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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선 구조로 본 거북선의 실체 더듬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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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uf63…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075회 작성일 05-03-06 02:04

본문

우리는 과연 거북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1.전통 한선의 구조와 그 특징
(1)전통 한선의 선체 구조
(2)전통 한선의 구조적 특징과 장단점
2.근대 이전 한국 수군의 주력 군함의 변천
(1)고려 시대
(2)조선 초·중기 - 맹선 체계의 등장
(3)조선 중기 이후 - 판옥선 체계의 확립
(4)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의 우수성
3.거북선의 원형에 대한 연구 현황과 쟁점들
(1)거북선 연구의 역사와 주요 연구자들
(2)거북선 연구의 주요 사료와 그 문제점들
(3)거북선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연구자들 간의 쟁점들

Ⅲ.맺음말 - 학술 교류를 통한 거북선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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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들어가는 말 - 우리는 과연 거북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거북선.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과연 거북선이란 무엇인지, 누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민족의 성웅(聖雄) 이순신이 발명한 배, 한민족의 지혜의 정수가 담긴 세계 최초의 철갑선, 입으로는 연막을 뿜고 등에는 철갑과 송곳을 씌웠으며, 옆구리에서는 대포를 마구 쏴 대는 천하무적의 군함.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에 대한 이미지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이미지의 거북선은 예전에는 지폐와 동전, 그림 등에 그 모습을 자주 드러내었고, 지금도 관광지의 기념품, 박물관의 축소 모형, 해군 사관학교 등의 실물 크기 복원품 등은 이러한 이미지를 오늘날까지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된 거북선의 원형에 관하여 아직까지 합의된 결론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의 학자와 연구자들이 사료를 해석하여 나름대로 거북선의 설계도를 제시해 오고 있지만, 거북선에 관한 의문들 모두를 완벽하게 설명해 준 것은 이제껏 하나도 없었다. 몇 년 전 KBS TV에서 방송된 '역사스페셜'이라는 프로에서 이 주제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지만, 그것 역시 특정 연구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나름의 절충안을 제시한 것에 불고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근대 이전의 전통 한선의 구조와 특징이 어떠하였는가를 알아보고, 조선 중기 이래 수백 년간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의 등장 배경과 특징에 대하여 살펴본 뒤, 그 연장선상에서 거북선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 단 거북선의 실체에 대한 연구는 사료의 절대 부족과 연구자들 간의 서로 다른 주장으로 인하여 아직 그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필자 역시 이 글에서 거북선의 원형이 어떠하였다고 섣불리 단정하여 독자들에게 혼란만을 더해주기 보다는, 지금까지의 거북선의 원형에 대한 연구 현황과 주요 연구자들, 이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주요 사료들과 거기에서 찾을 수 있는 모순점들, 그리고 그로 인해 거북선의 실체에 대하여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오해와 연구자들 간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본마당

1.전통 한선의 구조와 그 특징

(1)전통 한선의 선체 구조

전통 한선은 주로 소나무로 된 판자를 나무못으로 이어 붙여 만든 구조로 되어 있다. 먼저 배의 바닥은 저판(底板, 배밑)이라는 두꺼운 각재를 여러 쪽 이어 붙여 만든다. 그 다음에 배의 이물과 고물에는 역 사다리꼴 모양이 되도록 판자를 가로 혹은 세로로 이어 붙이고, 현측에도 같은 식으로 외판(外板, 삼판)을 여러 쪽 이어 붙인다. 좌우의 외판 사이에는 가룡목(架龍木, 장쇠)을 꽂아 넣어 고정시키고, 최상단의 외판 위에는 가목(架木, 멍에)을 마치 대들보처럼 가로로 걸쳐 둔다. 이 몇 개의 가목들 위에 널빤지 등을 깔아서 포판(鋪板, 겻집) 즉 갑판을 만들고, 배의 중심선상에는 돛대를 1~2개 꽂을 수 있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이물에 닻을 감아올릴 수 있도록 하는 커다란 물레를 두고, 고물에는 키를 꽂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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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선의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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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선의 측면도 및 평면도

(2)전통 한선의 구조적 특징과 장단점

①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전통 한선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었다. 서양의 경우 배의 바닥에 용골(龍骨)이라고 하는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깔고, 그것을 뼈대로 삼아 외판을 붙여 나가는 첨저선(尖底船)이었다. 반면 한선의 경우 배의 바닥에 저판 여러 쪽을 깔고 마치 뗏목처럼 그것들을 이어 붙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배의 이물과 고물 역시 뾰족한 것이 아니라 뭉툭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서양의 배가 바닥이 좁고 뾰족하다면, 한선은 넓고 뭉툭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선의 바닥이 평평하다고 하는 것은 한선에게 있어서 단점이자 곧 장점이 되었다. 우선 이물이 뾰족하지 못하기에 파도를 헤쳐 나가는 능력은 그만큼 부족하였다. 또한 바닥이 평평하기에 첨저선에 비해 물에 닿는 면적은 큰 반면 흘수선은 낮았는데, 이는 배에 대한 물의 저항을 크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배의 직진 능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즉 한선의 경우 서양의 배에 비해 그만큼 속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들과 함께 장점들도 존재하였으니, 바닥이 평평하기에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배가 좌초되어 전복될 위험이 없었고, 또한 평저선의 경우 첨저선에 비하여 좌우 선회 능력이 뛰어났는데, 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과 암초가 많은 한국의 바다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②주요 목재로서 소나무의 사용

한선의 저판, 외판, 고물, 갑판 등의 주요 부분에 사용되는 판자는 대부분 한국의 소나무, 특히 적송(赤松)으로 되어 있다. 적송의 경우 매우 튼튼하지만 동시에 굴곡 강도가 높아서 굽히기 힘들고, 또한 옹이가 많거나 휘어져 있는 등 형질이 고르지 못하여 얇은 판자로 가공하기 힘든 소재이다. 따라서 전통 한선은 소나무를 매우 두꺼운 판자로 가공하여 거의 휘지 않은 채로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 그 결과 한선은 마치 방주(方舟)처럼 뭉툭한 모양을 하게 되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주로 삼나무나 전나무로 배를 만들었는데, 이 나무들은 소나무에 비해 무르고 가벼우며 잘 휘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무른 삼나무와 전나무를 더욱 얇은 판자로 가공하여 길고 날씬한 배를 만들었는데, 이로 인하여 한선에 비해 가볍고 경쾌하였으나 강도 면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③나무못을 사용한 목재 결합

한선의 경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나무못을 사용하여 선체의 목재를 결합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쇠못을 사용하여 목재를 결합하는 서양이나 일본의 배와는 대조적인 점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나무못은 쇠못에 비해 약하고 원시적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쇠못의 경우 처음 박아 넣었을 때에는 나무못보다 강하지만, 머지않아 물이 스며들어 닿으면 금방 녹이 슬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못 자체의 강도도 약해질 뿐만 아니라, 못 주변의 나무까지 썩게 하여 못과 나무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나무못의 경우 물이 스며들면 오히려 물을 흡수하고 팽창하여 못과 나무가 보다 단단하게 결합될 뿐만 아니라, 목재를 부식시키지 않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못을 뽑고 목재를 교체하는 등의 수리 작업을 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④한국식 노의 설치

서양식 노는 오늘날 유원지나 호수에서 사용되는 보트에 달린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노 젓는 사람이 배의 바닥에 걸터앉은 채 앞뒤로 저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반면 한국식 노는 노 젓는 사람이 배의 고물 쪽에 서서 허리를 숙인 채 좌우로 저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치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의 움직임과 유사한 이러한 한국식 노는, 실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흔히 쓰이던 것이었다. 한국식 노의 경우 서양의 노에 비해 효율성이 높고 사용법이 간단하며, 마치 키와 같이 방향 전환용으로도 쓰일 수 있었다. 근대 이전의 한국 수군에서는 이처럼 배의 고물 쪽에 다는 한국식 노를 배의 좌우에 여러 개 설치하고, 노 하나당 4~6명이 붙어서 저을 수 있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⑤세로돛의 사용

세로돛이란 돛대의 아래쪽에 활대를 고정시키고 꼭대기에 도르래를 달아서 돛을 폈다 걷었다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중국과 한국에서 널리 쓰인 이러한 세로돛은 가로돛에 비하여 돛을 펴고 걷는 것이 간단하였고, 또한 역풍(逆風)을 받을 때에도 지그재그 식으로 전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한선의 경우 세로돛을 달 수 있는 돛대를 보통 두 개 세워 두었으며, 이 돛대들은 필요에 따라 자유로이 눕혔다 세웠다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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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도(出帆圖)」에 그려져 있는 전통 한선의 모습

2.근대 이전 한국 수군의 주력 군함의 변천

(1)고려 시대

고려의 역사에 있어서 수군의 활동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우선 건국 당시부터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각각 수십에서 수백 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서해의 제해권을 두고 대립하였고, 고려 중기에는 원(元)의 일본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 척의 군함을 건조해야만 했다. 그리고 고려 말에는 날로 극심해져 가는 왜구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화약 무기를 개발하는 한편, 군함의 제도도 일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흐름에 따라 고려의 역사에는 대선(大船), 누선(樓船), 과선(戈船), 검선(劍船) 등의 다양한 명칭을 지닌 군함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이 바로 과선과 검선의 개발, 그리고 화약 무기의 도입이다. 고려 중기와 말기에 각각 개발된 과선과 검선은, 이름 그대로 배의 측면에 짧은 창과 칼을 빽빽이 꽂아 두어 적병이 배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훗날 이순신이 개발한 거북선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재미있다고 하겠다. 또한 고려 말 최무선은 화약과 화약 무기를 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이것을 해전에 도입하여 왜구를 소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이처럼 일본 해상 세력과의 해전에 있어서 화약 무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전통은 훗날 임진왜란 시기까지 이어지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된다.

(2)조선 초·중기 - 맹선 체계의 등장

조선 건국 당시 조선 수군의 지상 과제는 이전의 고려 말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토벌이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그 때까지 간간히 이어져 온 왜구의 침략에 단호히 대처해 나갔고,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최윤덕으로 하여금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아예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세종대에 대마도주와 화친 조약을 맺고 부산포, 제포, 염포 등의 삼포를 개방하고 무역을 허락하면서, 조선은 이후 수십 년간 왜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조선으로서는 왜구를 토벌하던 시기에 무질서하게 제작되어 온 군함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재분류하고, 또한 어느 정도 척수를 줄여서 평화기의 국방 정책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개발된 것이 바로 맹선(猛船)이었다. 이미 세조 대에 신숙주가 ‘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는’ 병조선(兵漕船)을 만들 것을 건의하고 그에 따라 대·중·소선을 제작하였고, 이후 성종 대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이것이 대·중·소맹선 체계로 확립되게 된다. 대맹선은 80명, 중맹선은 60명, 그리고 소맹선은 30명이 탑승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세미(稅米)를 실어 나르는 조운선의 역할을 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체 맹선 수의 1/3 이상을 예비용으로 돌려서 보관해 두었으니, 이것 역시 평화기에 사용하기 위하여 개발된 맹선 체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3)조선 중기 이후 - 판옥선 체계의 확립

하지만 평화기에 사용하기 위하여 개발된 맹선 체계는 머지않아 그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게 된다. 조선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삼포의 일본 거류민들이 대마도의 왜구들과 합세하여 일으킨 삼포왜란(1510) 이래 왜구의 침략은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조선 수군은 효과적인 대처를 전혀 할 수 없었다. 또한 사량진왜변(1544) 때에 왜구는 마침내 화약 무기로 무장하기까지 하였고, 을묘왜변(1555) 때에는 아예 조선의 대맹선보다 더 큰 배를 이끌고 침략하러 왔으니, 이것은 16세기 초반 이후 왜구의 침략에 동참한 중국과 서양 출신의 해적들에게서 조선 기술과 화약 무기 기술을 배운 결과로 보인다. 지금까지 왜구에 대한 조선의 전통적인 대처 방안은 왜구의 것보다 더 큰 배에 화약 무기를 싣고 맞서 싸우는 것이었으니만큼, 이러한 전력상의 오랜 우위를 마침내 상실할 위기에 처한 조선 정부는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조선 정부에서는 성종 대부터 소위 ‘대함주의(大艦主義)’와 ‘소함주의(小艦主義)’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척수가 적더라도 큰 배를 중시하는 대함주의자들과, 작은 배를 사용하더라도 다수의 군함을 보유해야 한다는 소함주의자들이 대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등 왜구의 크고 작은 침략에 시달리던 중종 대에 와서 더욱 심화되었지만, 보다 큰 배와 화약 무기로 무장한 왜구에 대한 위협이 마침내 현실화되면서 점차 대세는 대함주의자들에게 유리해지게 되었다. 결국 을묘왜변이 발발한 명종 10년(1555)에 신형 군함이 개발되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범을 보이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판옥선(板屋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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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판옥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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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의 단면도

판옥선은 이제까지의 군함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는 군함이었다. 맹선 등을 포함한 기존의 군함의 경우 갑판 위에 여러 층의 누각을 쌓아올린 경우는 종종 있어 왔지만, 기본적으로는 갑판이 하나밖에 없는 평선(平船)으로서 그 갑판 위에 사부(射夫), 포수(砲手) 등의 전투원과 노꾼(櫓軍)과 선원 등의 비전투원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투와 주행 모두의 효율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노꾼들의 안전 역시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판옥선의 경우 기존의 갑판 주위에 판자로 된 두꺼운 방패를 빈틈없이 늘어세우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갑판을 설치하였으니, 이름 그대로 갑판 위에 ‘판자로 집을 지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노꾼들은 2층 갑판 아래의 밀폐된 공간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전투원들은 2층 갑판 위에서 노꾼들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전투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판옥선은 맹선에 비해 배의 높이가 보다 높아졌는데, 이로 인하여 적병이 배 안으로 뛰어들기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의 명중률과 사거리 역시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장점을 지닌 판옥선은 을묘왜변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배치되어 맹선 체계를 대체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조선 수군의 명실상부한 주력 군함으로서 일본 수군에 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 때 이후 판옥선은 군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선(戰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은 거북선과 같은 특수 군함, 병선(兵船)·방선(防船)과 같은 중형 군함, 그리고 사후선(伺候船) 등과 같은 소형 보조함 역시 보유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 즉 판옥선은 구한말의 군제 개혁으로 구식 수군이 혁파될 때까지 변함없이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4)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의 우수성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지휘 하에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면서도 또한 완벽한 것이었다.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26회의 해전에서 일본 군함 700척을 격침시키고 23척을 나포했던 반면, 전투로 인한 군함 손실은 사실상 한 척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자 역시 매 해전에 있어서 십 수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이러한 완벽한 승리의 원인을 이순신 개인의 탁월한 전략·전술적 능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군함과 화약 무기로 대표되는 해상 무기 체계에서 조선이 일본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러한 무기 체계상의 우위를 100% 발휘할 수 있도록 전력을 조정하는 면에서 또한 탁월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이 일본 수군의 주력 군함인 아다케(安宅), 세키부네(關船) 등에 비해 어떠한 점에서 우수하였는지를 요약해 보겠다.

①화력

임진왜란이 발발할 무렵 조선은 이미 고려 말부터 200년간에 걸쳐 이어져 오는 화기 개발과 사용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화기 제작 기술을 도입한 지 겨우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조선은 군함에 탑재한 화기를 사용하여 왜구를 토벌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 시기에도 판옥선에서 천(天)·지(地)·현(玄)·황(黃)자총통 등의 대형 화기와 승자총통(勝字銃筒) 등의 소형 화기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였다. 그리고 바꾸어 말하자면 배의 높이가 높고 튼튼하며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분리되어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판옥선이야말로 화기 운용에 적합한 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군함에서 조총만을 사용했을 뿐 대포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군함 역시 구조적으로 튼튼하지 못하였기에 대포를 설치하기에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②방어력

앞 장에서도 살펴보았다시피, 전통 한선의 방식으로 제작된 배는 일본의 배에 비해 구조적으로 튼튼하였다. 우선 목재로 사용하는 소나무가 일본의 삼나무, 전나무보다 단단하였고, 배에 쓰이는 판자 역시 더욱 두꺼웠을 뿐만 아니라, 쇠못이 아닌 나무못으로 목재를 결합하였기에 배가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판옥선은 그 높이가 높았고 거북선은 아예 위를 판자로 덮고 송곳 등을 꽂아 두었기에, 조총을 일제 사격한 뒤 적선 위로 뛰어드는 단병(短兵) 전술을 장기로 하는 일본 수군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의 군함은 탑승하고 있는 장수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배의 주위에 화려한 휘장이나 장막을 걸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조선 수군의 화전(火箭) 공격의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③기동력

『성종실록』에는 ‘우리나라의 병선은 몸집이 크지만 느리고, 일본의 배는 작지만 경쾌하다’라는 단적인 표현이 나온다. 실제로 일본의 배는 가볍고 날렵한 모습을 하였기에, 조선의 배에 비해 항상 속도가 빨랐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판옥선을 포함한 조선의 주력 군함은 거의 예외 없이 돛대가 두 개 달려 있었던 것에 반해, 일본의 군함은 대부분 돛대가 하나밖에 없었다. 돛 역시 조선의 경우 역풍에 강하고 다루기도 쉬운 세로돛을 사용하였지만, 일본의 경우는 역풍에는 무용지물이 되고 다루기도 불편한 가로돛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군함에는 대개 4~6명이 젓는 커다란 노가 달려 있었던 반면, 일본의 군함에는 1명이 젓는 노가 수십 개 달려 있었다. 같은 수의 노꾼들이 노를 저을 경우, 조선의 큰 노 하나를 젓는 것이 일본의 작은 노 여러 개를 젓는 것에 비해 보다 효율적이라고 한다. 결국 일본의 군함은 순풍이 불거나 돛 없이 노만을 저을 경우에만 조선의 군함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 역시 배가 가볍고 날렵하기에 그런 것이지 돛이나 노의 성능이 조선의 군함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3.거북선의 원형에 대한 연구 현황과 쟁점들

(1)거북선 연구의 역사와 주요 연구자들

근대 이후 처음으로 거북선에 대하여 고증과 복원을 시도한 이는 바로 호레이스 H.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씨였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그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쓰이고 있던 전통 한선에 대한 귀중한 사진을 많이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사료 해석을 통하여 거북선의 근대적인 설계도를 최초로 제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최영희, 조성도 씨 등에 의해 거북선의 형태와 특징에 관한 연구가 이어져 오다가, 마침내 조선 공학을 전공한 김재근 씨의 주장에 따라 서양식 노를 사용하는 2층 구조의 거북선이 한동안 정설로 굳어지는 듯하였다. 하지만 역시 공학을 전공한 남천우 씨가 거북선에서 한국식 노가 사용되었음을 입증하고 그에 따라 3층 구조설을 주장하면서, 기존의 2층 구조설은 그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2층에서 한국식 노를 사용한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진 가운데, 이원식, 정광수, 박혜일, 최두환, 신재호 씨 등의 연구자들이 독자적으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2)거북선 연구의 주요 사료와 그 문제점

학자들이 거북선을 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근거로 삼는 사료는 그 시기에 따라 크게 두 부류, 즉 임진왜란 당시와 그 이후에 작성된 사료를 나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작성되었거나 혹은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한 이들에 의하여 작성된 사료로 들 수 있는 것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장계(狀啓)』,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行錄)』, 승지(承旨) 최유해의 『행장(行狀)』, 『선조수정실록』 등이 있다. 그리고 이후에 작성된 자료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200여 년이 지난 1795년에 정조의 명에 따라 이순신과 거북선에 관한 자료를 총망라하여 수집·정리하여 편찬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선 후기에 제작되어 사용된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등 두 척의 거북선 그림과 함께 그 설명문까지 붙어 있어, 거북선의 연구에 있어서 제 1의 자료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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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 거북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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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

하지만 연구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들 사료 간에 서로 모순되는 점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에 대한 사료는 그 수가 적고 그림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당시의 거북선과 그로부터 무려 200년 뒤의 거북선에 대한 『이충무공전서』의 내용 간에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 책에 수록된 거북선 그림과 그 설명문 내용 간에도 일치하지 않는 점이 발견될 정도이며, 설명문의 내용 자체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수준이다. 또한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거북선 그림들 역시 일단 그 시대가 불분명하고, 그림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혹은 적절한 설명문이 붙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의문만 더욱 증폭시키기도 한다.

(3)거북선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연구자들 간의 쟁점들

①용머리의 용도는 과연 무엇인가?

거북선에 대하여 일반인들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바로 이 용머리(龍頭, 거북머리가 아님)의 용도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용머리는 그 안에서 유황과 염초(焰硝)를 태워 연기를 내뿜어 적을 혼미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에 대한 설명문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조선 후기의 수군 훈련도 등의 그림에 묘사된 거북선 역시 입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이 현대 해전에서의 연막 전술의 시초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이분의 행록에서도 용머리의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였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남아 있다. 또한 근대 이후의 화학 물질의 도움 없이 단지 유황과 염초만을 태워서 연기를 낼 경우 ‘적을 혼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적 함대 혹은 아군 함대를 연막으로 완전히 뒤덮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에도 늘 부족하였던 유황과 염초만 낭비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 안에는 틀림없이 대포가 들어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에 대한 설명보다 용머리가 훨씬 컸을 것이다. 최근 들어 이순신의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머리 없는 거북선’ 그림을 근거로 하여, 용머리가 배 안팎으로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새로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진다.

②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은,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자랑스러운 발명품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듣거나 책에서 읽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자랑스러워하기 전에, 먼저 ‘철갑선(鐵甲船)’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천천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철갑선을 ‘방어 등의 목적으로 선체의 전체 혹은 일부에 철판을 붙인 배’라고 한다면, 아쉽게도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미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년 전인 1578년에,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철갑을 입힌 대형 군함 7척을 건조할 것을 명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단순히 포탄 등을 막아내기 위하여 선체에 철판을 붙인다는 개념은 그다지 놀랍거나 획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거북선을 ‘철갑선’이라고 부르면서 자랑스러워 할 때의 거북선의 이미지는, 단지 ‘철판을 붙인 배’ 정도가 아닌 듯하다. 즉 우리는 마치 거북선이 철골과 철판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금속제 선박의 원조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에서 진정한 의미의 철갑선(Ironclad)이 등장한 것은, 산업 혁명으로 인하여 강철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증기기관과 외륜(外輪), 스크류 등이 배에 장착되며, 함포의 위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이를 견딜 수 있는 구조의 배가 필요하게 된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 없이 단지 선체의 일부를 철판으로 덮었다 하여, 거북선이 진정한 의미의 ‘철갑선’의 원조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과연 거북선의 등판이 철갑으로 되어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측의 사료에는 거북선의 등판에 칼이나 송곳 등을 꽂았다고만 되어 있지 철갑을 입혔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철갑을 입힌 조선의 군함에 대한 기록은 일본측의 사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과 함께 거북 등판에 철갑을 입히면 거북선이 지나치게 무거워지고 또한 전복되기 쉬워진다는 점을 들어, 김재근 씨와 남천우 씨 등은 거북선에는 아예 철갑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적 함대의 한복판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야만 하는 거북선의 특성상, 적의 공격으로부터 거북 등판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등판에 송곳 등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얇은 철판들을 이어 붙여 등판을 덮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초반의 청백자 항아리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에서도, 거북 등판 위에 철갑이 씌워져 있고 그 위에 다시 송곳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영조 24년(1748)에 경상좌수사 이언섭이 작성한 장계의 내용을 보면, 거북선과 관련된 내용에서 ‘인갑으로 덮개를 하고(鱗甲爲蓋)……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을 하였고(以板爲蓋仍作鱗甲)……’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거북선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근대적인 금속제 선박의 원조라기보다는 선박의 특정 부분을 철갑으로 보호한 선박으로 보아야 하고,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일찍이 일제 강점기에 신채호 선생의 표현처럼, 거북선은 ‘철갑선’이라기보다는 ‘장갑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고정 관념은 종종 맹목적이고 비과학적인 판단으로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해방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엉뚱하게도 또한 ‘잠수함’이었다는 생각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 출판된 임진왜란 관련 서적은 거북선이 마치 잠수함과 같은 방식으로 해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거북선은 철갑선이니만큼 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인양할 수 있다는 주장도 최근까지 심심치 않게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거북선은 근본적으로 목선(木船)이니만큼, 물에 가라앉으면 곧 썩어 없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과 합리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생각은 종종 어리석고 맹목적인 믿음으로 흘러가 버리기 쉬운 것이다.

③거북선의 내부 구조는 과연 어떠하였는가?

이 문제는 거북선의 원형에 관한 연구와 논쟁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연구자들 간에 의견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면서도, 단기간 내에는 어떤 모범 답안이나 합의된 결론이 도출되기 힘들 것으로 보이는 문제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이 문제는 과연 거북선의 선체 내부가 몇 개의 층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각각의 층에 선실, 노와 노꾼, 전투원 등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편의상 갑판의 위치와 그에 따라 선체 내부를 몇 개의 층으로 나누었는가를 기준으로 삼아 여러 연구자들의 주장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2층 구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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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씨의 거북선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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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씨의 거북선 단면도

이것은 언더우드 씨가 처음 제기하고 그 뒤 김재근, 이원식 씨 등이 동의한 주장이다. 언더우드 씨의 경우 한국식 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기에, 1층에서 노군들이 서양식 노를 젓고 2층에서 전투원들이 전투에 임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김재근, 이원식 씨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였지만, 훗날 판옥선과 거북선에 사용된 노가 한국식 노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층에 선실, 2층에 노꾼과 전투원을 함께 배치한 새로운 2층 구조설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 경우 거북선의 방패에 뚫려 있는 포 구멍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지만, 노꾼과 전투원을 2층에 함께 배치한 것은 사실상 판옥선 이전 시대로의 퇴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불편한 구조였기에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3~5척 정도밖에 제작되지 않았다고 김재근 씨는 주장하였다.

㉡3층 구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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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우 씨의 거북선 단면도

이것은 남천우 씨가 한국식 노의 사용을 처음으로 입증한 뒤, 그와 최두환 씨 등에 의하여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의 핵심은 거북선은 판옥선을 기본으로 하여 개발된 배이기에, 거북선이 판옥선보다 퇴보한 내부 구조를 가졌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남천우 씨는 2층에 선실과 노꾼, 3층에 전투원이 배치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최두환 씨는 1층에 선실, 2층에 노꾼, 3층에 전투원이 배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식 노의 사용을 입증하고 판옥선과 거북선의 연속성을 찾으려고 하였다는 점에서는 탁월하였다고 하겠지만, 아쉽게도 모든 거북선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2층 방패의 포 구멍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 또한 보이고 있다.

㉢반 3층 구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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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수 씨의 거북선 단면도

이것은 정광수, 신재호 씨 등이 주장한 것으로, 2층과 3층을 구분하는 제2 갑판이란 선체 위를 완전히 덮었던 것이 아니라 전투원들이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발판 정도의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정광수 씨의 경우 1층에서 노꾼들이 서양식 노를 젓고, 2층과 반 3층에서 전투원들이 전투에 임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거북선에서의 한국식 노의 사용을 무시하고 선실의 위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다고 하겠다. 한편 신재호 씨는 1층에 선실, 2층에 노꾼과 전투원, 반 3층에 전투원이 배치되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거북선의 내부 구조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기에,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혹은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는 실제로 김재근 씨가 주장한 바와 같이 불편한 2층 구조였을 수도 있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④거북선에는 충각(衝角)이 달려 있었는가?

『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는 이물 위에 귀신 머리 모양의 조각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모습이 보이며, 그 설명문에서도 ‘거북머리 밑에 또한 귀신 머리를 새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러한 조각이 ‘귀신 얼굴(鬼面)’이 아닌 ‘귀신 머리(鬼頭)’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들어, 이것이 서양의 갤리 선에 달려 있던 충각과 같은 것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이 마치 정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지만, 조각의 위치가 너무 높고 또한 조선 후기의 수군 훈련도에 그려진 판옥선 역시 비슷한 위치에 그러한 조각이 새겨져 있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아직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⑤거북선에는 장대(將臺)가 있었는가?

장대란 군대의 장수가 올라서서 전투를 지휘할 수 있도록 한 높은 망루나 누각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인 군함에는 크던 작던 간에 그러한 장대가 어김없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최근 들어 거북선에도 등판 가운데에 작은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인 1592년에 이덕홍이 광해군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과 이듬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 수록되어 있는 거북선 그림, 이순신의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장대 달린 거북선’ 그림, 그리고 조선 후기의 수군 훈련도에 묘사된 거북선 그림 등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평화기에 사용된 거북선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 투입된 거북선의 경우에도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특히 이덕홍이 올린 장계에 실려 있는 ‘허리에 판옥(板屋)이 있는’ 거북선 그림과 설명문은, 실은 당시에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거북선의 그림이 아니라 그가 새로이 제안한 ‘귀갑선(龜甲船)’의 구상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그림을 근거로 하여 거북선에도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⑥거북선은 이순신이 ‘발명’한 것인가?

최근 들어 거북선은 이순신이 ‘발명’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즉 어떤 이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무려 180년 전인 태종대에 이미 거북선이라는 같은 이름에 성격까지 비슷한 군함이 제작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이순신의 부하인 나대용이 실질적인 거북선의 제작자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순신이 거북선을 구상할 때에 태종대의 거북선의 존재 사실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실제 제작 과정에서 수군과 선박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나대용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종대의 거북선은 무려 180년 전에 잠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가 곧바로 사라진 군함이었고 그것에 대한 기록 역시 극히 적으니만큼, 태종대의 거북선과 이순신의 거북선은 사실상 전혀 별개의 군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나대용이 거북선의 실제 제작 현장에 있어서 주역을 담당하였다 하더라도, 거북선을 구상하여 개념을 잡고 제작을 결정한 뒤 상부의 허가를 받아낸 것 등은 어디까지나 이순신의 공이었다. 따라서 거북선은 이순신이 ‘발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순신이 ‘개발’을 결정하고 주도하였기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군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⑦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는가?

우리는 흔히 이순신 하면 곧바로 그가 개발한 거북선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임진왜란에서의 조선 수군의 승리의 요인으로서 이순신의 전략·전술적 능력과 함께 빠짐없이 지적되는 것이 바로 거북선의 대활약이다. 그로 인하여 마치 임진왜란 때에 거북선이 대량으로 제작되었고, 이들이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으로서 활약하였다는 인상까지 받게 될 정도이다. 하지만 엄연히 말해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은 전선, 즉 판옥선이었고, 사료에 충실할 경우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제작된 거북선의 총 척수는 고작 3척에서 5척을 넘지 않는다고 하다. 어떤 이들은 전체 군함의 척수에서 거북선이 차지하는 비율 등을 근거로 들어 이 시기에 수십 척의 거북선이 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적어 보이며, 오히려 거북선이 없이 판옥선만으로 무장하였다 하더라도 조선 수군의 결정적인 승리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높다고 본다.

⑧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에만 쓰인 군함이었는가?

이 문제 역시 앞에서 다룬 것처럼 이순신과 거북선을 지나치게 하나로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오해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조선 수군에 의하여 꾸준히 사용되어 왔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척수 역시 크게 증가하여, 숙종 대까지 5척이었던 거북선은 영조 22년(1746)에는 14척으로 늘어나고, 정조 6년(1782)에는 무려 40척에 이르게 되었다. 비록 그 이후에는 거북선의 척수가 점차 줄어들지만, 그래도 순조 9년(1809)에는 30척, 그리고 동왕 17년(1817)에는 18척의 거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거북선은 임진왜란 기간 중에 대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전 이후에도 판옥선 등의 대형 군함, 병선과 방선 등의 중형 군함과 함께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서 그 소임을 다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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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씨의 거북선 측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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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씨의 거북선 측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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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우 씨의 거북선 측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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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환 씨의 거북선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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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수 씨의 거북선 측면도

Ⅲ.맺음말 - 학술 교류를 통한 거북선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며

지난 1998년 12월 21일자의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지학자이자 독도박물관장인 이종학 씨가 수년 전 경남 통영에서 발견하여 입수한 5종의 고문서를 이 날 공개하였다고 한다. 『수군절목(水軍節目)』이라고 불리는 이 고문서들은 임진왜란 당시에 수군 기지인 수영(水營)에서 직접 작성한 일종의 보고서로서, 수백 종에 이르는 군함의 부품 목록과 무기 현황, 당시 군의 편제와 병력 현황 등을 담고 있는 극히 귀중한 문서이다. 특히 이 문서에는 1593년 9월에 거북선 한 척이 제작된 사실과 함께, 거북선의 길이와 높이, 돛대의 수 등의 제원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 문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된 거북선의 자세한 제원을 설명하고 있는 최초의 공식 문서인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가 나온 이후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문서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전혀 들려오지 않고 있고, 이 문서를 공개한 독도박물관 측이나 열람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의 연구 기관에서도 어떠한 연구 결과도 내어 보이지 않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학계에서 거북선의 원형에 대한 어떠한 합의된 결론도 도출해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20세기 들어 한국에 근대적인 역사학이 도입된 이래, 지금까지 수십 명의 연구자들이 거북선의 원형과 실체를 밝히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들 중에는 정통 역사학자도 있었고, 공학을 전공한 이들도 있었으며, 군인도 있었고, 민간 연구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활발한 학술 교류를 통하여 문헌을 철저하게 고증하거나, 조선 공학적 기법을 적용하거나, 군사학적인 지식을 참고하는 등 각자의 다양한 연구 방법을 도입하여 가장 원형에 가까운 거북선에 대한 합의점을 이끌어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종합해 보면, 어떤 공통점보다는 오히려 서로 모순된 점들만이 눈에 띄어서, 오히려 진짜 거북선의 원형이란 과연 어떠하였는지 혼란만 더욱 심해질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혼란의 원인으로서 사료의 절대 부족과 사료간의 모순도 들 수 있지만, 또한 연구자들 간의 상호 학술 교류가 미비하다는 점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이 발견된 사료를 개방하여 공유하지 않고, 다른 분야 혹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 교류하지 않다 보니, 저마다의 일방적인 주장만이 난무할 뿐 어떠한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와중에도, 전국 관광지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제멋대로 만들어진 거북선 모형이 버젓이 팔려 나가고 있고, 박물관에는 각양각색의 거북선 축소 모형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거북선 하면 다가오는 이미지란,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하는 구닥다리 물건 내지는 근거 없는 민족적 우월감을 불러오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의견의 불일치와 오해, 고정 관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거북선은 세계사적으로도 대단히 독창적이고 강력한 군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도 300여 년의 기간 동안 조선의 해방(海防)을 책임져 온 핵심 전력이었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북선의 실체가, 연구자들 간의 폭넓은 학술 교류와 사료 공유 등을 통하여 점차 밝혀질 그날을 기대해 본다.


<그림 출처>

◎ <그림 1> 김재근, 거북선(서울: 정우사, 1992), 권두 화보 3쪽.
◎ <그림 2> 이원식, 한국의 배, 빛깔 있는 책들, 제 11권(서울: 대원사, 1990), 12쪽.
◎ <그림 3> 같은 책, 14쪽.
◎ <그림 4> 같은 책, 82쪽.
◎ <그림 5> 김재근, 한국의 배(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권두 화보 3쪽.
◎ <그림 6> 김재근, 거북선, 68쪽.
◎ <그림 7> 김재근, 같은 책, 203쪽.
◎ <그림 8> 같은 곳.
◎ <그림 9> Horace H. Underwood, Korean Boats and Ships(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Fig 48.
◎ <그림 10> 김재근, 같은 책, 109쪽.
◎ <그림 11> 남천우, 유물의 재발견(서울: 도서출판 학고재), 2000, 290쪽.
◎ <그림 12> 정광수.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서울: 정신세계, 1990), 341쪽.
◎ <그림 13> Horace H. Underwood, 같은 책, Fig 47.
◎ <그림 14> 김재근, 같은 곳.
◎ <그림 15> 남천우, 같은 곳.
◎ <그림 16> 최두환 著·譯, 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 6권(서울: 도서출판 우석, 1999), 270쪽.
◎ <그림 17> 정광수, 같은 책, 336쪽.


<참고 문헌>

◎ 김경진 외. 격류, 2권. 서울: 중앙 M&B, 2001.
◎ 김재근. 거북선. 서울: 정우사, 1992.
◎ 김재근. 한국의 배.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 남천우. 유물의 재발견. 서울: 도서출판 학고재, 2000.
◎ 노병천. 완전한 승리. 서울: 성현출판사, 1998.
◎ 박혜일 외. 이순신의 일기.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이원식. 한국의 배. 빛깔 있는 책들. 제 11권. 서울: 대원사, 1990.
◎ 임진장초. 조성도 譯. 서울: 연경문화사, 1997.
◎ 정광수.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서울: 정신세계, 1990.
◎ 최두환 著·譯. 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 6권. 서울: 도서출판 우석, 1999.
◎ Underwood, Horace H. Korean Boats and Ships.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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