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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인 위원회의 딘 러스크와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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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f666…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73회 작성일 03-08-17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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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300인 위원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스탈린을 봉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중략)
하지만 300인 위원회로부터 "북한을 억제하돼 물리치진 말라. 북한은 스탈린이 후원하기 때문이다." 라는 명령이 나왔다. 트루먼은 UN으로부터 행동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미국 헌법을 우회하여 아무 준비도 없는 미국을 대전쟁으로 몰아넣을수도 있었다.
1950년 11월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에게 급보를 보냈다. 그 내용에는 그가 미 공군 조지 스트레이트 메이어 장군에게 압록강에 집결한 중국군 56개 사단, 교량, 부대 집결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트루먼은 블레어 하우스에 참모들을 모이게 하고 이를 상의 했다. 그들 가운데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맥아더의 제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급보를 받은 러스크는 트루먼에게 "영국 정부의 사전동의 없이는 압록강의 만주지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일"을 일깨웠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뒤 트루먼의 회고록에서 확인되었다.
트루먼이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던 것은, 맥아더가 압록강에 집결한 중국군을 공격한다면 자신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300인 위원회가 런던측에 이야기 했다는 사실이었다. 300인 위원회는 양국에 거대한 이권이 걸린 아편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항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영국의 압력에 굴복한 트루먼은 곧 맥아더에게 "만주 국경 5마일 이내의 모든 목표물에 대한 폭격을 연기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의 항의가 거세게 쏟아졌지만 딘 러스크는 트루먼에게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지켜졌다. 맥아더가 11월 사임할 즈음에 25만명 이사으이 중국군 부대가 압록강을 넘어 경무장을 한 미군들에게 들이닥쳤다. 미군은 대단한 전투력을 다시 보여주었다. 러스크와 트루먼이 저지른 반역행위로 인해 미국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맞서게 되었지만 결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패배를 맛보았다.
러스크는 즉시 세인트제임스 광정에 있는 300인 위원회의 명령을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즉 "휴전회담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300인 위원회의 충실한 하수인인 트루먼은 휴전을 지시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그 지시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도주하고 있으니 휴전할 필요가 없다. 중국군에게 한국에서 물러나든지 목숨을 잃든지 선택할 최후통첩을 보내자" 라고 말했다.
트루먼의 대답음 맥아더의 해임이었다. 정보원을 통해 입수한 미군 전체 사상자 15만여명 가운데 10여만명은 러스크와 트루먼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한 뒤에 발생한 것이며, 이는 무군이 입은 전체 사상자 중 5분의 3에 해당되었다. 이처럼 끔찍하게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됀 이유는 러스크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압록강의 만주지역을 공격하려면 영국과 상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왜 그랬던가? 영국군의 소중한 부대가 한국과 만주 국경에 주둔하고 있었던가?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300인 위원회는 단지 중국과의 번성한 아편 무역을 뒤엎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 게시물은 선장님에 의해 2014-02-02 11:19:23 미스테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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