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관광가이드] SF관광가이드/ 외계인 신화(31)
이론물리학자 폴 데이비스(Paul Davis)는 외계 지성체가 반드시 생물이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외계에 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있는지 탐사하는 작업은 실로 엄청난 인내를 요한다. 외계문명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수백만 년 만에 받는다면 어떻게 할 텐가? 하지만 탐사주체가 기계(로봇)나 생체와 기계가 합성된 유형이라면 해당 작업이 아무리 지루하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거의 불평 한마디 없이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학자들은 기계가 어느 수준의 발전단계를 넘어서면 오히려 자신들의 창조주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보하고 진화할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 같은 맥락에서 스티븐 호킹은 자기 증식 및 설계능력을 지닌 기계 생명을 항성 간 우주 탐사 및 개척에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유사한 전망을 내놓았다. 어쩌면 기계 생명은 자신의 창조자인 외계 종족이 멸종한 뒤에도 버젓이 살아남아 자기증식하며 지금도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컷 보네것(Kurt Vonnegut)의 장편 ‘타이탄의 사이렌들 (The sirens of Titan;1959년)’과 스타니스와프 렘(Stanislaw Lem)의 장편 ‘우주선 무적호 (The Invincible; 1964년)’ 그리고 스티븐 백스터(Stephen Baxter)의 장편 ‘타임십 (The Timeships; 1995년)’에 등장하는 기계지성들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타이탄의 사이렌들’에 등장하는 트랄화마도르인은 피가 흐르는 인간 못지않게 자기 캐릭터가 분명한 기계 생명 종족의 일원이다. 이 기계 생명들은 설사 몸에 이상이 생겨도 해당 부위의 부속만 갈아주면 그만인 까닭에 영겁의 시간을 주무르는, 거의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은 유한한 삶에 갇힌 인간 개개인과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수억 년이 걸리는 임무도 불평불만 없이 해낸다.
‘우주선 무적호’에서는 오래 전 외계의 선진문명이 외딴 행성에 남기고 떠난 로봇들이 자동으로 자기복제 및 진화를 거듭하여 집단지성 규모의 자아를 갖게 된다. 실종된 자매 우주선을 찾아 우연히 이 행성(Regis III)에 착륙한 강력한 무장우주선 ‘무적’ 호의 승무원들은 유기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황량한 땅에서 아주 작은 벌레처럼 생긴 로봇들을 발견한다. 이것은 하나의 개체뿐이거나 작은 무리를 이룰 때에는 지능이 낮아 인간들에게 그리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주목을 끌어 어마어마한 벌레 떼가 한데 몰려들면, 이 로봇들은 마치 자아를 지닌 한 몸의 생물처럼 복잡한 행동을 하며 외부 침입자를 강력한 전자기 간섭을 통해 격퇴한다.
1960년대에 발표되었지만 오늘날 나노봇의 선구적 원형이라 할 이 기계벌레들은 무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하는데, 이들의 진화경로는 서로 다른 로봇들 간의 끝없는 전쟁을 통해 자극받는다. 그 결과 인간들이 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아주 작은 벌레처럼 생긴 극소형 기계들만 살아남은 상태였다. 이 기계벌레들은 한데 모여 거대한 구름을 형성할 뿐 아니라 고속비행이 가능하여 대류권까지 올라간다.
이 호전적인 미물들에게 자매우주선의 승무원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무적 호 승무원들은 분노한 나머지 대대적인 반격을 꾀하지만 마침내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 이 로봇곤충들은 이곳 생태계의 일부가 된 까닭에 섣불리 바로잡으려 나섰다가는 행성 규모의 혼란(이를테면 핵겨울)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우위에 있는 생명이라 해서 생존경쟁에서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이 사고실험은 우주에서 우리가 얼마나 낯선 존재와 조우할 수 있는가를 상정하는 동시에 이 우주에서 인간의 위상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한술 더 떠서 ‘타임십’에 나오는 기계지성들은 거의 전지전능에 가까운 초월적 존재들이다. 주인공이자 19세기 말 영국에서 온 시간여행자가 자신의 시간여행을 꾸준히 지켜보고 있다고 해서 일명 ‘주시자’라 이름 붙인 이 종족은 지금으로부터 약 5천만 년 후의 미래에 인류가 사멸한 뒤 남겨놓은 기계문명의 후손이다. 이들은 주인공이 조종 중인 타임머신 바로 바깥에서 급속히 뒤바뀌는 시간선에 뒤쳐지지 않고 맨몸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들이다.
이 기계생명들이 가장 공들여 준비한 사상 최대의 과제는 빅뱅의 너머로까지 나아가 멀티버스에 있는 다른 우주로 달아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탐사여행이다. 초고온 초고압의 특이점으로까지 되돌아가는 빅뱅의 순간에도 견딜 수 있는 혁신적인 타임머신을 개발하기 위해 주시자들은 무려 1백만 년의 준비기간을 들인다. 앞서 ‘타이탄의 사이렌들’에서도 언급했듯이, 기계 생명의 경우에는 인간 개체의 잣대와 시간감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목적만 분명하다면 소요기간은 그 다음 문제다.
심지어 소통하는데 1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해도 기계지성은 망가지지 않고 자신을 보수할 수 있는 능력만 갖췄다면 인간처럼 지루해하거나 정신이 닳아버릴 염려가 없다. 박성환의 단편 ‘백만 광년의 고독; 2009년’은 기계지성의 이러한 특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지구상의 인류가 멸종하고 달 기지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만 외롭게 파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어느 날 외계에서 지적인 정보로 추정되는 전파가 수신된다. 50만 광년 떨어진 작은 외부은하에서 온 이 외계신호의 해독에는 184년, 답장을 쓰고 다시 회신이 올 때까지 무려 100만 년이 걸린다. 이처럼 시간지연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외부 은하의 발신원 또한 달의 지적 존재 못지않게 유기체적인 특성을 버린 기계지성 또는 그와 유사하게 진화한 존재이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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