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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FREE WILL]의 신비에 대한 이해와 관련한 저자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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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날이오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댓글 10건 조회 1,310회 작성일 12-07-3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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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1993년 4월 2일 금요일, 8:33 A.M. 6년 2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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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FREE WILL]의 신비에 대한 이해와 관련한 저자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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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존 굴드[John Gould](피닉스 저널 독자--역주)]

자유 의지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들 각각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유 의지를 성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저마다가 갖고 있을 지도 모를 일련의 선입견들은 배제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아이들과 같은 시각을 갖고서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미 다 설명되어 있고, 또 다 준비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자유 의지의 이해를 위해서 남아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경험을 겪어 보는 일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 채, 부디 하나님의 빛이,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 ‘부족한 학생들[humble chela(student)]’에게 환히 비춰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통신)[Communication]에는 일반적으로 발신자, 경우에 따라 중계자, 그리고 수신자가 필요하며, 그 통신 수단으로는, 예를 들면 에너지, 표시(기호), 언어, 코드, 방송 혹은 다른 그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 가진 기타 여러 가지 수단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발신자는 의사소통(통신)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출발점이며, 수신자는 그 정보의 최종 수령자가 된다. 이 때 사용되는 통신 수단은,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정보가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신자가 전달하려는 정보가,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해석되어 원래 전달하려고 했던 정보를 잃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특히 ‘하나님-의식[GOD-consciousness]’(고차원의 인간 의식)에게서 생성되는 ‘우주적 성격의 정보’가 다른 ‘하나님-의식에게 전달될 때 발생하는 괴리로서, 통신 수단을 통한 정보 전달이 갖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만약 수신자의 의식 수준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최소한 그 사람에게 있어서 만큼은, 정보는 잃어 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태양계에서 방사되는 에너지를 정보와 한 번 비교해 보기로 하자. 바위는 태양빛을 받아도 광합성을 일으키지 않지만, 식물은 그러한 방식으로 성장한다. 식물은 이를 통해,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 왔으며, 또 우리 인류를 위해, 이 행성을 생물이 살 수 있는 행성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바위도 변화될 수 있다. 태양빛을 받으면 분명히 더 따뜻해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식물처럼 태양빛을 흡수하지 않으며, 성장이나 영양공급, 재생산에 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태양빛을 사용함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개체가 갖는, 두 가지 다른 사용 방식을 보았다. 마찬가지의 경우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빛을 한 가지 방식으로 받을 것이다.--예를 들어 그는 태양빛 아래에서 썬탠을 하거나 또는 과도하게 태양빛에 노출되어 심하게 그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는 태양빛 아래서 기분을 전환하거나, 어떤 측면에 있어서는 활력을 다시 얻기도 될 것이다. 반면, 다른 한 사람, 바로 우리의 친애하는 우주적 형제들의 가르침을 받는 겸손한 학생이기도 한, 다른 한 사람은, ‘폰 홈 E.T.[Phone Home E.T.]’(피닉스 저널 제 34권,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시리즈 제 5권--역주) 책자의 부록으로 들어 있는 정화 테이프[the Clearing Tapes](‘명상, 하나님과의 교신’ 참조--역주)를 사용하고, ‘피닉스 소유자-운영자 지침서[PHOENIX OWNER-OPERATOR MANUAL]’(피닉스 저널 제 27권--역주)에 나오는 법칙들(‘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참조--역주)을 실천하면서, 빛(보이는 빛과 보이지 않는 빛)을 통해 전달되는 ‘코드화된 정보들[coded information]’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리스도와 다른 빛의 존재들에 의해 전달되는 정보들을 이해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두 번째 사람도 햇볕을 이용해 썬탠을 하거나 혹은 심하게 그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건 이 사람에게 있어서 빛에 대한 최소한의 용도가 될 것이다. 반면, 우주적 명령 체계(우주 사령부)[space command]로부터 제공되는 ‘도구들’의 사용에 익숙치 않은 ‘미교육’자들은, 설령 정보를 받더라도 이내 잃게 되고 만다. 즉, 요점을 말하자면, 우리들 가운데는 ‘식물’ 같은 인간 뿐만 아니라 ‘바위’ 같은 인간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옳은 의도를 갖고서 도구들을 사용하며,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을 따르는 자들은 일련의 에너지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이를 이용해, 평균적인 인간들에게 있어서 대개 잠재되어 있고 숨어 있는, 고차원의 역량을 기르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하톤: 그러나 당신은 다음 사항을 각별히 명심해야만 합니다.--도구들을 단순히 “믿는 자”에게 마술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각자 각자는 정보를 받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얻게 되는 교훈들을 통해 충분히 깨달아야 합니다.--이건 마치 숫자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숫자를 대하는 태도는, 대학을 졸업한 과학자나 수학자들이 숫자를 대하는 태도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단지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있으면서, 마치 대단한 보고(寶庫) 위에라도 올라 앉아 있는 것처럼, 당신 마음이 갑자기 현명함으로 충만되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씀[the WORD]’이 퍼져 나감에 따라, 사람들이 차츰 ‘도구들’을 사용하고 ‘법칙들’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들은 ‘초고차원의 존재들[ultradimensional beings]’로부터 전달되는 정보들을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 행성에는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인간들이 가진 도구들로는 수용이 되지 않기에, 현재의 ‘이 행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유기체들’은 이 정보들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하톤: 심지어 이 행성의 거주자들은 그들이 받게 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 정보들은, 만약 이것이 해독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자신들을 변화시켜 놓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의 회합을 이끄는 고차원의 통신에 필요한 의식 수준에서 통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명상 하나님과의 교신’ 참조--역주)

여기서 우리는 선택, 판단, 자기-결정을 수반하는 자유 의지의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하나님-의식[GOD-consciousness]’이 발달되어 있지 않는 한, 어떠한 자유 의지도, 선택도, 판단도, 자기-결정도 없다. 예를 들면 인간과 컴퓨터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방식으로 입력 정보를 처리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한편, 한 명의 인간은 교육, 훈련, 사회 환경에 의해, 그리고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기타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형성되는 끝없는 자극들에 의해 프로그램 되며, 이에 따라 어떠한 자극에 대한, 그 또는 그녀의 반응은 점점 더 예측 가능해 진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이것이 더더욱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극 기술의 사용과 이에 따른 반응이 대단히 발달된 하나의 학문이자 과학으로서, 모든 수준의 인간 집단들을 통제하는 힘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를 보다 높은 우주적 인간[Higher Universal MAN(Human)]으로 만들어 주는 역량이 발달되었을 때, 그리하여 누군가 이 역량을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 개인은 그러한 상황 속에 머무는 것이 대단히 외로운 위치에 있는 격이 될 수 있다. 당신이 주어지는 정보들을 잘 이해하여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마치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입장에 놓인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정보를 가지고 타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들이 컴퓨터처럼 지시 단위를 이루는 코드에 따라 프로그램 되면, 그들은 이 지시에 따른 일련의 방식대로 반응한다. 법률, 또는 규칙들은 인간 행동의 전 영역에서 이러한 반응들을 통제한다. 그 때 인간들은 마치 기계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자신들이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자유 의지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단순히 ‘일련의 지시 세트’에 따라 반응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래밍’이, 한 대의 컴퓨터 또는 한 명의 인간이 어떤 주어진 지시 세트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모든 것은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과 종교적 스승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정한 지식’은 한 인간이 자극의 법칙 또는 명령의 법칙에 따라 정신적, 감각적 반응[reaction]을 보이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일련의 법칙들에 순응하여 행동하는 것은 정보를 처리하는 것도,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리하여 진정한 반응을 보이거나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지시를 따르는 것이 될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적들은 인류를 ‘영구적인 무지[perpetual ignorance of knowledge]’ 상태 속에 가둬두고 있다. 실제로 자신만의 개인적 흥미와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나라의 경사와 같은 일에 대한 집단적 반응만이 존재하며, 이 후자는 적들에 의해 통제된다. 오늘날 어떤 나라에서건 대중 사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분명코 개인은 항상 전체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수백 만 명(계획에 따르자면 다가오는 7년 동안에는 55억 명 이상의 사람들의 동참이 요청된다.)의 사람들이 전쟁, 혹은 산업 발전, 또는 소위 말하는 공공의 선, 혹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러한 ‘공익’에 연루되어 희생되어 왔으며, 개인들은 늘 선택의 권리를 포기해 왔다. 왜 사람들이, ‘공공의 선’에서부터 ‘전쟁’에 이르는 것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내어 놓고, 또 자신의 아들, 딸들의 희생을 허락하게 되는지는 프로그래밍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러기를 원치 않고, 또 그러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수용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행동하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명령에 순종하고, 일련의 행동 패턴에 순응한다. 이에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예상 가능한 방식의 반응을 보이기 전까지 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진실과 지식의 수준’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굳이 한 국가 또는 권위체, 또는 개인, 또는 개인들의 집단에 대한 비판적 사고는 제쳐 두더라도, 왜 위대한 철학자들 그리고 종교적 스승들이 항상 한 나라의 통치 권력과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으며, 왜 결국 그들이 죽음에 내몰릴 수 밖에 없었던 건지를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말하자면 그들은 소위 말하는 ‘공익[common good]’에 따라, 예측가능한 방식, 또는 처방된 방식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던 것이었다.

만약 그리스도 사난다[Christ Sananda]의 가르침이 로마 시절, 이 나라에 흘러 들도록 허용되었다면, 로마 제국은 붕괴되었을 터였다. 로마인들은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HIM]를 파괴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전체의 내용을 담은 참된 이야기는 피닉스 저널 2권에 수록되어 있다.) ... 이는 그처럼 간단한 문제인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와 함께 죽었다. (말하자면.) 그런데, 이 원래의 가르침들과 이에 추가되는 내용들이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에 되돌려지고 있다. 모든 인간들은 오늘날 이 가르침이 필요하며, 이를 우리 후 세대에게 건네는 것은 의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단지 이러한 가르침들이 옳고 선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지금의 이 세상을 구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들도 가장 낮은 ‘국민의 봉사자들’로서, 똑같은 방식으로, 법률들, 일련의 규율들에 따라 반응을 보이도록 규제(프로그램)된다는 점 또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들과 사회 자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창조된 힘’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이 힘은 그 자체로서 자신만의 생명력을 가진다. 이처럼 세상을 통제하는 “규율의 세트[sets of rules]”는 항상 물리적인 세상을 넘어서는 초고차원적인 힘들을 창조해 왔다. 이 힘은 과거부터, ‘어둠의 힘[the Powers of Darkness]’으로 불려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사람이나 국가가 아니라, 지금껏 무지를 낳고 영속시켜 온 ‘이러한 힘들’,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죽음’을 낳고 영속시켜 온, ‘이 힘들’인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당신이 먹고, 아침에 일어 나고, 직장에 가고, 물건들을 사고, 신문이나 책을 읽고, 영화나 TV를 보고, 또는 육군이나 해군에 입대하고, 나라를 지키고, 직장을 바꾸고, 투표에 참여하고,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또는 교회에 나가고, 이런 과정에서 일련의 정신적, 감정적 수준에 따른 결정들을 내린다고 할 때, 당신은 진정한 ‘자유 의지’에 따라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단지 명령들 또는 일련의 ‘지시 세트[a set of instructions]’에 따라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왔기 때문인데, 단순히 태어날 때부터 그래 온 정도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프로그램되었던 당신 조상들의 시대 이래로부터 죽 계속 그래 왔기 때문이다. 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는가? 왜냐하면 태양이 떠오르고 날이 밝아 오기 때문이다.(또는 기껏해야, 잠을 위해 할당된 시간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여하튼 일련의 통신 시그널이 존재한다--‘일어나세요!’ 왜 우리는 어떤 시간이 되면 잠자리에 드는가? 우리 모두는 자극에 반응한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시스템에 내장되어 있는 다양한 패턴의 프로그램에 따라 반응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결정을 내린다. 대안적인 결정이라는 것도 항상 그것이 프로그래밍 패턴 속에 들어 있는 것일 때만 허용된다. 어떤 선택이, 허용된 패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닐 경우, 기계는 다운되거나 휴즈가 나가 버린다. 인간의 경우, 정신 질환이 생기거나 건강이 나빠지거나, 혹은 혼동 상태 내지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정신 의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신 질환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사례가 대단히 높은 빈도로 발생한다. 기계가 계속해서 작동하려면 규칙을 따라야 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로 규율들을 준수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높은 수준에 존재하는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컴퓨터나 인간 모두 그 작동 범위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의 차원에서 겪게 되는 모든 경험들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컴퓨터와 같은 기계나 마찬가지로, 공간상에서, 지각의 범주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로, 물리적인 세상이라는 현실과 관계되어 있을 뿐이지, ‘영적 세상[the spiritual world]’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다.

우리의 우주적 형제들은 이 시대에 교사들로서,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또는 인간과 진실 사이의 중재자들로서 왔다. 우리가 ‘도구들’을 사용하고, (그들이 제시하는)(참된) ‘규칙들’에 따라 살고, 옳은 의도를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최면 상태 너머의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며,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지각하는 세상을 통해 얻는 감각들 너머로, 하나님과 함께 유래된 ‘진정한 존재의 상태[the true state of existence]’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모든 수준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친절과 관용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인간이 우리의 형제들이며, 따라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약 진실이 이 사회의 어떤 구성원들을 화나게 만든다면, 그 경우에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바위 위에 계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홈을 만드는 효과를 갖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우리의 사고 방식을 전파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이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 되겠지만, 우리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또 우리의 플레이아데스 형제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학생들로서, 이 과정에서 “호스트들[Hosts]”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해야 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곳이 자신의 ‘창조’의 영역임을 주장하시기에 앞서, 그 분께서 약속하신 이 땅 위에 ‘신 인류[the new race of men]’의 씨앗(핵)과 같은 형태(존재들)로서,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왕국[the Kingdom within]’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좀 뒤처져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감히 제도권의 반응 패턴을 탈피해, 이를 뚫고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문제점들은 바로 여기 놓여 있다. 만약 기계가 일련의 방식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즉시, 이 기계는 대개 엔지니어의 주목을 끌게 마련이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진다. 만약 당신이 아톤[Aton]과 ‘교신’을 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환각 상태에 빠져 있노라고 수군거린다. 만약 당신이 갖는 ‘사고 방식’이 일반적인 사고 패턴에 어울리지 않게 된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아프다거나 혹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기타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상황들이 펼쳐질 것이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라.

우리의 플레이아데스 형제들이 제시하는 순차적인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다. 1) 각 개인들이 깨어나고, 참된 현실을 상기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2) 일반적인 투입 패턴에 따라, 여지껏 차단되었던 정보들 또는 사건들을 ‘복구’시키는 데 관련된 두뇌와 신경 시스템을 재활성화시키고, ‘기억’을 자극시키는 것 3) 지금까지의 ‘투입 패턴[input patterns]’의 틀을 하나님의 영역에서 유래한 고차원의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 4) 우리의 ‘참된 형태와 의식[true form and consciousness]’을 계발하는 것 5) 적들의 힘의 영향력 아래 제거되었던 고차원의 힘을 사용해서[under the control of a higher power]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

그 열쇠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성장 잠재력[the growth potential latent within us]을 얼마나 활성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우리의 참된 존재[our true beingness]’에 대한 무지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기를 원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셨던 ‘영원한 삶[perpetual life]’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는 한, 우리는 이 일을 해내야만 한다. 하나님은 죽음을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다[God is not the author of death]. 죽음은 무지의 결과로서, 우리가 그러한 고통을 겪게끔 만든 권력자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이 잠재력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이성적인 사고, 논리적인 감각, 선결적인 반응 패턴[predetermined response patterns], 기타 이와 유사한 것들을 뛰어 넘는 기술이다. 우리를 가이드해주는 불빛은 바로 ‘그리스도[Christ]’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상/아이디어[Ideal/idea]”와 당신과의 관계를 증명해줄 목적으로, 나타났고, 사진 찍히기도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토리노의 수의[the shroud of Turin]’(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는 성물로 예수를 감싼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1898년 이탈리아 사진가 피아[Pia]가 이를 촬영. 수의에 드러나 있는 형상은 아주 희미하나 인화과정에서 발견된 음각 이미지가 너무나 선명해서 큰 논란을 야기--역주)에 나타난 모습의 음각 사진이 담긴 카드를 받은 적이 있다. 여기 나와 있는 “사난다/그리스도[Sananda/Christ]”는 다른 무엇도 아닌 하나님에 의해 투사된 위대한 모습으로, 우리의 참된 자아들의 한 예일 뿐이다. 우리들 각자각자가 사난다(어떤 명칭으로 부르든 간에)이며, 사난다는 우리 각각이다. 여기에 바로 미스터리가 담겨 있다. 프로그램된 사고를 가진 자들은 미스터리를 거부한다. 그러나, 미스터리 없이는, 성장도 없고, 포괄성(보편성)[univerality]도 없으며, 하나님과의 결합[union with God]도 없다.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우리에게 이 단순한 진실을 가르쳐 왔다.

이제, 여기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다음 중 어떤 힘에 내맡기는 지를 자문해 보라. 1) 적들의 힘, 즉, 물질적인 세상 뒤에 존재하는 힘, 또는 2) 빛의 힘[the Power of Light], 즉, 참된 현실[true reality] 뒤에 존재하는 힘.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제기해 봐야만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적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희망한다면, 그 때 당신은 물질적인 세상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더 깊이 접어들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그들이 인도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빛을 선택한다면, 그 때의 길은 감각적인 자극들로 가득 찬 인지적 세상에서 요구되는 이성적, 논리적 사고를 능가하는 길로 접어드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양자 가운데 부분적인 선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선택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빛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사고에 영향을 받은 자들이 ‘일반적인 힘’을 실생활에 적용하듯이, ‘영적 과학자들[spiritual scientists]’은 ‘영적인 힘[spiritual powers]’을 실생활에 적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 영향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세상이나 세속, 혹은 물질적인 과학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과학계의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찾고 있지만, 그들은 이러한 진실을 세상과의 일종의 타협 속에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위를 따려고 안달하며, 과학계에서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길 바라며, 경험적 지식을 얻는 방식에만 몰두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진실을 추구하고 있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하나님의 방식 속에서 찾는 것으로, 이것은 그들이 대표하는 것과는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당신이 이걸 믿는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이건 그러한 방식일 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난다[Sananda]나 하톤[Hatonn]이 사는 세상은 지금 이 세상과는 반대되는 세상이다. 사난다가 이야기했듯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인간을 섬길 것인지, 양자 가운데 선택해야만 한다. “시저[Caesar]의 것은 시저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이것은 아주 명쾌한 문제이다. 물질적인 방식에 매달리는 것은, 단지 주어진 가르침들에 혼동만을 가져올 뿐이며, 정화 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옛날 “경전”에 나와 있던 자구에만 집착하며, 정작 ‘영적 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Pharisees]을 상대로 한 설교는 없었을 터였다.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은, ‘자극 또는 프로그래밍’이라는 가장 단순한 기제에 근거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저마다의 사람들이 이 고착화된 프로그래밍의 틀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물론 우리의 플레이아데스 형제들은 우리 개개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틀을 깨기 위해 ‘충격 요법’을 사용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각은 이러한 변화에 심하게 저항하지 않았던가?

플라톤의 향연[Plato’s Symposium]중 “사랑”에 관한 부분에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45-385, 고대 그리스 희극작가--역주)가 한 연설을 상기해 보자. 나는 그 그리스 고전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려 한다. : “고대인들은 그 형체에 있어서 구형에 가까웠다. 원래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를 가졌으며, 목은 하나인데 얼굴은 두 개로 뒤통수를 맞대고 붙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 성이 존재했다. : 이중 남성, 이중 여성, 그리고 하나의 육체에 남성과 여성이 결합되어 있는 양성.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지식’을 추구하여 그 분을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을 제각각 그 절반의 모습으로 갈라 놓았다. 사랑은 이렇게 분리된 인간들이 그 원래의 이중 형태로 되돌아 가려는 욕구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비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정신분석학자들, 이를 테면 프로이드[Freud] 같은 학자는 소위 말하는 플라톤의 ‘신화 혹은 전설’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가장 종교적인 경전이기도 한 성경에서도, 인간은 그 원래의 형태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언급이 들어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시원적인 전체성[original wholeness of being]’, 무엇보다도, 그들의 ‘참된 실제[true reality]’를 잃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진실을 발견하게 되면, 굳이 꼭 기존 사회--과학, 기성 종교, 또는 여러가지 세상사--를 떠나버리지 않고서라도, (단순한) ‘반응’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BUT NOT REACT], ‘진실’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이에 따라 세상사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단순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그 자는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under the influence of Christ] ‘빛존재성[lightbeingness]’을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 ;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해 주는, 혹은 인간의 ‘원래의 모습’ 또는 ‘원래의 상태’와 연결해 주는 ‘중재력[mediating force]’을 의미한다.

이는 언뜻 모순적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주어진 문제를 다시 한 번 면밀히 살펴 보기로 하자. 만약 이 세상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야말로 ‘최고의 빛[the highest Light]’이라고 한다면, 왜 인간의 육체는 죽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향유하고 또 이 세상을 누리며 살아간다.--그 열매는 달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나이가 들고, 병들고, 죽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의 세속적인 삶의 끝이다. ‘부분적 자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분리된 자아’로서의 삶이 끝을 맺을 뿐이다. 이러한 삶은 대개 투쟁의 연속이며, 참된 행복은 적은 삶이다. : 그렇더라도 이 속에도 기쁨은 있다. 그러나 영적 기쁨에 비교해 볼 때, 세속적 기쁨들은 일시적이며 슬픔에 의해 종종 차단된다. 간혹 죽음의 순간만이 이 기쁨을 차단시킨다 하더라도 역시 세속적인 기쁨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우주적 형제들을 통해 알게 된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사하신 규칙들과 도구들을 사용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나머지 절반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절반이 실제로 존재하고, 영구적이며,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신성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분리된 절반들과 다시 연결되어 전체로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 각자 각자의 목적은 우리의 ‘두 가지 본질[two natures]’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비개인적인 상태[impersonal state]’로 존재하는 우리의 ‘참된 자아[true self]’를 출현시키고, 또 개념화시키는, ‘그리스도의 힘[the Christ force]’을 통해서 실현된다. ; 이로써 우리는 ‘참된 개성[true identity]’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the mind of God]’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일부[a part of us]’가 우선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부모님은 우리를 지금의 이 물질적인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화 테이프에 나와 있는 요령들을 익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배우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은 ‘삶의 법칙[the Law of Life]’이다. ; 즉,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왕국[the kingdom within]’을 찾게 만들어 주는 신성한 지식을 배우는 일이다. 지금 여기 와 있는 우리의 우주적 형제들은, 그노시스파들[Gnostics](물질적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지식’을 개인적으로 이해하면 인간은 육체를 초월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종파--역주)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그들은 잠자고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들은 숭배되거나 찬양받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사난다[Sananda]가 한 예가 될 것인데, 그도 숭배되거나 찬양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그가 허락하는 맨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를 숭배하려 한다면 그는 즉시 사라지고 말 것인데, 왜냐하면 그를 “숭배”한다는 건, 당신이 당신 자신부터 숭배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숭배하는 것은 역시 그저 ‘우상 숭배’에 불과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접촉하고, 또 우리의 오래된 행동 패턴들이 깨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아톤[Aton]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지 혹은 적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지를 잘 식별하고 분석해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새로운 역량이자 발전해가는 역량’을 사용해야만 한다. ‘계속되는 진보’, 그리고 ‘계속되는 나아감’을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질 것들’을 끊임없이 적용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우주적 명령 체계[Space Command]’와의 직접적인 협력 관계로 이끌 것이며, 또한 우리가 타인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도록 이끌 것이다. 그 때, 작업들은 보다 쉬워질 것인데, 왜냐하면 ‘빛과 진실[Light and Truth]’을 개개인들이 잘 받아들이게 될 때, 그들은 비록 이 세상의 다양한 장소에 흩어져 살고 있을지라도, 보다 큰 ‘우주적 공동체[Cosmic Community]’의 구성원들이 되기 때문이며, ‘목적과 존재의 단일성[unity of purpose and being]’ 속에 결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이 어떤 영향력 아래에 있는지를 식별해 낼 수 있을까? 그건 아주 쉬운 일이다. 누군가가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기분이 상하고, 증오심을 갖고, 기타 허약한 영적 역량을 드러내는 온갖 약점들을 보인다면,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신 하나님 의식[God-in-us consciousness]’이 무기력한 상태로서, 그 자는(그 때 우리는) 곧 적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불행한 상황들로 인해, 우리는 에너지를 잃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사난다, 세인트 저메인, 세인트 프란시스[Saint Francis], 그리고 기타 스승들의 제자들--은 항상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고결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그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초인간적인 통제력을 선사했던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졌던가? :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었다. ; 나는 그가 했다는 일들을, 실제로 그가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 나라면 나를 십자가에 매달려는 자들 앞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 나라면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과 싸우거나 혹은 어떻게든 그들과 대응했을 것이다.” 그리스도 사난다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만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빛’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의 접촉 속에 있었다. 그는 불멸이었다. 그는 신성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영적 수준에서 개인적 경험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회합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는 다른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갖는 기쁨, 슬픔, 그리고 영예와 같은 것들을 초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그는 언덕 위에 올라갔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적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 자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부탁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진실과의 일정한 관계에 이르게 되면, 그 자는 ‘영원한 세상’과 ‘물질적인 세상’을 결합시킬 수 있게 되며, 이 두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게 된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땅에 살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우리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집’으로, 바로 우리가 떠나왔던 그 곳으로 되돌아 가게 되는 것이다.

하톤이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이지, 우리를 대신해서 일하시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그가 말한 바 그대로이다. 자유 의지는 우리 각각이 다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주선이 내려와서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 아마 우리는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 각각은 하톤과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이 곳 물리적인 세상에서의 존재 너머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의식을 발전[develop consciousness]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파국을 맞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오늘 당신은 E.J.(다르마[Dharma]의 남편으로 피닉스 저널을 출판--역주)를 통해(피닉스 저널을 통해) 얻게 된 요령들을 몇 번이나 실천에 옮겨 보았으며, “소유자 지침서[Owner Manual]”(피닉스 저널 제 27권--역주)에 들어 있는 정보를 얼마나 읽고, 또 숙고해 보았는가??

Salu

[인용의 끝]

하톤 : 여기 나와 있는 것과 관련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더 할 것이 없습니다. 나와 있는 그대로이며, 이 시대, 이 곳을 살고 있는 당신들은, 이 정보 속에 들어 있는 진실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실로 당신들은 적어도 “11시”까지는 진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그렇지만, 지금 시각은 거의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부디 당신이 걷는 행로에서, 당신이 선택하는 것들이 자신의 성장에 좋은 징조가 되어, 저마다가 ‘완전한 이해’에 이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그러나 그 반대로, ‘교훈들’을 배우지 못했을 경우에는, 배우게 될 때까지 ‘여행’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글을 보내준 당신(존 굴드[John Gould]--역주)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부디 당신의 형제들이 당신의 경고와, 당신의 통찰력 있는 주의 신호를 잘 알아 보았기를 기원합니다.


피닉스 저널 제 67권, “The Beast At Work” 제 1장, pp.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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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영의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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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79|1--]신비의 피닉스저널입니다. 요즘은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상당히 좋은 내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원문은 영어이고, 본인이 직접 해석을 하셔야 잘 이해가 되시겠죠....... 저도 아직 원문해석은 한번도 안해봤습니다.

청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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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지란게 정말 있는걸까요?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구?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로 일어날 뿐, 자유의지마저도 자아관념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라고 봅니다.

마도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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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4|1--]사실 좀 궁금한게 있는데..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궁금하군요..<br /><br />제가 봤을때 자유의지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개체성이 나타나면 생기는 것으로 보는데요..<br /><br />님한테 나는 무엇인지요?<br />

청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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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5|2--]전 간간히 불교수행하는 사람인데, 아직 높은 경지는 못가봐서 정확히 "나"에 대한 정의는 못내리겠네요. 흔히 불교에서 "나는 없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실제론 있다 없다로 논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부처님도 그런 주제의 토론을 경계하셨죠.(영혼이 있다 없다, 신이 있다 없다 등등...)

단지 지금 제 수준에서 느끼기에 인생이란 영화와 같다는 겁니다. 이미 정해진 인생을 우린 그저 보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는 일" 밖에 없습니다. 자유의지나 자아관념이란 것도 인생이 제공하는 다른 차원일 뿐입니다. 요즘의 4D영화에서 촉감이나 후각등을 추가시킨 것처럼요. 문제는 우리가 인생이란 영화에 너무 빠져들어서 영화와 "접착"되어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영화를 보다가도 언제든지 밖으로 나올 수 있지만, 영화가 너무 재미있다면 화장실도 참고 보고, 본 영화도 또 보고, 실제 그 주인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잖아요? 인생이란 영화도 그런 집착으로 인해 객관적으로 보질 못하고 인생에 접착되어 모든 고통과 행복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겁니다.

글이 좀 길어졌지만, 제 자아관은 대충 그렇습니다 ㅎㅎ

바라터님의 댓글

팩맨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나는 없다라는 것은 후기구조주의 인문학자들이ㅡ말하고 잇는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주체라는 것이 결국은 언어가 가지는 타자성에 의한 허상이라는 것이지요.
붓다는 시대를 넘어선 심리학자 였던것 같습니다.

바라터님의 댓글

팩맨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요원 작성일

      그날이 오면님 다른글에 댓글을 달았었는데 역시 제  예상이 맞앗네요.
플라톤주의에 심취하신듯 합니다.
초월성에 대한 화귀를 꿈꾸다 정작 몇십년 안되는 현실세계에서의 즐거움을 놓치실까
걱정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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