니까 그 시설을 전부다 열어놔라, 이런 통보를 하는거다. 그리고 오는거다.
다음번에 당신이 오면 화장실 안을, 여자 화장실까지 다 보여줄 테니까 그렇게 작심하고 오라고 하도 불쾌해가지고".
(김철 박사 증언)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감시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79년 10·26 직전까지 대체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핵개발을 진행시켰다.

▲박정희 핵개발의 참뜻은?
과연 박정희 정권은 왜 핵개발을 하려고 했을까?
일반적으로는 자주국방을 위한 반미 민족주의의 발로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반론도 있었다.
당시 안보에 위협을 가했던 미군 철수에 대비하기 위한 핵개발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공보관 이었던 이재현은 "철군이 아니고 감축이었고, 당시 한국 방위상 위협이 안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영구집권 욕심으로 이를 이용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톨릭대 이삼성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남북한 간의 평화라는 민족적인 가치를 유린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라고 말한다

미국은 76년 1월 박정희 (朴正熙) 의 핵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국무부 관리들을 보냈다. 마이 런 크러처 해양국제환경 과학담당 차관보서리를 단장으로 한 교섭단 일행은 1월22~23일 주한 미 대사관 에서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기처장관을 대표로 한 우리측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미국측은 크러처. 대니얼 오다너휴 국무부 한국담당과장.폴 클리블 랜드 미 대사관 정치담당참사관등이, 한국 측에서는최형섭장관.윤용구 (尹容九.69. 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
이병휘 (李炳暉.67. 신형爐연구 센터 소장) 과기처 원자력국장등이 참석 했다.

말이 협상이지 미국측은 우리를 범죄자 다루 듯했다. "미국측은 재처리의 '재' 자도 꺼내지 못하게 강압적으로 나왔어요.
말을 안들을 경우 고리 원자력발전소 에 대한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심지어 핵우산도 철거하겠다고 거의 협박조로 나왔지요.

尹소장과 李국장 이'너희는 양반 노릇만 하고 우리는 밤낮 너희 밑에서 짐꾼 역할만 하라는 거냐' 고 미국측에 따졌어요.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한 터라 미국 관리들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 (최형섭)
그러나 미국측의 태도는 완강했다. 크러처 일행은 회담에 앞서 朴대통령을 만나 '강행시 군사원조 중단' 방침을 통고한 상태였다. 朴대통령은 崔장관을 불렀다.

"崔박사, 이제 고집 꺾고 재처리 그만둡시다. 미국이 다 책임지겠대요."
미국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핵개발을 감시하기 위해 주한 미 대사관에 과학관을 파견키로 했다. 캐나다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려는 계획도 취소됐다.

그러나 박정희는 핵개발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군사원조 중단 통고 76년 1월말 미국의 엄중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재처리사업은 '화학처리 대체사업' (일명 핵연료 국산화사업)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구용 원자로는 자체 개발키로 결정됐다. 대체사업 전담기구도 76년 12월 핵연료개발공단으로 탈바꿈했다.

공단의 초대 소장엔 특수사업담당부서 책임자 주재양 (朱載陽.64.재미) 박사가 임명됐다.
원자력 연구소에서 특수사업담당부서만 따로 떼어내 핵연료개발공단을 만든 셈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대덕(대전시)에 개발공단을 세우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체사 업은 우라늄 정련 (精鍊).전환시설, 핵연료가공시설, 조사 (照射) 후 시험시설, 방사성 폐기물 처리 시설등을 들여와 재처리의 핵심시설을 갖추려는 것이었다.
일종의 짜깁기식으로 재처리시 설을 확보하자는 계획이었다.

당시 핵연료개발공단 개발제2연구부장으로 실무책임을 맡았던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의 증언.
"무엇을 어떻게 사야 할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요. 각 시설에 필요한 품목들을 겨우 알아내 기기(器機)들을 따로 구입, 조립해보니 서로 규격이 맞지 않아 난처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국은 특히 재처리의 핵심 부분과 비슷한 조사후 시험시설과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 도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일이 간섭했어요."
美관리 수시로 공단방문 미국의 감시는 집요했다.

공단 관계자들이 국내에 매장된 우라늄을 캐내 핵연료로 가공하는 것이 대체사업 이라고 둘러댔지만 미국측은 믿지 않았다.
주한 미 대사관에 파견된 로버트 스텔러라는 과학관은 대체사업의 내용을 알아내려고 불시에 개발공단을 찾아오곤 했다.
金박사의 계속되는 증언.

"이 친구는 미중앙정보국 (CIA) 요원으로서 원자력 관계 훈련을 받고 한국에 파견됐어요. 사전에 전화도 없이 불시에 달려오곤 했어요.
승용차에 성조기를 펄럭이며 나타날 때는 정말 위세등등했습니다. 소장방에 들러 인사하는 법도 없었어요.

아무 방이나 문열라고 하고 시설 측정도 제멋대로 했어요.화가나 여자화장실 문을 열어 조사하라고 한적도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위상인가 싶어 서글픈 생각도 들고,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각종 시설들을 제공하는 프랑스측에도 핵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러자니 핵심 기기들에 대한 설계를 요청할 때마다 프랑스측과 자주 실강이를 벌여야 했다.

대체사업의 핵심시설인 조사후 시험시설의 도입 책임을 맡았던 박원구 (朴元玖.65.인하대 금속공학과 교 수) 공단 핵 연료개발부장의 증언.
"조사후 시험시설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핫셀 (방사능 차폐시설) 이에요. 강도가 센콘크리트로 핫셀의 두 께를 1m로하면 고준위 방사능을 차폐시킬 수 있어 재처리시설로 쓸 수 있었어요.

프랑스 회사 상고방이 눈치채고 핫셀의 두께를 80㎝ 이하로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더군요. 그래서 보통 콘크리트 1m로 설계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건설할 때는 강도가 센 콘크리트를 쓸 작정이었지요."
한편 연구용 원자로 (NRX) 개발사업은 김동훈 (金東勳.66.전 다목적연구로사업단장) 박사가 이끄는 원자력 연구소 장치개발부가 맡았다.

이 사업 역시 미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업명칭을 처음엔 'TFTF (열중성 자 시험시설)' 사업으로 위장했다가 나중엔 '기기장치 개발사업' 으로 바꿨다.
그의 증언. "약 30명이 이 사업에 참여했어요.

지원이 필요할 때는 원자력연구소 각 부서에 부문별로 프로젝트를 맡겨 해결하곤 했습니다. 설계 기술자료등은 73년부터 캐나다와 연구용 원자로 도입 교섭을 벌일 때 이미 상당수 확보한 상태였지요.
또 대만 (臺灣)에서 많은 자료들을 얻어오기도 했지요."

이번에 취재팀이 단독 입수한 '원자력 이용개발 제4차 5개년계획' (과기처.78년2월)과 한국핵연료 개발공단의 '사업계획서 (77~80년)' 등 관련자료들에 따르면 대체사업은 당초 81년 까지 완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방해와 프랑스로부터의 시설 도입이 늦어지면서 83년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또 윤용구 원자력연구소장이 77년2월 원자력위원회에 제출한 '원자력연구개발 기본방안'에 따르면 '기기장 치 개발사업'은 78년까지 설계를 끝내고 79~81년엔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김동훈 박사는 "朴대통령이 사망한 79년 10월엔 설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며 "연구로 개발사업은 계획보다 약간 늦어지긴 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 말했다.

78년 10월 핵연료가공시설이 준공됐다. 이날 핵연료개발공단에 이르는 비포장도로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검은 세단 20여대가 갑자기 나타났다. 朴대통 령 일행이었다.
윤석호 (尹錫昊.68.전 충남대 교수) 개발공단 건설본부장은 "朴대통령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며 "과학자들의 손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격려했다"고 말했다.

79년 5월에는 우라늄 정련.전환공장 기공식이 거행됐다. 대체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자 미국측은 긴장했다.
윤용구박사는 "이 무렵 미국측은 우리가 대체사업을 통해 핵개발을 계속해온 것을 알아차린 것같다" 고 말했다.
박정희가 살아 있었다면 85년께엔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었다는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그해 10월 박정희는 핵심 측근 김재규 (金載圭.사형.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제거됐다. 박정희의 죽음 뒤에 미국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돈 것은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10·26 美 관련說 꼬리물어 79년 12.12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全斗煥.66) 정권은 핵개발을 포기했다.

신군부는 81년 1월 핵연료개발 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핵개발에 관한 연구는 물론 원자력이란 용어조차 사용치 못하게 했다.
과학 자들은 폐기물처리시설 부지 선정등 '허드렛일' 로 내몰렸고 핵심 관계자들은 쫓겨났다.

미국으로부터 쿠데타의 정당성을 추인받기 위한 조치였다.
91년 11월 노태우(盧泰愚.65)대통령은 "핵연료 재처리시설과 핵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는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핵주권마저 포기했다.

일본이 67년 핵의 제조, 보유, 반입 금지라는 '비핵 3원칙' 을 선언하는 대가로 농축과 재처리시설, 대량의 플루토늄까지 소유할 수 있게 된 반면 아무 대가도 없는 우리의 핵주권 포기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사실을 미국측에 흘림으로써 주한미군의 완전철수를 막는등 유용한 대미(對美) 협상카드로 활용한 것만은 틀림없다.
아무튼 박정희의 죽음으로 핵무기 보유는 미완의 사업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출처 : 팝콘의 미스테리


[이 게시물은 선장님에 의해 2014-02-02 11:20:20 미스테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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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박상수님의 댓글

정의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사실 우리나라에는 핵이 있습니다. 일부러 미국이 숨기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 중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한반도에 핵이 없는 상태로 이미 핵이 존재하는 북한과 미국이 맞선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아마도 경기도 용인부근에 숨겨져 있다는 설도 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암튼 우리나라 자체는 아니지만 북한이 마음대로 못 쳐들어오는 대표적인 이유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김수영님의 댓글

정의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미국은 세계 아무데서나 핵을 쏠 수 있는데 머 굳이 한반도에 핵이 있을 필요야.. 동해안에서 잠수함으로 수십방 평양에 선물할 수 있는데..

류시진님의 댓글

정의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박상수님의 말씀은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그것 때문에 못쳐들어 온다는건 조금 아닌 것 같군요..
현재는 병력 수도 남북이 비슷하고, 화력은 남한이 우수하기 때문에(비록 그것이 미국산 쓰레기일지라도) 그리고 내심이 어떤진 몰라도 남북이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핵무기라는 것이 예전 2차대전때 일본에 떨어뜨렸던 것의 50배 위력이라는군요..
따라서 원자탄 하나면 한반도를 날릴 수 있을 위력이랍니다..
북한이 핵을 만드는 것도 남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 위협 정도겠죠..
또 미국도 웃긴 것이, 자기나라는 원자탄이 수백, 수천개나 되면서 NPT등을 체결하고,
인도나 북한 같이 원자탄이 하나 있거나 개발하려고만 해도 빌빌대죠..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언제쯤 통일이 되어 미국한테 큰소리나 좀 쳐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재성님의 댓글

정의돈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누가압니까? 이제 자원갖다 전쟁이야기나오는데  더욱더 미국이 강해지면 전세계상대러
전쟁 하나 해야할지 미칠노릇입니다.
독립전쟁을 막았써야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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