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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은 과연 침략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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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장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67회 작성일 02-05-0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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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적 ‘이라크 전쟁의 진실’/미국, ‘석유 민영화’ 요구 거절되자 등돌려

최근 이라크 공격 시나리오를 들고 중동 국가들과 조율 작업에 들어간 부시 정부의 요인들은 하나같이 과거 이라크 전쟁(1990∼1991년)의 주역들이다. 그들이 구상하는 ‘신세계 질서’의 실체를 바로 알기 위해서라도 당시 이라크 전쟁의 내막은 깊이 분석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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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mma
1988년 이란과의 전쟁을 끝낸 후세인의 여유 있는 모습.이란·이라크의 8년 전쟁에서 줄곧 이라크를 지원한 미국 등 서방이 어느날 갑자기 등을 돌리는 바람에 후세인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1988년 9월8일 워싱턴. 이라크 외무장관 함마디는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면담을 앞두고 있었다. 함마디는 8년 동안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을 끝낸 후 그 어느 때보다 전후 경제 지원을 절실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면담이 시작되기 2시간 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국무부 대변인은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 족을 상대로 화학 무기를 사용했으며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의회는 국무부 기자회견이 나온 지 하루 만에 이라크에 생필품과 기술 수출을 중지한다고 결의했다. 후세인이 화학 무기를 사용한 것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르드 족이 화학 무기에 희생될 때는 유엔 건물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은 이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 ‘갑자기’ 지난 일을 끄집어내 이라크 정부를 비난한 이유는 무엇일까?

1989년 6월 사담 후세인의 초청을 받은 미국 경제 사절단이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이 사절단에는 투자 자문회사 ‘키신저 협회’와 트러스트 뱅크·모빌 오일을 비롯해서 미국 다국적 기업과 은행의 중역들이 끼어 있었다. 후세인 정부는 미국 사절단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8년 전쟁에서 이라크를 측면 지원하던 미국 정부가 전후 복구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사절단은 투자에 앞서 조건을 내세웠다. 이라크 정부가 대외 채무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절단은 후세인 정부가 채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국영 석유산업 민영화’를 제시했다. 후세인이 국가 주권의 상징이자 정권의 돈줄이기도 한 석유산업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투자 협상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정부는 후세인에게 약속했던 23억 달러 차관을 동결했다. 미국과 영국 언론에는 이때부터 이라크의 재무장을 경계하라는 보도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8년 전쟁에서 줄곧 이라크를 지원하던 서방이 전후 복구에 등을 돌리는 통에 후세인은 ‘어느 날 갑자기’ 국제 금융계에서 한푼도 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후세인에게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쿠웨이트 왕족이다. 석유 왕국 쿠웨이트는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을 벌일 때 둘도 없는 우군이었다.

이라크가 8년 동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쿠웨이트에서 흘러 들어간 전쟁 자금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왕족이 이상한 행태를 보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값 폭락을 막기 위해 수출량을 제한하고 있었는데 쿠웨이트가 바로 그 합의를 깬 것이다. 그 결과 1990년 7월에는 원유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 쿠웨이트의 반칙에 반발했지만 쿠웨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했다.


- 후세인, 미국의 ‘불간섭 약속’ 믿고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변심 때문에 피를 말리는 위기에 몰렸다. 원유 수출 가격이 곤두박칠치면서, 빚을 갚을 수 있기는커녕 식량 수입마저 어렵게 된 것이다. 격앙한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국경 부근의 이라크 유전을 도둑질하고 있으며 부당하게 빚 독촉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이란 혁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피를 흘렸으니 쿠웨이트에 진 빚은 반드시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후세인의 논리였다. 그런데 쿠웨이트가, 빚 독촉은 그렇다 치고 석유수출국기구 합의를 깨고 남의 나라 자원을 도굴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받으면서 후세인 정권을 괴롭힌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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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연합
1990년 전쟁 때 미군의 공습을 받아 파괴된 바그다드 거리.

석유수출국기구와 후세인의 협상 제안을 거듭 거부하던 쿠웨이트는 급기야 8월2일 이라크의 침공을 받았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은 이라크가 미국이 주도한 ‘사막의 폭풍’ 작전에 의해 보복을 당하고 오늘까지 국제 무대에서 고립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쿠웨이트 분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무력 충돌설이 떠돌던 7월27일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글라스피가 후세인과 만난 사실이다. 글라스피는 이 면담에서 쿠웨이트 분쟁은 미국의 국익에 무관하며 따라서 미국은 앞으로도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의 군사 작전에 미국은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 담긴 이 날의 면담 기록을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 후에 공개했다. 부시(현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내용은 1년 후 미국 의회에서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후세인이 미국의 불간섭 방침을 믿고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한 이후 놀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쿠웨이트 왕족이 이미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점이었다. 쿠웨이트 왕족을 인질로 삼는다는 계획은 이렇게 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영국 은행과 미국 정부는 후세인이 기습 작전을 벌인 바로 그 날, 모두 천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이라크의 해외 자산을 압류했다. 후세인의 기습 작전에 못지 않은 또 다른 기습 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부시 전 대통령은 후세인을 ‘히틀러보다 더한 독재자’라고 규정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9월11일 ‘신세계 질서’를 선언했다. 그 선언에 따르면 중동 위기는 ‘비록 해결점을 찾기는 어려워 보여도 신세계 질서를 만드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하며 ‘이제 출산의 진통을 겪고 있는 신세계 질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었다.

침략자라는 악명을 뒤집어쓴 후세인으로서는 체면을 살리면서 쿠웨이트에서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후세인은 철군 조건으로 ‘퇴각하는 이라크 군을 공격하지 말 것’, ‘아랍 국가들이 이라크를 침략자로 비난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요구는 공교롭게도 중동 분쟁에 중재역을 자처하던 이집트에 의해 거부당했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군인들이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영아들을 집단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폭로함으로써 미국에서 전쟁 지지 여론에 불을 지른 소녀가, 실은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며 이 인터뷰도 날조극이었다는 것은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다.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3Drena@sisapress.com">rena@sisapress.com
출처: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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