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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기사단 관련(기독교 정확히 카톨릭하고 관련.. 예수와도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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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817회 작성일 04-03-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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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기사단

비밀문서에 의하면 템플러스 기사라는 '무장 신부단'의 내부 조직이라고 한다. 1118년 제1차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들에게 개방한 후, 위그 드 페이앙이라는 한 기사가 어처구니 없는 일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소수의 기사단에서 성지의 위험한 도로를 경호하는 것이었는데 주위의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예루살렘 시온산의 솔로몬 신전 옆에 본부를 설치하는 것도 허가되었다. 순례자들은 감사하며 그들에게 많은 헌금을 한다. 이윽고 기사단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성지의 실질적인 금융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세기 후에 그들에게 몰락이 찾아온다. 프랑스의 필립 4세(1268~1314)는 1307년 10월 13일에 전격적인 검거를 시작했다. 그들 전원을 신에 대한 모독과 외설행위의 죄상으로 규탄했으며 수십 명이 고문에 처해졌고 처형되었다. 1312년에 이르러서는 신전 기사단은 마침내 괴멸한다. 필립 4세는 그의 최대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그들의 부를 무너뜨린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최대의 거점의 하나인 '베즈'에 있는 보물을 압수하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 베즈라는 지방이 렌 르 샤토 근방이라고 한다.
시온산은 예루살렘의 교외이며 문서에는 예루살렘에 대해 단순히 시온이라고 표현된 경우가 많다. 비밀문서에 의하면 시온기사단(처음에는 이 명칭이었던 것 같다.)이 신전 기사단의 모체가 되는 조직으로 후자가 1307년에 괴멸했어도 그 모체는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온수도원이라는 조직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메로빙거왕조를 프랑스의 왕좌로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메로빙거 왕조란 6세기 초에 클로비스왕에 의해서 수립된 왕조로 후에 이 왕조는 역대로 병약한 왕이 계승한다. 고문서에도 '병약의 왕'으로 등장하며 그래서 국사의 대부분을 중신들이 맡아 했다. 678년, 중신의 한 사람이 다고베르 2세의 암살을 기도하여 창으로 잠을 자고 있던 왕의 눈을 찌른다. 이 중신의 계열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카롤링거왕조이다. (카롤링거왕조는 정식으로는 751년 피핀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98년, 독일에서는 752년에서 911년, 이탈리아에서는 774년에서 961년까지 계속된다.) 다시 비밀문서에 따르면, 다고베르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는 남 랑그독까지 도망해서, 그의 숙부에게서 라제공과 레데백작의 칭호를 계승하는데, 레데는 당시 큰 지방이었던 렌 르 샤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라제는 렌이 포함되어 있는 군의 이름이었다. 이로부터 300년 후 다고베르의 자손 고드프레이 드 블리옹이 1차 십자군을 인솔하고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러나 '병약의 왕'이라고 알려진 왕조를 왜 프랑스의 왕좌로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누가, 왜 그런 일에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을까? 튜더왕조(1485년부터 1603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왕가) 또는 스튜어트 왕조(1603년부터 1714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왕가)를 영국의 왕좌로 부활시킨다고 하면 영국인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런 현실을 떠난 야망과 소니에르를 갑부로 만든 보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링컨은 조사를 확대함에 따라 미스테리의 미로에 말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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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을 둘러싼 보물에 대한 전설을 또 하나 소개해보겠다. 서고트족의 보물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쇠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게르만계의 야만인이었다. 다고베르의 시대에 렌 르 샤토는 서고트족의 유일한 거점이었다. 다고베르는 서고트족의 공주와 결혼했으며 서고트족은 전유럽을 공략하여 많은 보물을 축적했다. 여기에는 로마황제 티투스(40?~81)가 69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가지고 간 예루살렘 신전 보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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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이윽고 이것이 시온수도원의 위대한 비밀인 것 같다는 사실이 점차 알려졌다. 메로빙거왕조의 진짜 시조는 전설의 왕 메로베크(또는 메로베)가 아니라,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이것이 메로빙거왕조의 후손들이 프랑스의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였다. 조사 과정에서 링커는 성배 또는 상그레알과 반복해서 만난다. 어느 전설에서는 신전 기사단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한편 몽세귀의 4명의 카타르파 신도가 짊어지고 산을 탈출한 것이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상그레알이라는 프랑스어는 왕의 피를 의미하며 성배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 그리스도가 포도주를 마신 술잔이라고 한다. 영국 남서부 서머싯 주의 옛 도시 글래스톤베리의 전설로는 아르마티아의 요셉이 이것을 그 고장에 가지고 왔다고 한다. 복음서에는 예수는 다비드 왕의 후예로서 왕의 혈통이라는 기술도 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유다의 왕이라고 되어 있고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신랄한 풍자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예수의 가까운 친구에 의한 현시적인 주장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링컨이 이 놀라운 설을 명확히 한 것은 1982년에 출판된 '성혈과 성배'라는 저서로 이것은 마이클 베이젠트와 리처드 리의 공저이다. 이 책에서는 어디까지가 증거에 입각한 설이며 어디까지가 가설인지 알 수 없다. 가설은 전술한 제라르 드 세드와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클레이다. 후자는 다고베르 2세의 직계 자손이라고 하며 메로빙거왕조의 왕정 복고설 자체는 명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는 죽지 않았으며 그에게 제공된 스펀지에는 약제가 들어 있었다. 이 형벌로 보통 인간이 죽기까지는 며칠 또는 몇 주일이 걸리는데 예수는 금방 사망한 듯 하다. 그는 두 다리를 기둥에서 내리기 전에 죽었다. 이것은 자비의 행위로 이렇게 하면 처형되는 죄인이 못이 박힌 다리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할 필요가 없이 양팔에 체중이 걸리기 쉽기 때문에 죽음이 빨리 온다. 스펀지는 순식간에 예수에게 주어졌다.
이 설에서 예수는 그후 결혼을 하는데 아내는 막달라의 마리아이다. 이 마리아는 마르타와 라다르의 자매인 마리아(통칭 베타니아의 마리아. 누가복음에 나온다. 예수의 말에 자주 귀를 기울인다.)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링컨의 설에 따르면 예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랑그독으로 온다. 그는 서기 74년에 마사다의 성채 공격 때 그의 생애를 마친 것 같다. 푸생이 그린 언덕 중간의 무덤을 예수의 진짜 무덤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설을 역사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별도로 하고 분명한 것은 이것이 시온수도원과 소니에르 자신의 굳은 신념이었다는 점이다. 소니에르는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탑과 같은 건물을 세우고 이것을 '막달라의 탑'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 자기의 집을 '빌라 베타니아'라고 칭했다. 베타니아란, 마리아의 또 하나의 출신지로 예수가 탄 적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노새를 두 제자가 데리고 온 장소이다. 링컨에 따르면 노새를 제공한 인물은 라자로로 이것도 거짓 처형을 포함하는 교묘한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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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나 사실이 여러 가지로 얽혀 있으나 이것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는 스스로의 처형과 그 후의 부활을 연출한다. 그 목적은 '신앙의 확보, 강화'와 그리스도교단의 확립이었다. 이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메로빙거 왕조가 예수를 시조로 믿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왕조 부활의 야망과 장미십자단

다고베르가 암살되자 교황측은 국왕 살해와 왕조의 교체를 시인한다. 카롤링거왕조의 창시자 '난쟁이 페펭'은 교황의 이 죄에 보복하기 위해 군대를 이탈리아로 파견해서 당시 교회에 반발하고 있던 롱바르인을 격파하고 탈취한 토지를 교황 쪽에 건네준다. 이것이 그후의 교황령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메로빙거왕조는 당연히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적으로 생각한다.
시온수도원이라는 비밀단체가 메로빙거왕조를 프랑스의 왕좌로 부활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시온수도원은 신성한 무기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성배거나 혹은 메로빙거왕조가 예수의 직계라는 것을 시사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물이다.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Et in Arcadia Ego'(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느니라)가 비밀 단체의 공동 구호였는지도 모른다. 12세기가 되자 신전 기사단이 이 비밀결사의 군사력이 된다.
이것은 예수 처형의 전설과 관련하여 그들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것은 공포의 인식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속죄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인식은 이 교단의 기초를 뿌리째 뽑겠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의 처형은 없었으며 속죄도 없었고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 그 자체의 존재 이유도 없다.
신전 기사단 붕괴의 가장 이상한 측면은 신에 대한 모독과 악마 신앙이라는 규탄이다. 그러나 신전 기사단이 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나 국가(곧 프랑스 역대의 왕)에 대해서 더 없이 위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신전 기사단과 카타르파와의 밀접한 동맹관계를 시사하는 역사적 증거도 많이 볼 수 있다. 카타르파는 광대한 토지를 신전기사단에게 주고 있다. 신전기사단의 제4대 수령인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카타르파 출신이다. 베르트랑의 후예는 카타르파의 말살 때문에 교황에 의해 파견된 침략자에 대해 랑그독의 카타르파와 협력하여 저항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16세기에 이르면 메로빙거왕조는 로렌왕가(로렌은 프랑스 북동부의 중세 왕국)가 대표하기에 이른다(이것은 합스부르크 로렌왕조로 발전한다. 따라서 합스부르크왕가도 메로빙거왕조계가 된다.). 그들은 당시의 지배 왕조였던 발루아왕가(1328~1589, 필립 6세에서 앙리 3세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왕가)의 추격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발루아왕가는 멸망하게 되지만 로렌왕가도 기진맥진하여 다음 왕조를 이어갈 유력한 후보가 결핍되는 상태에 이른다. 루이 13세가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의 즉위를 방해하는 강력한 책동이 있었으나 이것도 실패한다.



[이 게시물은 선장님에 의해 2014-02-02 11:06:48 미스테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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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자료들은 결코 지어내거나 한것이 아니라는걸 밝혀드림니다.
제가 직접 연구한것은 아니지만 저는 원래 예수나 마호메트등 성인이나 종교에 관심이만아서 이런 자료를 찾는걸 좋아합니다.
의견들은 어느거든 좋습니다. 하지만 조사한사라므이 성의를 바서라도 욕이나 헛소리라는둥의 글은 안하셧으면 좋겟습니다

서홍룡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쩌면 루이 13세에서 로렌 왕조는 멸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사람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죠...

딱 잘라서 말하자면, 가장 유력한 설은 리셜리외가 한 남자를 고용하여 루이 13세의 왕비와 동침을 시킨겁니다...

그러면 철가면의 미스테리도 자연히 풀리게 되죠...

그 남자의 진짜 자식 즉, 루이 14세의 이복형제가 바로 철가면이 되는 셈이죠....

미공개님의 댓글

중국무림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십자가 기사단 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마들어진 전쟁에 진정 신이 개입됐단 증거는 없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싸울때에도 서로의 국교는 하나님을 기본으로 한 종교 였죠....서로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싸웠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신의 이름을 도용 한 것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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